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이 미친 새끼가!’
저번처럼 머리채가 잡혀 끌려가는 건 아니라 거부감이 덜했지만, 황당하고 어이없는 건 여전했다. 제 뜻대로 안 되겠다 싶으면 손부터 나오는 스타일인 것 같았다.
팀원들 눈을 피해 고은교를 불러낼 정도니, 우시현은 생각보다 다른 사람의 이목에 집중하는 편인 것 같다. 필요하다면 몸에 상처를 내서라도 우시현을 멈춰야겠다는 생각도 잠깐, 고은교는 발버둥을 멈췄다.
멀지 않은 나무 뒤에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익숙한 인영을 발견해서였다.
이승우의 무표정한 얼굴이 나뭇가지 틈으로 보인다.
‘그럼 우시현도…….’
이승우가 따라왔다는 걸 알고 있었나.
“호수 가는 거라고.”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이상했다. 굳이 ‘치료’하려고 이러는 거라고 설명이라도 하듯 말하는 것도 그렇고, 지금도 어디를 가는지 명확하게 알려 주는데……. 이승우를 의식하지 않고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말인 것 같았다.
그나저나.
‘……호수?’
그들이 도착한 건, 그들이 이미 지나왔던 소금 호수였다. 처음 봤을 때만큼 빙판으로 꽁꽁 얼어 있던 거대한 호수는 아니지만, 이 호수 역시 크기가 만만찮았다. 조그만 호수 안에서 어마어마한 물량의 수중 몬스터가 기어 나왔었다…… 그 직후 우시현이 능력을 써서 몬스터들을 죄다 쓸어버렸지만.
우시현은 그를 호수 가장자리에 내려놓았다.
“신발 벗어.”
“…….”
이 호수에는 염분뿐이 아니라 몬스터를 회복시키는 성분까지 있었다. 애초에 몬스터들이 이 호수 안에 깊숙이 들어가 잠을 잔다. 우시현이 몬스터를 싸그리 소탕해 몬스터라고는 하나도 남지 않은 지금, 이 호수에 살고 있는 생물은 없었다.
몬스터뿐만이 아니라 인간 역시 호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건…… 미처 몰랐다. 사실 아직도 의심이 되기는 한다. 우시현은 이유 없이 그에게 도움을 건넬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사실 우시현보다는 그들의 뒤를 밟는 이승우에게 온통 신경이 쏠려 있었다. 자신의 눈에 띌 정도로 가까이 온 거라면 분명 아까 우시현이 그를 둘러업을 때 끼어들 생각으로 나타난 것 같은데, 이상하리만치 조용히 입을 다물고 거리를 유지한 채 그들을 따라오고 있다.
‘대체 무슨 생각이야, 이승우.’
설마 우시현과 하하호호 시간을 보내라는 의미는 아니겠지. 분명 나름대로 무슨 생각이 있어서 저러고 있는 것일 텐데, 그게 뭐가 됐든 자신은 그만 돌아가서 쉬고 싶었다. 내일 보스 몬스터 공략에 대비해 몸컨디션을 관리해야 했고, 이놈의 우시현과 더 이상 상종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뭐 하냐?”
“…….”
계속 가만히 있으면 그냥 이대로 호수 안으로 처넣을 것 같아서, 고은교는 천천히 손을 내려 신발을 벗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승우가 몰래 따라왔다는 것을 아는 이상 죽을 걱정은 없겠지 싶었다.
호수는 굉장히 밀도가 높았다. 갈기갈기 찢긴 몬스터들의 잔해나 소금을 가득 머금은 물, 피인지 체액인지 알 수 없는 것으로 묘하게 녹색 빛이 돌았다. 흘깃 보면 오염된 호수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여기에 부상 입은 발을 넣으면 오히려 상처가 덧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 상황을 피할 수 있는 썩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놀랍게도 맨발을 호수 안으로 넣는 그 순간부터 통증이 확 줄어들었다. 동시에 통증 부위로부터 박하처럼 은은하게 화한 느낌이 났다.
조금 심란했다.
‘병 주고 약 주고이긴 한데…… 이거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하나?’
하나도 안 고마운데.
그렇게 생각하며 우시현 쪽으로 시선을 든 순간, 그는 약간 놀랐다. 우시현 역시 발목을 걷고 호수 안으로 막 들어오고 있는 중이었다.
우시현도 다친 걸까? 아니면 호수 안에 잔류하는 몬스터라도 남았나? 그를 물끄러미 보고 있자, 우시현이 이쪽으로 다가온다.
팔이 아래로 쑥 들어오더니, 커다란 손이 접질린 발과 종아리를 붙잡았다. 고은교는 몹시 당황했다.
“뭐, 뭐 하는 겁니까? 부러뜨리면 안 돼요!”
당연하지만 고운 의도로 자신의 발을 잡은 건 아닐 것이다. 설마, 협박이라도 하려고 붙든 건가? 자신의 요구를 안 들어주면 이 다리를 확 부러뜨리겠다고?
우시현이 코웃음 쳤다.
“뭐라는 거야, 이 좆밥 새끼가.”
신경질적으로 내뱉더니…… 우시현이 고은교의 발목을 대충 주무르기 시작했다. 이 얼떨떨한 상황에 고은교는 당황을 넘어 황당해졌다.
누구도 우시현에게 고은교의 수발을 들라고 시키지 않았다. 하지만 아까 입술을 갖다 댄 것도 그렇고, 치료를 한답시고 호수까지 굳이 데리고 온 것도 그렇고.
‘진짜 호의라고?’
