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콜 가이드-74화 (74/132)

#74

기세 좋게 우시현의 호의를 ‘거래’로 치환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막상 가이딩을 하려고 보니 이전에 우시현과 가이딩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엉망이었지.’

그때는 가이딩하기가 너무 어려워 매칭률이 조작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흠.’

영혼이 바뀌어서 운명 또한 바뀌었다면, 이것이 매칭률에 영향을 줄 수도 있을까?

가능성을 더듬어 보던 그는 우시현이 ‘나라고 이 짓거리를 하고 싶었는 줄 아느냐, 이승우처럼 괴상하게 굴어야 하는 줄 알고 따라 했을 뿐……’이라고 변명하는 걸 듣고 가만히 입을 열었다.

“이승우 에스퍼가 내 이야기를 했나 보군요.”

알다시피 둘은 친구다.

순간적으로 그는 우시현과 이승우가 사전에 입을 맞춰 두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이승우가 자신을 배신했을 가능성을 접었다. 애초에 이승우는 자신이 우시현을 따라가지 못하도록 그를 붙잡으려 했다.

“왜?”

“…….”

“싫냐?”

하지만…… 썩 유쾌하진 않군.

“확실히 말해 두겠습니다. 승우에겐 내가 필요해요.”

“…….”

“나는 이승우 에스퍼를 강제로 내 목록에 넣은 적 없습니다. 이승우 에스퍼는 가이딩 때문에 내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페어 제의를 했고, 나 역시 게이트를 들어갈 때 도움을 받는다는 조건으로 이승우 에스퍼와 함께 팀을 이루기로 한 겁니다. 서로의 의사를 합치한 일이니 우시현 에스퍼가 불필요하게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간섭을 할 이유도 없습니다.”

솔직히 말해, 발목이 잡혀 끌려온 쪽은 자신이었다. ……이승우는 그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지만.

“그래.”

뜻밖에도 우시현은 조용히 대답했다. 속마음이 어쨌든 표면적으로는 알겠다는 사인을 보내온 것이다.

일단은…… 이 정도로 만족할까.

문득 그는 자신의 발을 만지던 손길이 멈췄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흙탕물처럼 불투명한 호수에 반쯤 잠겨서 느릿느릿 고개를 드는 우시현을 보자 심장이 덜컥 떨어지는 것 같다.

어스름에 젖은 얼굴은 묘하게 관능적이었고, 찌푸린 눈썹마저 사람을 홀리는 마력이 있었다. 그는 애써 우시현의 눈을 피해 그의 턱 어디쯤에 시선을 두었다.

사고가 천천히 굴러간다.

‘아, 가이딩.’

가이딩을 해 주겠다고 했으니 일단 가이딩부터…….

약간 멍한 기분으로 가이딩을 시작하자, 우시현이 약간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나 매칭률이 좋지 않은 탓에 이번에도 그들은 특유의 불쾌감을 느꼈다.

다시 말해 우시현이 웃은 건 가이딩 때문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재미있네.”

우시현이 중얼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우시현은 고은교의 발과 제 손을 통해 가이딩을 하는 중이었다. 가이딩을 해 주기로 한 게 떠올라 반사적으로 가이딩을 한 건데, 망할 놈의 얼굴 때문에 손을 달라는 요청을 잊어버렸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이건…… 꼭 계속 제 발을 주무르라는 종용 같지 않은가.

“실수입니다. 손 주세요.”

발을 잡아당기자 저항감 없이 발이 풀려난다.

고은교가 악수하듯 손을 내밀자, 우시현은 그것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그러기를 잠깐, 제멋대로 깍지를 끼며 손가락을 얽어 온다.

물살 헤치는 소리가 났다. 우시현이 자리에서 일어난 탓이었다. 동시에 손목이 살짝 뒤로 꺾이며 밀린다.

아프지는 않지만 대단한 박력이 느껴졌다. 어떤 인간관계든 주도권을 가져가려는 사람 특유의 강인함이 우시현의 기세에 넘실거리고 있었다. 아름다운 얼굴에 강렬한 매력까지 더해지자 순간적으로 고은교의 집중력이 조금 흐트러졌고, 그건 오히려 우시현에게 이점으로 작용했다.

