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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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몇 번째 구역이지?”
“네 번째.”
팀은 확실하게 몬스터들을 없애며 게이트를 클리어해 나갔다. 그 과정에서 좀비 포자를 퍼트리는 버섯 군집을 발견했고, 좀비 포자가 공기 중으로 흩어져 팀원들을 공격하려는 순간 우시현이 공기 중의 수분을 이용해 포자들을 전부 바닥으로 가라앉혔다.
그들이 버섯 군집을 모두 제거했을 때쯤이었다.
정찰을 나갔던 이승우가 돌아왔다.
이승우가 돌아옴에 따라 전진하던 팀이 잠깐 멈추었다. 이승우는 선두를 이끌던 우시현에게 먼저 정찰 내용을 보고했다.
“터닝 포인트까지 아무 문제없어. 보스 방에 들어가면 보스 몬스터 어그로를 끌까 봐 거기까지는 안 들어갔고.”
“어. 수고했다.”
우시현의 무뚝뚝한 대답이 들렸다. 자연스럽게 이승우의 시선이 고은교를 향한다. 아마 하늘에서부터 고은교가 무리에 잘 있는지 확인했을 터였다. 그리고 봤겠지.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 줄 수 있을까?”
다른 가이드의 팔에 기대어서 걷는 고은교를.
“왜 교수님만 다친 건지.”
이승우가 고은교를 떠난 지 몇 시간 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모두 멀쩡한데 고은교가, 심지어 가이드가 다친 게 믿을 수가 없다는 뜻이었다. 몬스터를 잡느라 이런저런 상처가 생긴 에스퍼들도 있었지만, 부상의 정도가 심하지 않았다. 당연히 에스퍼들의 도움을 받는 가이드는 오래 걷느라 근육통이 생기는 것 말고는 다친 곳이 없어야 정상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그를 부축하고 있던 가이드가 모기만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겠는지 우물댄다. 그 꼴을 보다 못한 우시현이 퉁명스러운 어조로 아까의 일을 축약하여 전했다.
“넘어졌어.”
이승우는 말없이 무성의한 변명을 들었다.
사실 하늘에서 고은교를 발견한 순간 이승우는 다른 사람을 탓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제 가이드를 버려두고 자리를 비운 건 바로 자신이었다. 그 어떤 상황이나 지시가 있든 간에 그것 하나는 변하지 않는 진실이다.
무슨 일이든 일어나고 난 다음에 탓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이승우는 자신을 불안하게 바라보는 가이드의 손에서 고은교를 넘겨받았다. 그리고 이전의 게이트에서 그랬듯, 그는 고은교를 제 품 안에 안아 들었다. 그의 다리가 땅에 닿지 않게.
“이건 좀…….”
“가만히 계세요. 치료도 제대로 못 하는 상황이잖아요.”
“…….”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승우가 그를 안아 든 순간부터 그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시선이 두 배로 늘어났지만, 얼굴에 자책의 빛이 어려 있는 이승우를 두고 차마 내려놓으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승우까지 가세하자 게이트를 클리어하는 과정은 놀랍도록 순조로워졌다.
다른 에스퍼들이 손을 댈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바람과 물의 힘이 눈에 닿는 몬스터들이란 몬스터들을 전부 격렬히 파괴했다.
마치 바람이 그들의 등 뒤를 떠미는 것 같았다. 언젠가 한 번 본 적 있던 회오리바람이 불개미 군단을 쓸어버리는가 하면, 동쪽 하늘을 가득 메운 히피 무리의 날개를 꺾어 떨어뜨렸다.
고은교는 이승우가 능력을 너무 많이 쓰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웠지만, 경쟁이라도 하듯 이승우와 비등하게 능력을 사용하는 우시현이 있어 차마 능력을 좀 줄여 쓰라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자칫하면 자신의 에스퍼만 아낄 줄 안다는 인상이 남기 때문이다.
이승우의 품에 안겨 이동하는 탓에 고은교 또한 선두를 달리게 되었다. 공중에서 떨어진 히피 무리를 익사시킨 우시현이 이승우의 바로 옆에서 몬스터들을 제거해 나갔다. 그 말은 우시현이 고은교와도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는 뜻이다.
‘사이가 좋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두 사람은 서늘한 얼굴로 몬스터들을 학살할 뿐,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의도치 않게 그사이에 끼어 있는 고은교만이 두 사람 사이의 냉각된 분위기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들은 단숨에 터닝 포인트까지 도착했다.
아무리 최상급 에스퍼들이 둘이나 참여한 게이트 작전이라지만, 게이트의 크기도 크기였고 몬스터들의 수도 무척 많았기 때문에 그들이 터닝 포인트에 도달할 쯤엔 주위가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해도 달도 없는데, 하루가 끝나면 당연하다는 듯 밤이 찾아온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진다. 마치 게이트 안이 현실이 아니라는 걸 알려 주는 것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수고하셨습니다.”
“고생 많았어요.”
그들은 터닝 포인트에서 하룻밤 묵고 그다음 날 컨디션을 회복한 뒤 보스 몬스터를 공략하기로 했다. 사람들의 긴장이 조금씩 풀리며 오늘 전투 마무리를 축하하고 내일 보스 몬스터 전투를 잘하자고 격려하는 훈훈한 상황이 이어졌다.
이승우는 간이 컨테이너가 전부 설치되고 나서야 고은교를 품에서 내려 주었다.
정확히는 고은교의 발목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그가 배정받은 간이침대 위에 그를 올려놓은 것에 가까웠다.
