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콜 가이드-76화 (76/132)

#76

“네, 네?”

순록과 이승우의 대치를 멍하니 바라보던 김민성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고은교는 무표정한 얼굴로 지시했다.

“움직이자고요. 이승우 에스퍼가 우리 때문에 발이 묶였으니까.”

“안 됩니다. 아직 음파 공격이……. 어?”

냉각기를 든 에스퍼 중 하나가 고은교의 말에 반발하고 나섰다가, 순록의 음파 공격이 멎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멍청한 소리를 냈다.

고은교가 뒤이어 설명했다.

“어그로는 이승우 에스퍼에게 끌려 있습니다. 보스 몹은 한 번에 하나의 공격만 하는 경향을 띠니 안전거리를 유지하며 뒤를 돌아가면 이승우 에스퍼가 다시 보스 몹을 공격할 수 있을 겁니다.”

본래 자신의 팀이었다면 ‘움직이자’고 하자마자 팀원이 움직여 시간 낭비를 최소화했을 것이다. 그 점이 조금 아쉬웠지만, 어쨌거나 팀원들은 고은교의 지시를 따라 주었다.

쿵!

심상치 않은 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이승우를 향했다. 정확히는 이승우의 맞은편을.

순록이 눈보라를 헤치며 뛰어 들어와 보호막을 박살 내기 위해 머리를 들이받았다.

뿔은 순록의 약점 중 하나였지만, 매우 단단하고 날카로워 결정적인 순간 보스 몬스터의 무기가 되어 주기도 했다.

쿵!

섬뜩한 굉음을 뒤로 하고 그들은 거의 달리듯 이동했다.

이승우는 거대한 바람벽을 세워 사방으로 짓쳐들어오는 순록의 공격을 막고 있었다. 순록의 뿔이 바람벽을 들이받을 때마다 북을 찢는 소리가 났다.

바람은 보호를 위한 능력이 아니다. 따라서 이승우가 보호에만 치중하는 것은 낭비였다.

그는 그렇게 판단했다.

그들이 순록의 사정거리 밖으로 벗어나는 순간, 이승우가 보호를 거두어들였다. 사람과 순록이 한순간 격렬히 부딪쳤다.

뒤로 물러난 쪽은 순록이었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는 말이 정확히 들어맞았다. 후방에서도 우시현이 맹렬한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2 페이즈가 끝을 보인다.

현재 그들의 위치는 순록의 어그로를 끌지 않는 후방이었다. 다시 말해 이승우보다 우시현과 더 가까운 거리였다.

하지만…….

‘어그로가 튈 수도 있겠는데.’

우시현은 지속적으로 순록의 남은 다리를 노리고 있었다. 보스 몬스터와의 전투는 한 번에 끝나기보다는 대부분 지구력 싸움이었다. 이번에는 원소 계열 에스퍼가 둘이나 있었기에 속도가 빨랐던 거지, 보통은 끈질기게 기회를 노리며 타격을 누적시켜 보스 몬스터를 공략한다.

비정상적으로 공략이 빨라지면 그만큼 변수가 생기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우시현의 공격은 계속해서 유효타였다. 그렇다면 순록이 이쪽을 제 1의 위험 요소로 판단할 가능성 역시 있었다.

“우시현 에스퍼와 합류합시다.”

“보스 몬스터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건 위험하지 않나요?”

가이드 중 하나가 겁먹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행여라도 순록이 이쪽을 알아차릴까 봐 두렵다는 태도였다.

‘순록은 이미 우리의 위치를 알 텐데.’

순록은 굉장히 시력이 좋았다. 시력뿐만이 아니라 기감으로 제 영역에 들어온 인간들의 소재를 파악하고 있을 터였다.

이쪽에 어그로가 끌리지 않는 이유는 비교적 순록의 사고방식이 단순해서 코앞의 적에게만 집중하는 데다, 가이드들이 순록에게 직접적으로 위해를 끼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가장 큰 위험 요소를 제거하고 나면 쉽게 제거할 수 있는 연약한 적들이라 판단했을 테니까.