그걸 이점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해일이 오는 것 같다. 자연재해 같은 거대한 파도를 앞에 두면 한낱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전의를 상실하게 된다. 아차 싶은 순간 체내의 가이딩 기운이 뭉텅뭉텅 빨려 나가기 시작했다.

다만, 우시현은 매칭률이 좋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 효율적이지 않은 가이딩이 그에게 얼마나 도움을 줬을지는 미지수였다.

순식간에 가이딩 기운이 바닥난다. 리듬 게임을 할 새도 없이 쪽쪽 빨려 나가는 기운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욕심껏 가이딩을 빨아들인 것으로 모자라, 우시현은 가이딩이 성에 차지 않는 눈치였다. 고은교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으니까.

게이트에 들어오기 전부터 우시현의 몸 상태는 썩 좋지 않았다. 팀에 셋 있는 가이드 중 하나가 거의 전속이나 다름없이 가이딩을 해 주는 걸 봤지만, 우시현은 척 보기에도 능력을 남용해 댔다. 게다가 그는 이승우처럼 매칭률이 좋은 가이드를 만나지 못한 상태였다.

만성 가이딩 부족은 이승우만이 아니었다는 의미다.

“부족해.”

우시현이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손가락 사이사이를 누르고 있는 손가락들에 힘이 들어간다. 동시에 다른 쪽 손이 옆구리를 비집고 들어와 옷깃 안쪽 살갗을 누르듯 만진다.

“잠깐.”

우시현이 왜 이러는지 안다. 조금이라도 더 접촉 면적을 넓혀 가이딩을 받아 가려는 에스퍼의 본능적인 몸짓이다. 하지만 이런다고 매칭률이 갑자기 좋아질 리는 없으므로, 고은교는 허리를 붙잡은 우시현의 손을 저지하기 위해 그의 손을 잡아떼어 내려고 했다.

어차피 가이딩이 안 되는 건 매한가지니 만지지 말라고 경고하기 위해 고개를 들어 올린 순간, 가까이 다가온 우시현의 눈과 정면으로 마주친다.

“잠깐만…….”

당황한 나머지 ‘잠깐’이라는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놀랍게도 아까 자신이 우시현의 외모에 매혹당했듯이, 우시현 역시 그에게 매혹당한 것처럼 보였다.

무섭도록 고은교의 말에 집중하는 시선이 얼굴 위로 느껴지는 것 같다. 정확히는, 살짝 벌어진 입술, 그리고 그 안쪽에 있는 점막과 움직이는 조그만 혀에 시선이 파고드는 느낌.

단단히 허리를 쥐었던 손이 거짓말처럼 풀린다. 위로 올라온 손가락이 아랫입술을 지그시 누르며 아랫니와 혀를 스쳤다. 마치 자신의 자리가 이곳이 맞는지 확인이라도 하겠다는 듯.

고은교의 눈썹이 확 찌푸려진다.

“그만두세요.”

데자뷔나 다름없는 ‘짜다’는 감각에 웃음도 나지 않았다. 우시현의 손을 쳐내면서 고은교가 고개를 돌려 입 안에 고인 침을 뱉었다. 우시현은 자신의 무의식이 한 짓이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 그가 자신에게서 풀려난 고은교를 멍한 기색으로 바라본다.

아니, 어쩌면…… 지금 뭘 하고 싶은지 정확히 알고 있어서 그런 표정인 걸지도 모르지.

지금이 기회였다.

“……야.”

한참 말이 없던 우시현이 허둥대는 기색을 숨기며 신발을 찾아 신는 고은교를 불렀다.

어딘지 거칠고, 낮은 목소리다. 고은교는 얼굴도 들지 않은 채 신발을 신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게 다야?”

당연히 다지, 이 양심 없는 자식아.

“…….”

