소설리스트

리콜 가이드-69화 (69/132)

#69

“그, 뭐…… 저기 정찰 나간 에스퍼랑은 깊은 사이인 거요?”

“딱히요.”

에스퍼와 가이드가 사귀는 일이 없지는 않은데다, 척 보기에도 고은교의 에스퍼는 이승우가 유일해 보였으므로 이런 식으로 조심스럽게 물어올 법했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가이딩을 끝냈다. 이승우와 어떤 사이인지 굳이 다른 사람에게 말해 줄 필요가 없을뿐더러, 사실 그대로이기도 했다. 서로의 ‘my’ 목록에 올라 있는 관계인 것으로 충분하다.

잠깐의 소강상태가 지나고, 그들은 본격적으로 나무 밑동만 남은 숲을 통과하기 시작했다. 계곡이 깊어질수록 늑대나 여우로 시작했던 몬스터들은 점점 더 괴랄한 형태를 띠어 갔다.

물론 머리 세 개 달린 늑대도 썩 보기 좋은 편은 아니었지. 그는 목에서 잘려 나왔으면서도 원통스럽게 이를 닥닥 부딪치는, 반쯤 썩어 있는 매머드의 대가리를 유심히 살폈다.

‘좀비는…… 아닌데.’

드물기는 하지만 좀비 포자를 흩날리는 버섯 몇 개가 호수 근처에서 기생하여 자라나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 몬스터들의 변이가 일어난 원인을 알 것 같았다. 물론 좀비 버섯 몇 개로 게이트의 위험성이 특별히 상승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냥 몬스터들이 조금 더 끈질겨진다.

그래서 아무도 이 유의미한 변화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다. 그저 능력을 좀 더 사용하여 몬스터들을 학살할 뿐.

드라이밸리 게이트는 중간 부근부터 사막에서나 볼 수 있는 전갈, 사마귀, 도마뱀 같은 형태의 몬스터가 등장하는데, 이번에는 새로운 종류의 몬스터들이 튀어나왔다.

‘변형이 좀 됐군.’

지구의 지형이 다 다른 것처럼, 드라이밸리 게이트라는 이름으로 묶였다 해서 그 게이트들이 모두 다 똑같은 것은 아니다. 제주도 게이트처럼 이전에 본 적 없는 게이트가 튀어나오는 경우도 흔했다.

드라이밸리 게이트는 북극에 있는 사막의 지명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 사막이 배경인 게이트답게 굉장히 건조한 기후여서 호수를 볼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이곳은 빙판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호수가 몇 개나 발견됐다. 드라이밸리라고는 하지만 사막보다 일반적인 북극에 가까운 지형이었다.

‘왜 우시현이 필수로 들어와야 하는지 알 것 같네.’

물 에스퍼가 없었다면 곤혹을 치를 듯했다. 어쩐지 모의 게이트 시뮬레이션 역시 기존의 드라이밸리 게이트답지 않게 호수가 간간이 나오더라.

모의 게이트 시뮬레이션은 이능력으로 만든 게이트 구현화 장치로, 게이트 안쪽의 환경을 투시하여 사용자로 하여금 미니 게임처럼 경험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 워낙 구현도가 좋아 시뮬레이션만 제대로 해내면 게이트를 클리어하는 것에 문제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다.

하지만 사실 이 투시는 완벽하지 않다. 그가 알기로 95퍼센트쯤 안에 있는 게이트와 일치했다. 다시 말해 나머지 5퍼센트에서 얼마든지 변수가 생길 수 있다는 의미다.

‘이 좀비 버섯처럼.’

괜히 게이트들이 이어져 있다고 생각했던 게 아니었다. 아주 뜬금없는 곳에서 다른 게이트에서나 볼 수 있는 특징이 종종 튀어나왔다. 좀비 버섯 역시 그런 것들 중 하나였다.

버섯 포자는 게이트 안의 동물과 식물들을 감염시켰다. 드라이밸리에서 살아가는 식물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고 대부분이 몬스터들이었다. 하지만 게이트의 몬스터들 중 절반은 물 아래에서 살았으므로 버섯의 포자로부터 안전했다.