하지만 2 페이즈의 끝물이기 때문에 순록은 전방위의 공격을 감행할 것이고, 아예 측면으로 빠져 있어도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높았다. 가이드를 보호하는 에스퍼들이 있었지만 이승우나 우시현처럼 완벽하게 그들을 보호할 수 있지는 않을 터였다. 예를 들어 저 강력한 눈보라나, 음파 공격 같은 것 말이다.

어느 쪽이든 어그로가 끌릴 위험이 있다면, 차라리 두 명의 에스퍼가 잡은 포지션 중에 하나를 택해 그 뒤에 숨는 게 효율적이었다.

“절벽이 무너져서 고립되면 더 위험해질 겁니다.”

그 말에 가이드들이 고개를 들어 드라이밸리 계곡의 까마득한 절벽을 바라보았다. 순록이 불러온 봄 때문에 드라이밸리 계곡은 더 이상 깎아지른 황무지가 아니었다. 그 위로 푸른 잔디가 이끼처럼 다닥다닥 달라붙어 있었다.

두 명의 에스퍼는 너무 강력했고, 순식간에 2 페이즈를 불러왔다. 2 페이즈가 유지된 지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이야기였다.

저 풀은 진짜 풀보다는 몬스터에 가까웠다. 생존을 위해 지나치게 특화된 이 식물 계열 몬스터는 뿌리가 지나치게 가늘고 길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계곡의 돌 틈을 완전히 파고들어 절벽에 균열을 만들어낼 것이다.

벌써부터 후두두 소리를 내며 조그만 돌덩이들이 굴러떨어지고 있었다. 전투 때문에 그 심상치 않은 소리가 묻히고 있어 들리지 않아 잘 몰랐겠지만.

이곳은 현장이다. 에스퍼들이 싸울 때 가이드들은 구경만 하고 있을 게 아니라 자신 역시 살길을 찾아야 했다. 특히, 자신들이 핸들링할 수 없는 규격 외 에스퍼가 둘이나 있을 때는 언제나 사방을 잘 살펴야 했다.

‘돌무더기에 묻히는 경험은 한 번이면 충분하다고.’

“정신 똑바로 차리세요.”

“네, 넵.”

고은교의 말에 가이드들이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개중 가장 불안한 표정이던 가이드 또한 아차 싶었는지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는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가이드들이 표면적으로나마 완벽하게 무표정해지자, 그들을 지키고 있던 에스퍼들의 분위기가 은근히 달라졌다. 밖에서 오는 위험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좋아.’

그가 가볍게 손짓하며 사람들을 이끌었다. 만족할 만큼 빠릿빠릿한 움직임은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봐줄 만한 수준이었다.

그때, 우시현이 순록의 뒷다리를 마저 작살내는 게 보였다. 순록은 마지막 힘을 짜내어 이승우로부터 머리를 돌려 우시현에게 겅중 뛰어들었다.

이게 문제다. 최상급 에스퍼들, 특히 오 년 이상 굴러먹지 않은 에스퍼들은 힘 조절을 거의 할 줄 모른다.

‘게이트는 혼자서 클리어하는 것이 아닌데.’

그가 혀를 차며 사람들을 밀집시켰다.

눈보라가 쏟아진다. 죽기 직전의 보스 몬스터는 전방위로 공격을 뿜어댔고, 그들은 코앞에 닥치는 순록의 공격에 당황했다. 에스퍼들 몇이 능력을 썼지만 보스 몬스터가 발악하는 것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순록의 공격을 마주 보았다. 그래서 시의적절하게 우시현이 물의 장막을 그들에게 덮어씌우는 걸 볼 수 있었다.

이승우가 도착한 것은 그와 거의 동시였다. 다급하게 날아온 그가 이미 보호받고 있는 사람들을 확인한다. 그리고 짧게 마주치는 눈길.

