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운명. 운명이라니.
‘고은교가…… 우시현에게…… 운명을 느꼈다고?’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한다. 폭격 같은 사실이 귀를 넘어 뇌를 때리는 느낌이다.
놀랍게도 그 순간 드는 생각은 자신과 ‘진짜’ 고은교가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이승우에게 느꼈던 운명의 감각을 우시현에게 느껴 본 적 없다는 건 꽤 많은 의미를 시사했다.
자신은 ‘이승우’에게 느낀 운명이 고은교의 것이라 생각했고 지금껏 착각해왔다. 이승우의 첫인상을 보고서는 과연 고은교랑 어울리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으니까.
하지만 아니라면?
그렇다면, 방금 우시현의 말로 대부분의 일이 아귀에 들어맞는다.
어째서 고은교가 우시현에게 그토록 비이성적인 집착을 했는지. 그 광기 어린 숭배가 어디에서부터 기인되었는지 말이다.
안타깝게도 고은교만이 우시현에게 운명을 느낀 모양이었다. 그가 알기로는 대부분이 쌍방으로 서로의 운명을 느낀다고 들었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는 모양이다. 그랬으니 우시현은 얼마나 진절머리 났을 것이며, 고은교는 또 얼마나 애가 탔을까.
진짜 고은교에게는 미안하지만……. 고은교가 우시현에게 느낀 것이 사랑이 아니라 ‘운명’, 즉 매칭률에 불과했다면 자신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자신은 우시현에게 아무런 매력을 느끼지 못했고, 고은교의 침실 벽을 장식한 우시현의 사진을 죄책감 없이 떼어 낼 수 있으리라.
“그런……. 그건…….”
다만 대답할 말이 궁색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우시현이 과거의 이야기를 꺼낸 순간 그 말은 무조건 진실이 된다. 명백히 과거의 고은교가 우시현을 설득하기 위해 한 말이었다. 우시현이 자신의 운명이라는 것을 핑계 삼아 그동안 매달려 왔던 거라면, 이제 와서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것 역시 명백한 사실이다.
‘……차라리 내가 진짜 고은교가 아니라고 말해?’
이미 그는 현장 라이선스를 가지고 있었고, 이승우는 자신이 진짜 고은교가 아니라는 이유로 자신을 버릴 에스퍼가 아니었다.
아니, 그래도 상관없었다. 태어나면서 가졌던 고은교의 모든 권리를 잃는 한이 있더라도 우시현과 재결합할 생각은 없었다. 당연하지만 우시현이 어디를 가서 고은교가 자신의 운명이니 뭐니 떠들고 다니게 두고 싶지도 않았다.
‘여기에서 내가 진짜 고은교가 아니라고 말하고, 운명도 아니라고 한다면.’
우시현은 믿을까? 믿는다면, 과연 어디까지 믿을 것인가? 그의 믿음과는 상관없이 정리해 두어야 하는 일 더미가 튀어나온 격이다.
순간적으로 모든 가능성을 점친 뒤, 그가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승우는 빼 줘라. 걔는 그럴 애 아니니까.”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드물게도 우시현의 얼굴 위로 떠오른 감정은…… 죄책감이었다.
‘아하.’
자신 때문에 이승우가 피해를 보고 있다고 생각한 건가. 그래서…… 다시 고은교에게 돌아올 생각을 하게 된 거다. 그렇게 싫어하던 고은교에게 입을 맞춘 건 아마 자신이 이만한 각오가 되었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참 자기희생적인 발상이다.
속에서 쓴물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승우 군은…….”
“너 같은 새끼가 약점 잡고 휘두를 수 있는 녀석이 아니라고. 이쯤 하면 충분하지 않았냐?”
“…….”
나직하게 말하던 우시현이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칼을 쓸어 넘긴다. 그리고 후, 하는 숨소리와 함께 최후통첩을 날렸다.
“나만 남겨 둬.”
그 말을 듣자 심장이 불쾌하게 쿵쿵 뛰기 시작했다.
왜 우시현이 이 말을 굳이 따로 불러내어 했는지 납득이 갔다. 어쨌든 자신만 ‘my’ 목록에 남겨 두라는 말은 서로를 배타적인 관계로서 두자는 의미고, 그건 아무래도 남들 앞에서 할 만한 소리는 아니었다.
우시현은 여전히 고은교가 싫은 눈치였다. 고은교가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어서 그동안 빠져나오려 발버둥 쳤던 고은교의 ‘my’ 목록에 다시 들어가기로 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우시현이 저자세로 나오는 이유는 단 하나다.
자신의 친구 이승우가 더 이상 고은교에게 휘둘리는 꼴을 보지 않기 위해서.
우시현은 고은교가 이승우의 약점을 잡아서, 이승우를 자신의 손발처럼 부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이승우를 빼내고자 했다. 그렇게 희생적인 인간은 아닌 것 같은데 역시 최저한의 양심은 또 있는 대단히 입체적인 인간상이었다.
“앞으로…… 잘해 볼 테니까.”
어쨌거나 우시현 역시 썩 입맛 도는 이야기는 아니었는지 눈초리가 사납다. 그럼에도 제 처지를 알아서 어투는 그나마 부드럽다고 할 수 있었다.