“어, 조심하세요.”

하지만 귀찮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머리와 몸통이 끊어졌는데도 매머드의 대가리는 어떻게든 지나가는 사람들을 공격하기 위해 발악했다. 가이드를 보호하던 염동 에스퍼가 머리를 납작하게 짓이기고 나서야 조용해진다.

세 번째 구역을 지나자 성인의 키를 훌쩍 넘는 커다란 전갈들이 몰려왔다. 꼬리 끝에는 검은빛이 도는 맹독이 뚝뚝 떨어졌다.

‘이건 귀찮은 정도가 아닌데.’

독을 다루는 몬스터를 상대하는 일은 정말 까다롭다. 몬스터들을 최전방에서 상대해야 하는 에스퍼들의 표정이 바로 굳는 게 보인다. 바늘처럼 뾰족한 꼬리에 잘못해서 팔뚝에 스치기라도 하면 치명적인 독에 중독되어 생사를 오락가락하게 될 것이다.

“다행이네요. 해독 능력이 있는 에스퍼가 있으니까…….”

‘이미 파악하고 있는 부분이었나.’

그렇다면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바로 그때, 우시현은 능력을 넓게 사용하여 전갈들이 독을 쓸 수 없게 만들었다. 단숨에 말라붙은 독 때문에 전갈들은 우왕좌왕하며 뾰족한 이빨로 에스퍼들을 물어뜯으려 했다. 에스퍼들은 필살기를 잃은 전갈 몬스터를 손쉽게 격파해 나갔다.

“저, 저 꼬리에 긁혔어요! ……어라?”

“엄살 부리지 마라, 김창석.”

게다가 ‘독’ 역시 물의 성분을 갖고 있었기에 우시현은 독을 무효화시킬 수 있었다.

‘상성 좋고.’

해독 능력 에스퍼는 그냥 센터에서 지원해 준 에스퍼인가 보다. 만일의 상황에서 필요할 수도 있으니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몬스터들은 기세등등하게 이를 드러내며 겁먹지 않고 에스퍼들에게 달려들었다. 고은교는 자신이 가이딩해 준 에스퍼들로부터 아까보다 훨씬 살가운 보호를 받으며 다른 가이드들과 함께 뒤로 물러나 있었다.

노동을 한 대가가 바로바로 온다는 건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달려드는 전갈의 수가 워낙 많은 탓에 그들 주변으로 전갈의 잔해가 툭툭 떨어졌다.

“이거 구워 먹으면 랍스타 같을지도 몰라.”

보다 효율적인 보호를 위해 가이드들은 네 명이 서로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워낙 압도적인 힘차이 때문인지 그들은 방만하게 풀어져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가이드 중 하나가 배를 드러내고 떨어진 전갈의 파편에 호기심을 보였다. 겁도 없이.

“그……!”

그만두라는 말이 다 나오기도 전이었다. 몸통의 사분의 일밖에 남지 않은 전갈은 용케 살아 있는지 한쪽만 남은 집게를 쩍 벌리며 가까이 다가온 가이드의 다리를 물려고 했다.

이게 바로 모의 게이트 시뮬레이션의 단점이었다. 모의 시뮬레이션이 전부라고 생각하니까, 변수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가 쉽지 않다.

반사적으로 고은교는 그 가이드의 팔을 잡고 제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너무 놀란 나머지 가이드가 균형을 잃고 쓰러졌고, 그 덕에 그는 그 가이드와 함께 바닥을 굴러야 했다.

그 과정에서 두 명분의 몸무게가 오른쪽 발목을 내리눌렀다. 동시에 화끈한 통증이 느껴진다. 그는 겨우 입술을 깨물고 비명을 참았다.

“부, 분명히 죽어 있었는데.”

일단 구해낸 다음 얼굴을 보니, 게이트 초입에서 자신에게 가이드가 부족하다며 가지 말라고 그를 붙잡은 그 가이드다. 만약 자신이 이 자리에 없었다면 이 녀석은 한순간에 다리가 잘려 나갔을 터였다.