허공중에 멈춰 선 채 이승우는 우시현이 불러낸 물의 벽을 멍하니 응시하다 몸을 돌렸다. 여전히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분명 그건 무표정에 가까웠다. 후회인지 모를 감정이 엿보였지만, 그마저도 금세 사라졌다. 자신의 가이드가 안전한 것을 확인했기 때문일 것이다.

게이트는 혼자 클리어하는 것이 아닌데, 이승우는 지나치게 모든 것을 혼자 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가이드가 공격당한다 한들 본래의 위치를 이탈할 필요가 없었다는 소리다. 이 상황에 대한 이야기는 게이트가 끝난 뒤 해도 늦지 않을 터였다. 그는 이승우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2월 9일, 오후 5시 32분.

드라이밸리 게이트 종료.

“수고하셨습니다!”

“팀장님! 가이딩!”

“이승우 에스퍼님, 보스 몹보다 더 빠르시던데요? 저희 이따 회식 있는데 에스퍼님도 한잔하실 거죠?”

게이트가 와글와글 떠드는 사람들을 울컥 쏟아냈다. 대기하고 있던 일반 가이드들과 서포트 팀이 다가온다. 치료받을 사람과 가이딩이 급한 사람, 제 에스퍼를 목청 높여 부르는 소리가 여기저기 들린다.

게이트 앞은 삽시간에 시장 바닥처럼 혼잡해졌다.

“형님, 형님도 회식 안 가실래요? 게이트 끝나고 맥주 한잔 딱 때리는 게, 캬아……. 진짜 별미인데.”

“괜찮습니다.”

김민성의 제안을 거절하며 그가 이승우에게 다가갔다. 무표정한 얼굴로 눈을 내리 깐 채 휴대 전화를 만지던 이승우가 고은교를 힐끔 본다.

“잠깐 센터에서 가이딩합시다.”

이승우의 하얀 얼굴에는 누덕누덕한 피로함이 묻어 있었다. 그가 뒷주머니에서 안경을 꺼내 썼다. 고은교는 그게 이승우가 눈 시림 방지를 위해 종종 쓰곤 했던 안경이라는 걸 알아보았다.

“……네.”

느릿느릿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마지못해서 한다는 목소리였다. 싫은 건지 아닌 건지 똑바로 정하지 않는 애매모호한 태도에 고은교가 눈썹을 찌푸렸다.

어차피 이승우가 싫다고 해도 해야 한다고 말하려 했다. 너무 피곤하니 나중에 하자는 말은 그냥 조삼모사나 다름없다. 게이트가 끝난 직후 가이딩을 하는 게 시간 낭비도 없고 효율적이었다.

‘대화도 좀 해야 하고.’

물론 이 이상한 기류를 해결하겠다는 생각이 가장 강했다. 가이딩실에서 단둘이 이야기를 좀 하다 보면 이 녀석이 왜 이렇게 꽁해 있는지 답이 나오겠지.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고은교는 이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게이트는 끝났고, 이 관계 또한 정상적으로 돌아갈 것이라 여겼으므로.

“고생했습니다.”

“네.”

“가이딩이 끝나면 바로 집에 갈 겁니까?”

“네.”

흠. 별로 협조적이진 않군.

그는 이승우를 곁눈질로 보며 함께 가이딩실 안으로 들어갔다. 오랫동안 긴장해 있었던 탓인지 어깨가 뻐근했다. 두 사람은 탁자를 두고 맞은편에 앉았다. 그가 한쪽 팔로 머리를 당기며 목뒤 근육을 늘렸다.

“회식이 있다던데요.”

“네.”

사실 이승우의 태도는 협조적이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다. 어찌나 대화가 차갑게 끊어졌던지, 무례하다고 느껴지는 수준이었다.

“…….”

“…….”

대체로 이승우는 어른스러웠지만 이런 갈등 상황에 돌입하자 나이 어린 티가 났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이승우를 빤히 응시했다.

“좋습니다. 손 주세요.”

가이딩을 받고 나면 ‘네’ 말고 할 말이 떠오르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손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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