꽤 오래 생각해서 한 말인지 우시현은 덧붙여 말하지 않고 목을 우둑 꺾으며 고은교를 바라보았다. 당연히 고은교가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얼굴이다.
우시현이 보는 고은교와 이승우의 관계가 그 정도라는 것에 반발심이 드는 것도 잠깐, 똑같은 크기의 자괴감이 올라온다. 설마,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그와 이승우의 관계가…….
‘아니야.’
그가 이어지려던 생각의 고리를 뚝 잘랐다. 그리고 얕게 심호흡했다.
“그런 말은 이승우 본인이 하라고 하세요.”
“…….”
머릿속이 조금씩 차가워진다.
“이승우 에스퍼가 원한다면 나는 그렇게 해 줄 겁니다.”
사람들의 눈에 이승우가 약점 잡혀 빌빌대는 꼴로 보이는 건 중요치 않았다. 그들은 머지않아 고은교가 능력 있는 가이드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승우가 진심으로 고은교를 따른다는 것 또한 알게 되겠지.
이건 그냥 시간문제였다. 지금 당장 우시현에게 오해가 생겼다고 해서 그것을 정정하기 위해 쓸데없는 생각을 해 가며 자학에 가까운 심력 소모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우시현 에스퍼는.”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는 눈동자를 정확히 노려보며, 고은교가 단칼에 거절했다.
“내 에스퍼가 아닙니다. 절대로 안 돼요.”
우시현은 약간 벙찐 얼굴이었다. 이렇게 말하다가 또 처맞는 건 아닌가 싶었지만(어쨌거나 이승우가 그를 찾으러 올 시간 동안 주먹이 여러 대는 오갈 것 아닌가) 다행히도 그런 일은 없었다.
“나는 우시현 에스퍼에게 더 이상 관여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건 우시현 에스퍼도 나에게 그럴 권한을 잃었다는 이야기예요. 이렇게 사람을 휘두르는 방식으로 주제넘게 내 에스퍼 목록에 관여하지 마세요.”
그는 약간 용기를 얻고,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뭐?”
“그리고 실제로 폭력도 휘둘렀고.”
머리 회전이 빠른 우시현은 고은교의 말을 전부 알아들은 얼굴이었다. 사실 애매하게 들릴 여지가 있는 단어는 행여나 오해라도 할까 봐 쓰지 않았다.
너무 직접적으로 전달되어서 문제지.
삐딱한 얼굴로 우시현이 말했다.
“또 휘둘러 줘?”
“…….”
고은교가 이를 악물었다.
“……그래도 안 됩니다. 치려면 치세요.”
“하.”
우시현이 어이없는 듯 고은교를 바라보았다.
‘이만하면…… 됐겠지?’
솔직히 여기 계속 서 있으면 이 양아치 새끼가 주먹이든 발이든 또 휘두를 것 같았다. 그는 얼른 몸을 돌려 걸어 나가려 했다. 과열된 감정 때문에 걸음에 힘이 들어갔고, 그 순간 오른쪽 발목이 또 훅 꺾였다.
“아!”
처음부터 제대로 접질린 발목이었다. 금이 간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꺾였었다. 그리고 내내 절뚝거리면서 여기까지 온 참이었다. 발목의 상태가 악화되었다면 악화되었지 절대 좋아지지는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우시현 앞에서는 절대 아픈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저절로 터졌던 고통스러운 탄성을 입 안으로 꾸역꾸역 밀어 삼키며 고은교가 옆에 있는 나뭇가지를 콱 붙들었다. 그리고 우시현으로부터 꿋꿋이 멀어지기 위해 오른쪽 발을 질질 끌며 앞으로 걸어갔다.
그렇게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우시현은 어느새 그가 열심히 벌린 거리를 따라잡아 코앞까지 왔다.
“……뭡니까?”
“뭐겠냐? 기세 좋게 말해 놓고 다 죽어가는 새끼처럼 골골거리는데.”
“…….”
“따라와.”
“……이야기 끝나지 않았습니까?”
“하여간 말은 뒈지게 안 듣지.”
우시현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드디어 맞는 건가.’
그 순간, 뒷목이 들렸다. 땅을 단단히 딛고 있던 다리에서 힘이 빠졌다.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목뒤가 들릴 줄은 몰랐다. 자연히 옷이 목을 조르기에 힘겹게 손을 넥 라인 안으로 넣어 숨통을 확보해야 했다. 그걸 힐끗 본 우시현이 땅으로 몸을 내려놨기에 망정이지 안 그러면 그대로 숨통이 졸려 질질 끌려갈 뻔했다.
‘아니…… 지금도 끌려가고 있잖아!’
“큽…… 내려 주세요.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입 좀 다물어. 시끄럽다.”
설상가상으로 통증은 더욱 심해졌다. 두 발이 끝이 닿을 만큼 몸이 애매하게 뜬 탓에 두 발이 땅에 질질 쓸리기 시작한 것이다.
우시현이 자신을 어디로 데리고 가려는지 모르니 당연히 버둥거리게 됐다. 그 과정에서 발목이 더욱 아파왔다.
“치료하러 가는 거야, 이 새끼야.”
보다 못한 우시현이 욕설을 지껄이며 고은교를 한쪽 어깨에 들쳐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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