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콜 가이드-79화 (79/132)

#79

2월 24일, 오후 12시 00분.

쓰레기장 게이트.

“우시현 에스퍼, 이게 무슨 행동인지 똑바로 설명하세요.”

두 번이나 막무가내로 팔이 잡혀 끌려갔다. 저번 게이트에서도 우시현은 고은교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댔다. 비단 게이트뿐만이 아니라 이전의 행적을 생각해 보면 항상 그래왔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생각에 앞서 손이 나가는 태도는 관성이나 다름없는 못된 습관처럼 보였다.

이번에도 순순히 넘어가면 우시현은 평생 이 버릇을 고치지 않을 터였다. 단호하게 잡힌 손을 뿌리치자 우시현이 슬쩍 눈을 굴려 고은교를 본다.

“왜?”

“함부로 사람을 끌고 다니지 않았습니까?”

“그게 뭐.”

우시현은 뻔뻔하게 대응했다.

“아무리 나라도 운명이면 손 정도는 잡아.”

“이게 손은 아닌……. 아니, 그게 아니라.”

그 말을 듣자마자 우시현의 못된 버릇을 뜯어고치려던 생각이 싹 사라졌다. 그 대신 언제까지고 우시현이 ‘운명’ 어쩌고저쩌고하게 둘 수는 없다는 생각이 그 자리를 메웠다.

안색이 변한 고은교가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그 운명 말인데,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뭐?”

“그러니까 내가…… 우시현 에스퍼에게 했던 말 있잖습니까.”

“…….”

우시현이 황당한 얼굴로 이쪽을 돌아보았다.

“우리는 운명이 아닌 것…… 같은데요.”

일단은 자신이 고은교가 아니다, 죽었다가 깨어났는데 다른 몸이었다……라는 말 대신 이렇게 무마해 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우시현이 자신의 말을 믿어 줄지 미지수였으니까.

운명이 이토록 쉽게 바뀌는 거라면 ‘운명’이라는 거창한 단어가 붙지는 않았겠지만……. 어쨌거나 우시현은 그걸 느끼지도 못한다는데 이제 와서 바뀌었다고 해도 그게 진짜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겠는가.

다만 우시현의 입장에서는 이 결론이 몹시 황당할 만도 했다. 말 한마디로 그동안 시달려 온 게 순식간에 사라진 셈이었으니.

“그러니까 니 말뜻은, 그게 다 구라였다고?”

“……팀장으로서 팀원을 제대로 호칭하도록 하세요.”

“그래, 그러니까 그때 교수님 말씀이 다 개뻥이었다, 이 말이냐고 묻잖아.”

“…….”

왜 굳이 가이드가 아니라 교수님이라고 부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빈정거리는 게 목적이었다면 제대로 달성했다. 하지만 그렇다기엔 우시현의 말은 지나치게 빨랐다. 마치 사실 확인을 해 두고 싶다는 것처럼.

그래서 그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하……. 그래, 어쩐지.”

그런데 우시현의 반응이 이상하다.

이렇게 간단히 납득한다고?

“상식적으로 운명이니 뭐니 하는 게 있을 리가 없잖아. 운명 이전에, 니가 얼굴 좋아하는 티를 작작 냈어야지. 그리고 그건 쌍방이라고 들었는데……. 처음부터 구라가 아니면 뭐겠어.”

“…….”

그는 강렬한 쪽팔림을 느꼈다.

왜 자신이 하지도 않은 거짓말이 발각되어야 하는 건가.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번 일로 고은교의 대형 거짓말을 수습하고 넘어갈 수 있어서 다행이기도 했다.

“계속 거짓말을 하려는 것 같길래…… 아직 마음이 있는 줄 알았는데.”

우시현이 중얼거리듯 덧붙였다.

‘아, 그래서…….’

드라이밸리 게이트에서 굳이 운명이라는 말로 자신을 떠봤던 거였다. 말문이 막혀서 뭐라고 해야 할지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고 오해를 쌓았을 우시현의 모습이 그려지는 듯했다.

……이승우도 마찬가지였다.

