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아침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시간대였다. 먼동이 터 오는 것처럼 하늘 한쪽이 희끄무레한 빛으로 서서히 밝아졌다. 그래서 고은교는 이승우의 꾹 다물린 입술과 자신을 보는 낯선 눈빛을 볼 수 있었다.
이상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고은교가 다리를 다친 후부터 그를 한시도 품에서 내려놓지 않았던 이 에스퍼는 더 이상 그러지 않았다. 그밖에도 굳은 표정이나 현저히 줄어든 말수 같은 비언어적인 태도 같은 것들이 단서가 되어 주었다.
어제 그는 자신을 뒤따라오는 이승우를 봤다. 그 과정에서 무엇인가 오해를 한 것 같았고, 그는 자신이 무슨 말실수를 했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그럴 만한 게 있었나?’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아니었다. 그는 우시현의 헛소리에 완벽하게 대처했다. 특히 그 호수에서, 이승우와 자신은 정당한 이해관계로 서로를 선택했으니 우시현에게 끼어들지 말라고 명확하게 말하지 않았던가?
차라리 이승우가 무언가 물어본다면 대답할 수 있었겠지만, 그런 것도 없는 이상 자신이 나서서 이 상황을 풀기가 어려웠다.
대체 어디에서 이승우가 기분이 상했는지 모르겠다. 아니, 기분이 상한 건 맞나? 어쩌면 그냥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가라앉아 있는 것일 가능성은.
‘……없나.’
팀장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고은교는 이승우를 힐긋거렸다. 이승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우시현의 지시를 듣고 있었다.
그래, 고은교의 생각대로였다.
이승우는 거기에 있었다. 고은교가 우시현의 얼굴을 주먹으로 친 바로 그 시점에.
처음부터 이승우는 아주 조심스럽게 고은교와 우시현의 뒤를 따라갔다. 고은교는 예의 ‘스토커 짓’을 하는 걸 싫어했으니 특별한 상황이 오기 전까지는 이승우가 개입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터였다.
물론 이승우는 공기의 기류를 이용하여 고은교와 우시현이 주고받는 대화를 감시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들의 대화는 한순간 끊어졌고, 이승우가 그들을 육안으로 살필 수 있을 만한 거리에 도달했을 때 고은교는 우시현의 얼굴에 주먹질을 하며 화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직후 우시현이 한 말에 얼어붙었다. ‘우시현이 고은교의 운명’이라는 말에.
이승우는 고은교보다 충격을 받았다. 애초에 그는 어째서 고은교가 자신의 안전을 포기하고 우시현을 따라나섰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들은 굳이 우시현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눈 적 없었지만, 이승우는 고은교가 우시현에게 가진 불쾌함에 대하여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게다가 우시현이 고은교에게 휘두른 폭력의 정황을 포착한 어젯밤엔 그 기색이 더 심했다. 고은교는 대단한 자존심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이 다른 누구도 아닌 우시현에게 맞았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게 굉장히 불쾌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고은교는 이승우에게 공격 명령을 내리는 대신 가해자를 따라가는 것을 택했고, 우시현이 꺼낸 말, 정확히는 ‘과거의 고은교가 우시현에게 했던’ 말을 부정하지 않음으로써 결과적으로 우시현의 말을 용인했다.
그건 과거, 이승우가 고은교에게 매달린 방식이기도 했다.
이승우는 지금 드는 기분이 비참함인지 아니면 간절함인지 아리송하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고은교는 우시현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우시현이 자신의 운명이 아니었으면 해서 그 사실을 무시해 왔다가, 우시현이 그것을 꼬집는 순간 말문이 막힌 걸지도 몰랐다.
그것만은 아니기를 바란다.
이승우는 감히 물어볼 수 없었다. 그를 얼어붙게 만드는 것은 두려움이었다.
그러나 고은교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았다.
*
드라이밸리 게이트의 보스 몬스터는 거대한 순록이었다. 고은교는 습관적으로 이승우의 눈치를 힐긋 살폈지만, 이제 이승우는 고은교를 보고 있지도 않았다.
‘단단히 화가 났군.’
이승우의 뒤통수를 보며 그는 생각했다. 처음에는 별생각을 다 했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무슨 일인지 말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은 모른다.
고은교는 그냥 마음을 편하게 먹고 이승우가 뭔가 말하기를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진짜 사슴이 온순하다는 건 편견이라니까요…….”
이승우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며 다시 옆에 착 달라붙은 녀석이 말했다. 이승우가 보이자마자 슬그머니 멀어졌던 김민성이 돌아왔다. 이승우가 보스 몬스터를 잡기 위해 고은교의 옆을 떠났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사실 그게 옳기는 했다. 모든 에스퍼들은 전력으로 보스 몬스터를 제압해야 하니까.
눈보라가 불었다.
“윽……!”
보스 몬스터의 시야를 벗어나는 곳, 하지만 에스퍼들의 기감이 닿는 보스 몬스터 방의 입구에서 가이드들은 보호를 받았다. 거센 눈보라는 광범위하게 닥쳤고 영하까지 떨어진 기온을 더더욱 떨어트렸다.
금세 속눈썹 사이로 서리가 낀다. 그러나 급속도로 냉각되던 공기는 순식간에 본래의 궤도로 돌아왔다.
눈보라도 멎은 것으로 보아, 바람 에스퍼가 널뛰는 기후를 강제로 정상화한 게 틀림없었다. 추위에 오들오들 떨던 가이드들이 저도 모르게 긴 숨을 내쉰다.
그것을 신호로 에스퍼와 거대한 순록이 격돌했다.
첫 페이즈.
‘드라이밸리 게이트는 공략 방법이 정해져 있는 게이트니까…….’