붕대를 풀자, 다친 직후보다 훨씬 더 부어있는 발목이 드러난다.
“……많이 아프세요?”
이승우가 묻는다.
‘당연히 아프지. 뭘 그런 걸 묻고 있냐.’
게이트 중간부터 이승우의 품에 안겨 왔지만, 발목의 상태는 악화되었으면 악화되었지 조금도 낫지 않았다. 한 번 꺾였던 관절은 예전만큼 회복력을 가지지 못했다.
“통증은 있지만 심각한 수준은 아닙니다.”
무심한 대답에 이승우의 얼굴이 하얗게 굳는다. 이윽고 이승우가 조심스럽게 운을 뗀다.
“……터닝 포인트에서 게이트 공략이 끝날 때까지 있는 건 어떠세요.”
그런 무슨 말도 안 되는. 보스 몬스터를 잡을 때 쉬고 있는 건, 게이트를 클리어하는 아주 중요한 순간에 협조를 하지 않는다는 소리와 마찬가지였다.
대답은 다른 방향에서 들려왔다.
“그래, 그렇게 해.”
언제 들어왔는지 모르겠다. 이승우의 큰 키에 문이 가려져 있어 전혀 알지 못했다.
“어차피 거치적거리니까 그냥 여기 박혀 있으라고.”
“우시현.”
짜증이 나 있는 목소리였다. 그런 말을 마음대로 내뱉는 건 우시현뿐이다. 아까 봤을 때는 자신의 부상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더니 왜 굳이 들여다보러 왔는가.
정말로 고은교가 신경 쓰여서? 아니면, 가이드 보호를 소홀히 한다는 소문이라도 날까 봐? 부상이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인데 어째서.
이승우가 싸늘한 얼굴로 뒤를 돌아본다. 제 가이드가 다치면 어떤 에스퍼라도 예민해지는 걸 알 텐데, 왜 시비를 거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럴 수는 없습니다.”
고은교가 딱딱하게 대답했다.
“뭐?”
“그럴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승우 에스퍼는 강력한 전력입니다. 이승우 에스퍼가 빠지면 전력이 손실되고, 그만큼 다른 사람들의 부상 위험도가 높아집니다.”
“무슨 개…….”
반사적으로 욕설을 지껄이려던 우시현이 눈썹을 팍 찌푸리며 입을 다물었다. 굳이 이승우를 걸고넘어진 게 주효했는지, 그는 고은교를 한번 사납게 흘겼을 뿐 무슨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고은교 자신이 무작정 안 된다고 하면 그의 무능력을 꼬집으며 비아냥댔을 테지만, 이승우의 능력을 가지고 말하면 이승우를 무능력하다고 비난하는 셈이니까.
“가이드님, 괜찮……. 아, 티, 팀장님.”
그때, 그의 다리를 분질러 놓다시피 한 가이드 녀석이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오려다 움칠했다.
“어…… 괜찮아 보이네, 가이드 양반.”
다른 녀석들도 따라왔군. 모의 시뮬레이션부터 같이했던 에스퍼 두 놈이 주저하며 서 있었다.
그들은 어색한 얼굴로 고은교에게 알은 척을 하더니, 컨테이너 박스 안에 이승우와 우시현이 있는 것을 보고 눈치를 보는 듯했다.
“너, 나 좀 잠깐 보자.”
잠깐 눈썹을 찌푸리며 입을 다물었던 우시현이 말했다.
*
명백히 우시현은 고은교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시현이 말하자마자, 이승우가 어림없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안 돼.”
“안 팰게. 저 새…… 인간한테 개인적으로 할 말이 있어서.”
그 말에 이승우의 눈이 번뜩인다.
“뭐? 안 팬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는 아마 고은교의 집으로 처음 찾아온 날, 전신에 얼룩덜룩한 멍이 있었던 고은교를 떠올리는 듯했다. 이승우가 폭행범을 특정한 그 순간, 우시현 역시 고은교가 자신과의 만남을 이승우에게 숨겼다는 걸 깨달았다.
“우시현, 똑바로 말해. 너…… 설마.”
“아, 씨발. 니가 무슨 상관인데.”
우시현에게 몸을 확 돌린 이승우가 사납게 다그쳤다. 하지만 우시현 역시 기가 눌리거나 동요하는 기색 없이 이승우를 정면에서 마주 보았다.
이승우는 어렸을 때부터 함께한 친구는 아니었지만, 마음이 통하고 잘 맞는 친구였다. 고은교와 얽히면서 시작된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부채감이 있기도 했다. 그러니까 바로 우시현, 자신이.
고은교가 처음 선택했던 건 우시현이었다. 이 짜증 나는 관계가 시작된 건 고은교의 의지였다는 소리다. 그게 싫어서 고은교를 떨어트리려 노력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잘 풀리지 않았다. 아니, 우시현은 성공했다. 대신 이승우가 우시현의 자리에 남겨졌다.
“…….”
무슨 상관이냐는 말에 이승우가 입을 다문다. 똑똑한 친구였으니 그때의 일 역시 고은교의 선택이라고 말하는 우시현의 의도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고은교가 우시현에게 집착하고 있다는 걸 누구보다 이 두 사람이 가장 잘 알았다.
그래서 우시현은 이승우에게 동질감을 느꼈고, 부채감을 느꼈으며, 또 다른 자신처럼 이승우를 의식했다. 그래서 고은교가 우시현을 ‘대신해서’ 선택한 것이 이승우라는 사실에…….
“……하. 중요한 말이라고.”
만족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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