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콜 가이드-71화 (71/132)

#71

이승우가 아무리 애써도 우시현을 넘을 수 없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한 번도 이승우로부터 열등감을 느껴본 적 없었지만, 이 기묘한 사실관계는 이상하게 우시현의 마음을 건드렸다.

갑자기 태도가 바뀐 고은교. 자신을 풀어 주겠다고, 미안하다고 하는 이 볼품없는 남자를 그렇게까지 때리지 않아도 됐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잠깐 들었다. 이 새끼가 자신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았지만,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이승우가 대뜸 찾아와 자신이 고은교와 페어를 맺겠단 소리를 들었을 때, 그리고 ‘고은교가 사실은 고은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기상천외한 소리를 했을 때는 합리화를 하다가 미쳐 버린 건 아닐까 조금 의심했었는데.

“어쨌든 안 돼.”

그건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유난을 떨 거면 처음부터 제대로 지켰어야지, 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그 꼴을 고은교를 포함하여 세 명의 팀원들이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얘네 왜 이래?’

심지어 이승우가 어찌나 철벽처럼 구는지, 오히려 떼를 쓰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우시현이 고은교를 해코지하리라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이승우의 강력한 반대에 가로막힌 우시현이 눈썹을 찌푸렸다.

‘이건 좀 곤란한데.’

이승우는 바람 에스퍼지만 거칠다기보다 정적인 사람이었다. 그런 이승우가 어디에 버튼이 눌렸는지, 바짝 약이 오른 게 너무 잘 보인다. 고은교는 입을 꾹 다물고 이승우와 우시현이 실랑이를 벌이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 공간에 이 녀석들만 있었다면 괜찮았다. 문제는, 팀장인 우시현이 어떤 용건을 가지고 팀원에게 면담을 요청했는데 이를 무시하는 것을 다른 팀원들이 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이곳은 게이트 안이다. 팀장의 입김이 가장 강력하게 발휘되어야 하는 곳에서 우시현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 평판에 크나큰 결점을 남길 것이다.

‘……망할.’

게이트 클리어에 협조하지 않는 걸 넘어, 현장에 어울리지 않는 이능력자로 낙인찍힐 위험이 있었다.

우시현을 따라가고 싶지 않은 것은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대로 뒀다간 팀장의 권위를 무시해 팀내 분위기를 망친 것으로 모자라, 게이트 안에서 팀을 분열시켰다는 소리까지 들을 판이었다.

“저, 그……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컨테이너 입구에 서 있던 팀원들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난다. 우시현은 차라리 이곳에서 말을 해 버릴 생각인지 입술을 열었다가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입을 닫았다. 그 모습에 고은교는 우시현이 그냥 스트레스 해소를 할 겸 자신을 불러내어 무작정 때릴 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나에게 용건이 있다면?’

머리가 맹렬히 회전한다. 왠지 모르게 이 용건이 지금 고은교에게 할 말이 아니라, 이전의 ‘고은교’에게 할 말인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가 이승우를 한 번, 우시현을 한 번 쳐다보았다. 이승우의 얼굴에서 살벌한 기운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팀원이 팀장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하극상이 벌어지기 1초 전이었다.

그는 결정했다.

일단 이 폭탄을 막자. 그리고…….

“잠깐이면 됩니까?”

이 개자식이 무슨 소리를 할지 한번 들어나 보자.

놀란 듯 우시현이 고은교를 본다. 입 안의 여린 살을 씹으며 우시현이 어렵잖게 대꾸했다.

“……그래.”

“알겠습니다.”

그가 승낙하는 순간, 이승우가 고은교를 뒤돌아보았다.

“교수님.”

언뜻 애절하게까지 들리는 목소리가 고은교를 붙든다. 막을 수 있다면 전력으로 막고 싶다는 듯 이승우가 고은교의 앞에 서서 호소하듯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이승우의 어깨를 살짝 잡고 놓으면서 고은교가 말했다.

“괜찮습니다. 여기에는 이승우 에스퍼도 있으니까.”

“…….”

이 말을 이승우가 어떻게 받아들였을지는 모르겠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다리에 통증이 느껴졌지만 못 걸을 정도는 아니었다. 고은교가 움직이자 이승우가 반쯤 무의식적으로 고은교를 따라 나오려는 게 보인다.

고은교가 간이침대에서 일어나자 우시현은 묵묵히 앞서 갔다.

“갔다 오겠습니다.”

고은교의 인사에 이승우는 더 나오지 않고 컨테이너 박스 안에서 멈춰 섰다. 아직도 컨테이너 박스 근처에서 얼쩡대고 있는 이능력자들이 제 숙소 안으로 사라지면…….

‘눈치껏 따라오겠지?’

반쯤은 이승우를 믿고 거는 도박이었다. 하지만 거리가 있어도 에스퍼의 청각과 시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니 만일의 상황에서 소리를 치면 이승우는 바로 그를 구하러 달려 올 것이다.