각자가 자기 역할에만 충실하다면 사상자 없이 충분히 깰 수 있었다.
순록이 입을 벌린다.
이 보스 몬스터는 청각이 둔하지만 뜻밖에도 음파 공격을 할 줄 알았다. 드라이밸리 게이트가 세상에 처음 등장했을 때 순록의 첫 공격은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낳았다. 이 공격의 특징은 사람의 고막을 찢고 뇌를 진탕 시켜 에스퍼들을 전투 불능으로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입을 벌리지 않으면 소리를 낼 수 없다는 점, 공격을 하기 전 준비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 때문에 처음에만 주의하면 되는 공격이기도 했다.
미리 이승우가 대비했는지 순록은 주둥이만 뻐끔거릴 뿐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자 열이 받았는지 순록이 앞다리를 크게 구른다. 물론, 딱딱하게 얼어붙은 땅을 파헤치는 소리 역시 들리지 않았다. 이승우가 보스 몬스터의 주변으로 공기의 흐름을 차단해 놓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식으로 사용하는 능력은…… 섬세한 조절이 필요해.’
순록의 움직임을 따라 공기의 흐름을 계속해서 바꿔 주어야 했다. 까딱 잘못해서 순록의 공격을 허용하는 순간 이 자리에 있는 에스퍼들은 죄다 제 머리를 잡고 뒹굴 테니까.
고은교는 이승우가 사용하는 능력의 정도를 체크하며 전투를 주시했다. 에스퍼들은 최대한 뭉쳐서 순록의 돌진을 막고, 다리를 하나씩 공략했다. 그들이 노리는 건 순록의 발굽과 다리의 틈이었다.
순록의 발굽은 일반적인 금속보다 훨씬 강도가 높다. 따라서 발굽을 자르거나 부수는 일은 불가능했고, 그 위는 두꺼운 털가죽으로 덮여 있어서 대부분의 공격을 흡수하거나 튕겨냈다.
가죽과 발굽이 이어지는 선, 순록의 눈, 그리고 뿔이 약점이었다. 당연하지만 가장 공략이 쉬운 곳은 가죽과 발굽의 이음새였다. 일반 사람과 눈높이가 맞기도 하고, 공격이 제대로 들어가 순록의 발목을 부러뜨리거나 잘라낼 경우 순록의 움직임이 급격하게 둔화되기 때문이었다.
비행이 가능한 에스퍼들은 순록의 뿔 주위를 돌아다니며 순록의 시야를 교란하고, 나머지 에스퍼들은 차근차근 순록의 약점을 공략해 나갔다.
그때, 순록의 발목 뒤쪽을 예리하게 노린 얼음 톱날이 깡, 하는 소리와 함께 튕겨져 나갔다. 위협을 느낀 순록이 반사적으로 뒷발을 차올린 것이다.
강력한 뒷발질에 산산이 깨어진 얼음 잔해들은 아주 위험한 칼날이 되어 사방으로 튀었다. 하지만 우시현이 순식간에 능력을 회수함에 따라 얼음 조각들은 파괴력을 잃고 물이 되어 흩어졌다.
순록이 뒤를 신경 쓰는 사이, 이승우가 앞을 쳤다.
쿵, 하는 심상치 않은 소리와 함께 순록이 한쪽 무릎을 꿇는다.
‘……됐다.’
반쯤 너덜너덜해진 왼쪽 다리를 내려다보며 순록이 포효를 지른다. 물론, 이승우가 단단히 틀어막고 있어 소리는 전혀 나지 않았다.
“역시 원소 계열 에스퍼가 둘이나 있으면…… 공략이 빠르네요.”
김민성의 말대로였다. 파괴력이 대단한 최상급 에스퍼가 앞과 뒤에서 동시에 치자 보스 몬스터는 맥을 추리지 못했다.
위기감을 느꼈는지 순록은 바로 두 번째 페이즈에 돌입했다.
“와, 벌써?”
춥고 건조했던 기온이 갑자기 봄이라도 된 듯 따뜻해진다. 얼어붙은 사막이 순식간에 녹으며 군데군데 웅덩이를 만들고, 땅이 촉촉해졌다. 그리고 녹색 풀들이 무섭게 영역을 넓히기 시작했다.
급변하는 환경에 에스퍼들 절반이 재빨리 뒤로 빠졌다. 그리고 들고 온 냉각기로 순록이 불러오는 봄을 막으며 바리게이트를 세운다.
생물을 향해 흐느적거리며 뻗어오던 풀들이 냉각기 때문에 힘을 잃고 얼어붙었다. 일단 붙잡히기 전까지는 별로 강력하지 않은 식물형 몬스터였다.
신경을 써야 할 것은 이쪽이다.
봄을 맞이해 순록의 몸집이 두 배쯤 커진다. 털갈이를 하며 순록이 몸을 푸르르 흔든다. 갈색 털이 사방으로 비산하고, 보스 몬스터가 크게 앞다리 두 개를 쳐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음파 공격을 계속해서 저지하는 이승우에게 집중적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순록의 거대한 몸집이 희끗희끗하게 보일 정도로 대단한 빠르기였다. 그런 순록을 따라잡으며 공기의 흐름을 차단하는 건 무리였는지, 이승우가 순록을 둘러싸고 있던 공기의 막을 걷어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순록이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이승우는 즉시 가이드들의 방향으로 거대한 보호막을 형성해 음파가 통하지 않도록 했다. 반대편에서는 우시현 주변으로 남은 에스퍼들이 모여 물의 보호막 안에 밀집해 있는 게 보였다.
순록의 어그로가 눈앞의 이승우에게 쏠린다. 이승우가 보호막을 강화하는 데 치중하자, 정면에서 눈보라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걸 가만히 보던 고은교가 말했다.
“움직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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