가이딩 기운이 바닥나기 직전이다. 이 정도 빨아 먹었으면 됐지, 뭐를 더 하자고. 물론 고은교는 우시현이 뭘 하고 싶은지 즉시 알아차렸지만 애써 무시했다.

머릿속에서 경종이 울렸다. 이 자리에서 빨리 도망가야 한다는 알람이다. 도망가지 않으면 잡아먹힌다. 당연한 순서처럼 입술이 붙고 옷이 벗겨지고 말 거라는 공포에 가까운 직감이 뇌리를 잠식한 지 오래였다. 등줄기에 소름이 쭈욱 돋는다.

금방이라도 뒤쪽에서 손이 뻗어 나올 것 같다.

“뭐 하냐?”

“가이딩은 해 줬으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통증이 사라졌다지만 여전히 걷는 건 불편했다. 고은교는 우시현이 내는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인 것 같다는 생각을 잠깐 했지만, 그것과 자신은 상관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숙소 쪽으로 절뚝이며 걷는 고은교의 뒤를 우시현이 어슬렁어슬렁 쫓아온다.

“천천히 가지?”

꼭 놀리듯이 하는 말 같다. 불편한 발목 때문에 속력이 나지 않는 걸 알면서도, 최대한 빠르게 우시현을 떠나고 싶은 걸 알고 있다는 태도다.

‘이승우는 어디 있는 거야?’

우시현은 일부러 고은교를 놓아주고 있는 것처럼 굴었다. 그는 우시현의 말에 반응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숙소까지 걸었고, 약 20분 만에 숙소에 도착했다. 간이 컨테이너에 도착하자마자 고은교는 문을 쾅 닫았다.

집념과 의지력의 승리였다. 물론, 그 덕에 겨우 잦아든 통증이 재발했다.

‘망할.’

마침내 배정받은 임시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갔을 때, 고은교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

이승우가 없다.

*

다행히 우시현은 숙소에 도착해서까지 고은교의 뒤를 따라오지는 않았다. 비치되어 있는 물병으로 대충 소금기를 씻어낸 고은교는 간이침대에 앉아 이승우를 기다렸지만, 이승우는 끝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내일 일정 때문에 억지로 잠에 들어야 했으나…… 잠을 설쳤다.

‘저희도 잘…….’

숙소를 같이 쓰는 가이드들에게 이승우의 행방을 물었지만, 저마다 모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

“괜찮으시겠어요? 터닝 포인트에서 쉬고 계시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그 덕인지 고은교를 자빠트렸던(단어 그대로의 의미다) 가이드가 이승우 대신 옆자리를 차지했다. 자신을 구해줬기 때문인지 어제도 친해지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이승우가 자취를 감추자 좋다고 달라붙었다.

‘제대로 감사 인사를 하고 싶었어요.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손히 감사 인사를 한 그는 ‘에스퍼도 아닌데 솔직히 진짜 멋졌다’ 같은 소리를 하며 반짝반짝 눈을 빛냈다.

그의 이름은 김민성. 나이는 스물네 살이고, 드물게도 가족이 게이트에 휘말린 피해자라 군대가 면제되었다고 했다. 그 덕에 스트레이트로 대학을 졸업했고, 비교적 일찍 현장에서 일하게 됐다고.

그렇게 알고 싶지 않은 사적인 정보까지 주절거리며 한참을 치대던 그는…….

“말 편하게 해 주시면 안 될까요? 저도 형님이라고 부르면…….”

“…….”

“안 되는구나. 네.”

시무룩해졌다.

“딱히.”

“네……. 네?”

김민성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 모습을 보자 어딘지 연상되는 사람이 있어서, 고은교는 잠시 말을 멈췄다.

‘팀장도 아닌데, 안 될 건 없지.’

태도가 약간 너그러워진다.

“마음대로 하세요.”

“네!”

싱글벙글 웃으며 뒤따라오는 얼굴을 보니 이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여전히 이승우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거슬리기는 했지만.

이승우는 보스 몬스터를 공략하기 위해 팀이 모두 모였을 때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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