이승우가 보기에 그건 정말이지 고은교의 변덕 같았을 것이다. 이승우와 우시현이 얼마나 고은교에 대한 것을 공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이승우가 고은교의 거짓말을 알고 있었다면 그때 고은교의 태도에 상처받은 것도 이해되었다.

우시현이 떠본 말에 아니라고 하지 않고, 여지를 주고…… 모든 게 고은교의 의지라고 생각했겠지. 심지어 중간에 자신과 눈까지 마주쳤다. 아무 말 하지 않는 것은 정말이지 말 그대로, 이승우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여겼을 확률이 높았다.

그 말을 처음 들은 거라면, 글쎄.

최악의 경우에는 고은교가 자신을 속였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정말로 고은교가 우시현의 운명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이승우는 고은교에게 ‘대체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고 명확하게 말했지만 고은교는 입을 다물었으니.

‘하…….’

어쩌겠는가.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할 수 있는 일을 해결하는 것이 먼저였다.

“전혀 아니니까 내 몸에 함부로 손대지 마세요.”

되도록이면 멀리 떨어졌으면 좋겠다고 덧붙이며 고은교가 우시현에게 경고했다. 눈앞의 건방진 에스퍼는 팔짱을 낀 채 고은교를 턱 아래로 내려다보았다.

“뭐, 그러든가.”

드라이밸리 게이트에서도 느꼈지만, 우시현의 능력은 자연재해처럼 보이는 부분이 있었다. 응용력도 남다른 것 같고…… 과연 원소 계열 에스퍼는 강하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모습이었다.

첫 번째 방부터 열 번째 방까지, 그들은 몬스터 하나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간간이 울음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우와……. 대장!”

팀원의 절반은 모르는 얼굴이라고 말했던가?

아무리 현장에서 굴러먹은 이능력자라고 해도, 지나치게 격의가 없었다. 우시현의 능력을 쓸 때마다 시끄럽게 박수를 치며 우시현의 능력이 엄청나다느니 뭐라느니 그를 추켜세우기 바빴다. 비교적 잠자코 우시현의 뒤를 따라가는 이능력자들이 점잔 떠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 유난에 그중 몇몇은 얼굴을 찌푸렸다.

‘……호칭은 제대로 지키는 편이 좋은데.’

그들은 척 보기에도 우시현과 꽤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인 것 같았다. 팀장님이 아니라 ‘대장’이라고 부르는 건 그들 사이에 사적인 역사가 있음을 으스대는 것에 가까웠다. 이건 무슨…… 골목대장을 칭하는 것 같지 않은가.

“……혹시 제가 형님을 부를 때도 저렇게 보여요?”

옆에서 김민성이 뜨악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고은교는 어깨를 으쓱하고, 게이트 밖에서만 그렇게 부르라고 말해 주었다.

우시현은 환호에도 별다르게 반응하지 않고 즉각 그다음 방으로 넘어갔다. 일관적인 패턴은 이랬다.

우시현이 선두로 방에 들어간다. 나머지 팀원들은 피라미드 꼴로 우시현의 뒤를 따라가는데, 우시현이 산성 호수를 물로 바꾸어 호수 안과 호수 근처에 숨어 있는 리자드맨(리자드맨; 도마뱀 모양의 독성을 띤 녹색 몬스터. 호수나 늪지대에서 볼 수 있다.)을 쓸어버린다. 그 과정이 끝나면 나머지 이능력자들은 혹시 도망간 몬스터는 없는지 확인하는 게 유일한 임무였다.

당연하지만 우시현의 능력은 철두철미해서, 한 마리의 리자드맨도 살아남지 못했다. 다시 말해 이 게이트에 입장한 다른 에스퍼들에게 가이딩을 해 줄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였다.

‘……능력을 안 쓰니까.’

이런 식으로 패턴이 정형화되자 모의 게이트 시뮬레이션보다 못한 분위기가 잡혔다.