“얼빠진 소린 관두고 비켜.”

“아, 아. 가, 감사합니다.”

‘하아…….’

고통스러운 신음을 삼키며 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달려온 에스퍼가 살아 펄떡대는 전갈의 오른쪽 머리 부위를 깨트렸다.

“야, 괜찮냐? 괜찮으세요?”

제 팀원에게 먼저 괜찮냐고 물은 다음, 약간 걱정스러운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며 괜찮냐고 묻는다.

뭐…… 조금 다친 걸 가지고 팀의 전원이 몰려와 온갖 호들갑을 떨지 않으니 편했다. 후순위로 밀린 것쯤이야 아무렇지 않을 만큼.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자신의 부상을 알렸다.

“발목이 접질린 것 같은데요.”

“아, 잠깐만요.”

외상 치료 능력이 있는 에스퍼라도 있는지, 그에게 기다리라고 말한 에스퍼가 자리를 떠났다.

“저, 저…….”

옆에서 쭈삣대는 목소리가 들린다.

그래, 이 녀석이 있었지. 해맑게 웃던 얼굴은 어디 가고 눈물 자국이 선연한 얼굴이 연신 안쓰럽게 일그러졌다.

그의 오른쪽 다리를 깔고 앉았던 가이드가 잔뜩 울상을 지으며 사과했다.

“아……. 그,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했습니다…….”

제 잘못 아니라고 우겨대는 것도 아닌데 이 정도면 뭐 나쁘지 않다. 통증을 참으며 고은교가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좀비 버섯 포자 때문에 몬스터들이 잘 죽지 않는 것 같네요.”

“조, 좀비요?”

가이드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물밀듯이 쏟아져 나오던 전갈 떼들이 사라졌을 때쯤, 잠깐 기다리라고 말했던 에스퍼와 얼굴을 모르는 에스퍼, 그리고…… 우시현이 그에게 다가왔다.

‘그래도 팀장이라고…… 부상자 확인은 하네.’

표정은 그닥 좋지 않았지만.

“상처를 좀 봐도 될까요?”

고개를 끄덕이자 온화한 인상의 에스퍼가 퉁퉁 부어오르기 시작한 오른쪽 발목을 이리저리 살핀다.

“어쩌죠. 저는 해독 능력만 있는데……. 혹시 모르니 능력을 좀 써볼까요?”

“…….”

그럼 그렇지. 센터에서 그 귀한 치유 에스퍼를 둘이나 내주었을 리가 없었다.

“좀 부탁하자…….”

옆에서 가이드가 조그만 목소리로 칭얼거렸다. 그게 마음이 안 든 건지 어쩐 건지, 우시현은 내내 눈썹을 찌푸린 채였다.

“해 봐.”

우시현의 허락이 떨어진 순간, 그의 발목을 잡은 의료 에스퍼가 힘을 쓰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유의미한 효과는 없었다.

“음……. 걸으실 수는 있겠어요?”

“네.”

어쩌다 보니 오른쪽 발을 질질 끌며 다니는 데 요령이 생겼다. 그동안 겪은 일들이 한두 가지여야지.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치유 에스퍼의 조치를 받아들였다.

그는 붕대로 단단히 발목을 고정시킨 다음, 일어섰다.

그 모습을 내내 쳐다보던 우시현이 인상을 구긴 채 고개를 돌린다.

‘……양심은 있나 보네.’

자기 팀원을 구하려다 이렇게 됐으니까 굳이 비아냥대지는 않는 것 같았다. 내심 우시현의 반응을 신경 쓰고 있었는지 상황이 부드럽게 풀리자 마음이 놓인다.

그를 넘어뜨린 가이드가 부축해 주겠다고 자처했다. 걷는 데 도움을 받자 평상시의 걸음 속도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듯했다. 팀은 더 이상 시간을 끌지 않고 게이트 안쪽으로 무사히 진입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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