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설마, 게이트 입구에서 내 몸에 손대지 마라 한마디 했다고 이러는 건가.
빈정이 상했나 싶어 얼굴을 봐도, 고통을 참느라 오만상을 찡그리고 있는 건지 아니면 고은교가 싫어서 이런 표정인 건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우시현 에스퍼.”
무슨 생각인지 물으려는 의도로 그를 부르자, 우시현이 고개를 쳐든다.
“나는 나름대로 할 만큼 했어. 알겠냐? 그러니까…….”
뭘 할 만큼 했다는 거야?
고은교의 의아한 표정에 우시현이 입을 꾹 다문다.
말주변이 없는 건지, 아니면 체내 위험률 수치 때문에 눈앞이 오락가락해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해서 그런 건지 이걸 어떻게 풀어서 설명해야 할지 막막한 눈치였다.
결국, 우시현이 한숨 끝에 말했다.
“저번에 해 준 건 이걸로 갚는다 친다고.”
“뭐를…….”
“그리고 다음부터는 이승우 데리고 와. 너는 씨발, 무능력한 새끼가 왜 혼자 게이트에 기어들어 와서…….”
우시현이 하는 말이 어떤 뜻인지 알 듯 말 듯 한 가운데, 기가 막힌 소리가 들렸다.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이 새끼가 듣자 듣자 하니까…….’
선 넘는 걸 밥 먹듯이 하는군.
차가운 얼굴로 고은교는 역시 사람은 고쳐 쓸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적어도 그는 저번 게이트에서 ‘무능력하다’는 소리를 듣지 않을 만큼 일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시현이 고은교를 ‘무능력하다’고 비꼬는 것은 말이 안 됐다. 이건 그냥 우시현이 고은교 자체를 인정하지 않겠단 소리였다.
노력을, 눈에 보이는 성과를 무시하다니. 그것만큼 인정하기 쉬운 것이 없는데도.
그때, 고은교의 눈에 이상한 것이 들어오지 않았다면 그는 이대로 우시현을 버리고 후방에 빠져 있다가 게이트를 클리어하는 대로 떠나버렸을 것이다.
말실수를 했다는 걸 알았는지 우시현의 얼굴색이 좋지 않은 건 차치하고서.
‘이 자식…… 왜 이래?’
제 무릎을 쥐고 있는 우시현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지금 보니까 자꾸 입술이 마르는지 혀가 몇 번이나 아랫입술을 핥는다. 아주…… 초조해 보였다.
“니가 무능력한 게 아니라……. 씨발, 그러니까. 내 말은.”
우시현은 지금 당장 진정이 필요해 보였다. 다시 말해, 그가 폭주 증상을 보이고 있는지 의심된다는 소리였다.
당연하지만 에스퍼가 게이트 내에서 폭주 증상을 보이는 건 매우 위험하다. 에스퍼 폭주는 게이트 밖에서도 위급으로 다루어지는 부분인데, 게이트 안에서라면?
“잠깐, 우시현 에스퍼.”
열받는 건 잠시 뒤로 미루어 두고 고은교가 이성을 잡았다.
긴급 가이딩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면 바로 지금이었다. 기본적으로 가이딩은 접촉이므로 가이딩을 하는 당사자 쌍방 중 하나라도 거부 의사를 표현하면 중단하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가이딩의 본질은 구조 행위였다. 능력을 지나치게 많이 사용하여 응급 상태에 빠진 에스퍼를 구하기 위해 일반인이 손을 댄 것이 가이딩의 시초였다.
“상태가 너무 안 좋은 것 같은데요. 혹시 생각을 이어가는 게 어렵습니까?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이 뚝뚝 끊기는 것 같은가요?”
“아니…… 아니야. 심한 건 아니니까.”
우시현이 고은교의 손을 쳐냈다.
“안 받아도 된다고.”
씹어 내뱉는 말에, 고은교와 우시현이 가이딩을 하는 줄 알고 멀리 떨어져 있던 이능력자들이 이쪽을 힐끔거리기 시작했다.
아, 도대체 어쩌라는 거냐.
고은교가 거칠게 제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우시현을 노려보았다.
“우시현 에스퍼, 공과 사를 구분하세요. 지금 당장 가이딩을 받지 않으면 폭주입니다. 보스 방이 코앞이에요. 우시현 에스퍼가 전투 불능 상태에 빠지면 게이트 클리어가 힘들어집니다..”
물론 지금 당장 가이딩을 받지 않으면 폭주한다는 말은 약간의 과장이 섞인 말이었다. 우시현은 순순한 편이 아니었으니 강하게 말해야 먹힐 것 같았다.
“내 몸 상태는 내가 제일 잘 알아.”
그러나 여전히 우시현은 만만찮았다. 넘을 수 없는 난공불락의 성이라도 되는 것처럼.
“조금 쉬면 되니까 입 좀 다물고 있어.”
“하…….”
아무리 봐도 머리가 아프니 소통 자체를 거부하는 꼴이었다.
“알아듣게라도…… 설명해 보세요. 우시현 에스퍼. 예? 나도 납득을 해야 되지 않겠어요?”
“…….”
코앞이 터닝 포인트다. 그곳에서 어떻게든 몸 상태를 가라앉힌 뒤 보스 방에서 남은 에너지를 불태우고 게이트 밖에 나가서 뒈지겠다는 건 알겠으니까, 쉬운 길을 놔두고 왜 이런 짓거리를 하는지 똑바로 설명해 보라는 뜻이었다.