우시현과 고은교는 터닝 포인트 안쪽이 아닌, 바깥쪽을 향해 걸어갔다. 이 냉혹한 에스퍼는 절뚝이는 고은교를 부축해 주지도 않았다. 통행에 불편이 있을까 봐 이승우가 죄 쓸어놓은 숲이 울퉁불퉁한 계곡 가장자리에 조금 남아 있었다. 그들은 나무 우거진 작은 숲속으로 조금 더 들어갔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까지 멀리 떨어지는지 도통 모르겠는데.

‘이 새끼……. 진짜 계곡에다 나 묻어 버리려고 이러나?’

임시로 만들어진 숙소와 더 떨어지면 위험하겠다는 생각에 멈춰 선 순간, 우시현 역시 멈춰 서서 고은교를 돌아보았다.

“……무슨 용건입니까?”

고은교가 물었다. 우시현은 양쪽 미간을 깊게 좁힌 채 아무 말 없이 고은교를 바라보고 있었다. 날카로운 시선이 눈 안으로 찔러 들어오는 것 같다.

다음 순간, 우시현이 고은교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고은교는 저도 모르게 전신을 바짝 긴장시켰다. 우시현에게 미친 듯이 맞은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시간 낭비는 서로 하지 말자고.”

“바라던 바입니다.”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니 말대로 해 줄게.”

그건 아주 낮은 목소리였다. 고은교는 순간적으로 우시현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눈을 굴렸다.

“……예?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받아 주겠다고. 가이딩이든, 그 빌어먹을 목록이든.”

“……뭐라고요?”

가이딩? 목록? ……‘my’ 목록을 말하는 건가, 지금?

머릿속으로 연신 의문이 떠오른다. 지금 이 상황에서 긴히 할 말이라는 게 왜 이런 종류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알아들었으면서 왜 모른 척이야.”

이제 우시현은 비딱하게 고개를 기울이고 있었다.

‘하, 이 새끼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러나 싶었더니…….’

고은교는 황당함을 금치 못한 채 우시현을 바라보았다.

우시현은 아직도 고은교가 자신을 놓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죽어도 고은교가 싫어 죽겠다는 심경에 변화가 생긴 것 같았다.

글쎄, 우시현이 아직도 착각 속에 빠져 있는 것 따위는 알 바 아니었다. 이 녀석의 자의식이 너무 비대한 나머지 인생 건강을 위해서라도 좀 다이어트해야 할 필요성이 있겠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을 뿐.

“나는 우시현 에스퍼를 내 목록에서 삭제했는데요.”

그는 코웃음도 치지 않고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다시 넣어.”

우시현의 대답이 바로 따라붙는다.

그로서 고은교는 우시현의 이 말도 안 되는 제안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걸 알자마자 고은교는 또박또박 말했다.

“그건 안 됩니다.”

이보다 더 단호할 수 없었다. 그에 더해 고은교는 우시현을 아주 미친놈 보듯 아래위로 훑었다. 그리고 힘주어 말하기 시작했다.

“가이드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에스퍼를 내 목록에 넣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우시현 에스퍼는 나를 혐오하지 않습니까? 솔직히 지금도 나를 싫어하는 것 같은데요. 나도…….”

나도 니가 싫다. 싫어서 죽겠다. 너 따위랑 페어를 맺으라고 하면 센터를 그냥 폭파시키고 싶을 거다. 그런 말을 하려고 했다.

우시현이 고은교의 양 어깨를 움켜쥐고, 갑작스럽게 입을 맞췄다.

잠깐 사고가 정지된다. 그 덕에 말이 뚝 끊겼다. 이것이 무슨 상황인지 이해를 할 수가 없어서 넋이 빠진다. 이후로 까슬한 입술의 감각 때문에 전신에 소름이 쭈욱 돋았다.

우시현이 그에게 키스했다. 키스했다!

“미쳤습니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우시현의 얼굴을 주먹으로 한 대 갈긴 뒤였다.

때리고 난 뒤에야 아차 싶었다. 시비 붙는 걸 밥 먹듯 하는 놈이니 정당방위 운운하며 자신을 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우시현은 자신의 얼굴을 친 고은교에게 응징의 철퇴를 내리는 대신 입가를 닦으며 피식 웃었다. 고은교의 주먹 따위는 그냥 파리가 앉았다 간 거나 다름없다는 듯이.

‘……그냥 맞아 준 건가.’

고은교의 허접한 주먹이 날아오는 것 따윈 슬로우 모션처럼 보였을 것이다. 아마 이건 그냥…… 자의로 맞아 준 거나 다름없었다.

“미치진 않았는데.”

“한 번만 더 이딴 식으로 무례하게 스킨십하면 센터에 고발한 뒤 민사, 형사 소송을 걸고 공론화시키겠…….”

봐주는 건 저번 한 번뿐이었다. 이전에 고은교가 한 짓이 있으니 한 번 넘어가겠다는 거지, 앞으로도 계속 봐주겠다는 건 당연히 아니다.

우선 우시현을 사회적으로 처형하고, 이능력자 특별법에 입각하여 가이드를 억지로 추행한 죄로 그를 빵에 보낸 뒤 정신적 피해 보상을 받아 내겠다는 계획이 막 세워질 때였다.

“니가 말했던 운명이라는 거.”

“……네?”

사고가 한 번 더 정지한다.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는데, 그게 뭐가 됐든……. 납득은 해 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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