다들 우시현의 압도적인 능력에 완전히 풀어졌다. 경계 태세인 에스퍼들은 아무도 없었고, 그들은 서로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우시현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그 험한 드라이밸리 게이트를 클리어한 이능력자들도 그들에게 물들어 자기들끼리 잡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기강이 해이한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입맛이 씁쓸했지만, 이런 팀 분위기를 주도하는 것이 팀장이었으므로 자신이 나서서 뭐라고 한마디 하는 것도 애매했다. 결국 고은교 역시 ‘계속 움직이려니까 다리가 좀 아프네…….’ 같은 생각을 하며 최후방에서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으헉. 물 좀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김민성이 자신의 배낭을 더듬거리더니 물병을 꺼냈다. 쉬지 않고 열심히 걸은 탓에 다리 근육이 당기고 목이 말랐다. 가이드는 일반적인 근력을 가지고 있는지라 에스퍼들보다 더 자주 쉬어가야 했다. 게이트 규모가 너무 넓으니 이런 점이 불편하다며 김민성이 투덜거렸다. 가이드를 지키는 에스퍼 두 명은 건성으로 근처에 서 있다가, 자기들끼리 쑥덕거리더니 앞으로 가 버렸다.

“우리도 갑시다.”

“예에…….”

늘어져 있던 김민성이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국장에게 항의를 하든 보고를 올리든 해야겠는데.’

아무리 몬스터를 다 제거했다지만 만에 하나가 있는 법이었다. 걸리적거린다고 가이드를 내버려 두고 자기들끼리 가 버리면 안 되지.

어쨌거나 어차피 금방 나갈 거 뭐 하러 배낭을 챙겨 왔냐고 타박한 게 사실이긴 했는지, 우시현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게이트를 돌파해 나갔다. 능력이 너무 강해 뒤따라가는 팀원들이 뒤처질 정도였다.

‘그런데 능력을…… 이렇게 강하게 써도 되나?’

같은 원소 계열 에스퍼들을 떠올려 봐도, 이렇게 압도적인 능력을 보이지는 않았다. 우시현이 유독 강한 능력을 타고난 걸까.

속도로 따지면 거의 방이 세 개 정도의 차이가 났다.

안 그래도 방만한 태도들은 팀장인 우시현까지 없자 더더욱 풀어졌다. 너무 심심한 나머지 리자드맨의 시체를 뒤지는 녀석들까지 생겼다.

‘부산물을 챙기네……. 불법인데.’

국장에게 보고해야 할 건수가 늘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는데, 아. 야, 저기 봐. 저 새끼 또 왔네.”

“저 새끼?”

“그래, 그. 대장님 스토커.”

“아! 아아.”

‘스토커’라는 말에 반응하게 된 귀가 원망스러웠지만, 고은교는 혹시나 싶은 마음에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이미 우시현의 팀원들과 드라이밸리 게이트를 클리어한 적 있었다. 그들은 이미 고은교에 대해서 아는 듯했다. 모의 게이트 시뮬레이션을 클리어하고 고은교가 인명록에 이름을 쓰자 괴상한 탄식을 뱉었으니까. 물론 드라이밸리 게이트에서 고은교에게 호의를 보인 에스퍼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에스퍼들도 있었다.

그래서 혹시 그중의 하나일까 싶었는데…… 아니었다.

‘……처음 보는 얼굴들인데.’

자신을 보고 기분 나쁘게 킬킬대는 녀석들은, 확실히 처음 보는 얼굴이 맞았다.

‘설마.’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다. 이전의 ‘고은교’가 우시현을 보기 위해 게이트 안까지 따라왔었다는 결론 말이다.

“그때 눈물 콧물 다 짜면서 다시는 게이트에 안 오겠다고 싹싹 빌지 않았냐?”

“또 따라오면 이번엔 묻어 주겠다고 했는데…… 기억력 나쁜 도련님이네.”

“센터 치유 에스퍼 솜씨가 좋기는 좋나 봐. 함몰된 코뼈도 되살리고……. 아주 감쪽같아. 어이쿠. 이쪽 본다.”

조롱 섞인 말이 이어졌다. 어쩌면 성형일지도 모른다, 돈 하나는 끝장나게 많다고 들었지 않느냐, 등등.

“……저 사람들, 질이 나빠요.”

옆에서 김민성이 작은 목소리로 어색하게 고은교 편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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