하지만 왜? 그는 이미 우시현을 자신의 목록에 넣어 주지 않겠다고 분명히 거절한 바 있었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우시현에게 하지 말라고 말할 타이밍을 놓쳤고, 그는 입을 약간 벌린 채 우시현이 힘을 주어 그의 발목을 지압하는 걸 바라보았다.
뜻밖에도 이 거친 손길에는 능숙함이 느껴졌다. 날티 나는 인상의 양아치가 하리라 기대한 적 없는 정성이었다.
“하지…… 하지 마세요. 이런 거.”
목소리는 생각보다 형편없이 흘러나왔다. 단호하지도 않았고 크지도 않았다는 이야기다.
“왜? 내 도움 같은 건 필요 없어서?”
“…….”
정답이었다. 호수까지 데리고 온 방식이 강압적이고, 태도도 무례해서 호수까지 온 것 자체는 괜찮았다. 하지만 이건…… 거친 태도로 상쇄될 수 있을 정도의 호의가 아니었다. 당연히 마음이 불편해진다.
고은교가 입술을 살짝 깨물고 말했다.
“그래요. 필요 없습니다. 내가 언제 우시현 에스퍼에게 이런 것 해 달라고 했습니까?”
“그럼 가든가.”
……억지를 쓸 줄 알았는데.
“…….”
무슨 목적이 있는 건 또 아닌 건가? 대가를 노리고 이런 짓을 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단순 변덕을 부릴 만한 성미……인 것 같기는 했지.’
일단 고은교는 우시현의 말대로 호수에서 나가려 했다. 하지만 차가운 호수 안으로 고은교의 발목을 쥐고 있는 손은 결코 고은교를 놓지 않았다.
“……뭐 하자는 겁니까.”
우시현을 빤히 보자 우시현 역시 자신을 쳐다본다. 눈썹 아래에서 강렬하게 빛나는 두 눈을 보자…… 솔직히 조금 쫄았다. 그는 최대한 침착하게 말을 꺼냈다.
“나가라면서요. 손 놓으세요.”
“손에 힘 안 줬는데?”
개소리한다!
“우시현 에스퍼…… 유치하게 굴지 마세요.”
고은교가 경고했다. 물론 우시현은 고은교의 경고를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오히려 반쯤 들어 올린 오른쪽 다리의 무릎을 꾹 눌러 다리를 펴게 만들더니, 아까 하던 짓을 계속해서 하기 시작했다.
고은교는 이쯤에서 이승우가 자신을 데리고 떠나 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상하게도 등 뒤에서는 아무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실제로 지금 이 상황이 이승우에게 어떻게 보이고 있는 건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이상하리만치 불안한 기분이 가슴속에 체기처럼 얹혔다. 혹시나 싶어 뒤를 돌아보았으나 그곳에는 이승우가 없었다.
마치 그 자리를 떠난 것처럼.
“아직도 아프냐?”
“……네?”
이승우가 어디 있는지 확인하느라 우시현의 말을 못 들었다. 멍청하게 되묻자, 우시현이 짜증스럽게 되물었다.
“아직도 아프냐고.”
“아…… 지금은, 지금은 괜찮……습니다.”
하마터면 우시현에게 이승우가 여기 있는 게 맞느냐고 물어볼 뻔했다. 어떤 이유든 간에 ‘자신만 목록에 남겨 두라’는 요청을 한 에스퍼에게 다른 에스퍼의 이야기를 꺼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은 거의 본능적인 것이었다.
잠자코 호수 아래를 내려다본 고은교는 더 이상 발에서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얀 발이 불투명한 물 아래에서 부드럽게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호수의 회복 성분에 더해 우시현의 마사지…… 같은 것이 효과를 발휘한 듯싶었다.
“봐. 내 말 들으니까 좋아지잖아. 왜 고집을 부려?”
“…….”
우시현은 약간 뿌듯해 보였다. 아무런 통증이 없는 오른쪽 발목 위로 몇 번이고 닿았던 손이 조심스럽게 발을 놓는다. 그러고는 아프지도 않은 왼발을 쥐고 또 주무르기 시작한다.
이건…… 이건 이상하다. 황망한 심경으로 고은교가 입술을 열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럴 겁니까?”
우시현은 어떤 것을 위해서 고은교에게 잘해 주는 것처럼 굴었다. 이 모든 게 우시현의 진심에서 우러나온 행동이라기보다는 고은교의 비위를 맞추어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려고 이렇게 약게 구는 거다.
속이 거북했다. 그만두라는 의미로 한 말이었는데, 고은교의 말에 우시현은 깔끔히 대답했다.
“십 분 정도 더?”
“…….”
손끝으로는 호수 기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진흙이 느껴졌다.
……하필 장소가 소금 호수일 게 뭐냐.
손끝에 비벼지는 진흙 알갱이들이 마치 크리스털 알갱이 같고, 공기에서 느껴지는 짠맛이 마치 제주도 게이트의 기억을 연상시켰다.
강제로 울렁거리는 기분이 불쾌하다. 우시현에게는 절대 이런 식의 도움을 받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면 가이딩해 주겠습니다.”
고은교가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왜?”
우시현이 고개도 들지 않고 물었고, 그에 고은교가 대꾸하려 하는 순간.
“그냥 가이딩 먹고 떨어지라고?”
우시현이 뒤이어 말했다.
‘잘 아네.’
잔뜩 찌푸렸던 고은교의 얼굴이 무표정해졌다. 그것을 용케 알아본 우시현이 피식 웃었다. 기다렸던 것처럼 조용해지는 고은교를 바라보며, 우시현이 서서히 손을 떼어 냈다.
“그래, 그러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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