“……저 멍청한 녀석을 구하느라 니 발목이 아작난 건 나도 아는데.”
우시현이 눈짓하는 쪽을 보자, 이쪽을 초조하게 보고 있는 김민성이 보인다. 우시현이 말하는 멍청한 녀석은 김민성인 듯했다.
‘아…….’
자신이 드라이밸리 게이트에서 김민성을 구했던 걸 말하는 건가?
“너를 호수로 데려갔던 건 그래서야. 김민성을 구하느라 다리를 다쳤으니 좀 고쳐 줄까 싶어서 데리고 갔던 거라고. 거기에서 니가 나한테 가이딩을 해 줄 필요는 없었어. 그럼 그때 가이딩해 준 걸…… 이번 게이트에서 갚아 주면 되잖아. 그러면 계산이 맞지.”
시선을 피한 채 우시현이 빠르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뭐?’
그래, 그때 우시현이 호의를 주려는 게 너무 당황스러워서…… 가이딩을 해 주는 대가로 서로의 관계에 선을 그으려 했던 게 생각났다. 우시현에게는 그 거래 요청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게 지금 가이딩을 안 받는 것과 무슨 상관입니까.”
“씨발, 나는 너한테…….”
우시현이 크게 숨을 들이켰다.
“가이딩 안 받아.”
이 어린애 같은 말투에 고은교가 얼굴을 굳혔을 때였다. 우시현이 중얼거리듯 덧붙인다.
“이번 게이트에서 널 지켜 주는 대가로 저번 가이딩을 대신했다고 쳐. 그러면 이번엔?”
“……무슨.”
“니가 지금 가이딩을 하고 나면…… 내가 또 뭘 해 줘야 하는데?”
“…….”
“짜증 나니까 그냥 가이딩 안 받겠다고. 알겠어?”
그 말을 끝으로 우시현이 손을 들어 올려 제 머리를 털더니, 앞으로 가 버렸다. 고은교는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를 힐끔거리며 에스퍼들 몇몇이 옆을 지나친다.
‘……가이딩을 대가성으로 인식해 버렸나.’
그냥 ‘가이딩’만인지, 아니면 ‘고은교’가 해 주는 가이딩을 그렇게 정의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기가 막힌 건 우시현이 고은교의 가이딩을 거북해하는 건 또 아닌 것 같다는 거였다. 뭘 줘야 할지 알 수 없으니 가이딩을 거부하겠다는 건 역설적으로 고은교의 가이딩이 우시현에게 있어 유의미했다는 뜻이었다.
매칭률이 현저히 낮아 가이딩이 거의 되지 않는 수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리듬 게임-억지 가이딩이나마 했던 게 도움이 됐던 걸까.
우시현은 고은교의 가이딩이 의외로 쓸 만한 탓에 ‘고은교’의 필요성을 느낀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폭주 증상이 올 때까지 과도하게 능력을 써서 자신을 보호하려고 애쓸 이유가 없었다.
‘……시건방지게 말하긴 했지만.’
시종일관 자신을 무시하던 에스퍼에게 인정받는 느낌은 묘한 감회를 안겨다 주었다. 가이딩이 부족해 손이 벌벌 떨릴 지경인데 자신과의 관계를 생각해서 가이딩을 받지 않기로 결정하다니, 생각보다 사고방식이 꽤 어른스럽기도 했다.
‘그래도 터닝 포인트에서 가이딩을 받으라고 설득해야겠어.’
가이딩은 아무리 능력이 없고, 성격이 나쁜 에스퍼라도 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범죄자라도, 일생일대의 원수라도…… 무슨 이유를 들먹이든 간에 가이딩을 받지 못하도록 금지할 수는 없었다.
지금은 게이트 클리어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가이딩을 할 필요가 있다. 깔끔하게 결론을 내린 고은교가 막 몸을 돌렸을 때였다.
“이 새끼는 여전하네. 가이딩도 못 하는 가이드가 일반인이랑 뭐가 다른 거야?”
“내가 그랬잖아. 바뀐 게 없을 거라고. 방금 대장 표정 봤냐?”
우시현이 몬스터를 죽이기 위해 다시 게이트 공략을 시작했으니, 남은 사람들은 다시 그 뒤를 따라가야 했다.
‘아차.’
우시현을 가이딩하는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이 녀석들이 찍소리도 못 하게 하려고 했는데……. 방금 우시현은 자신의 가이딩을 거부한 것은 물론, 자신을 내버려 두고 자리를 피한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이건 좀 위험한데.’
업신여기기를 좋아하는 인간들은 약자를 봤을 때 괴롭히려는 경향을 띤다. 특히, 가이딩 자체가 잘 안되는 하급 가이드나 초짜 가이드를 게이트에서 만났을 경우, 일반인이 왜 민폐를 끼치냐며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는 인간 말종들이 가끔 있었다.
“이런 새끼들은 잡아 죽여야 한다니까. 해충이랑 똑같아.”
“길막이라도 하지 말자, 어?”
고은교와 김민성 근처에서 내내 고은교를 헐뜯던 에스퍼들이었다. 그중 하나가 일부러 고은교의 어깨를 밀쳤다.
하필 바로 옆에 산성 호수가 있었다. 도대체 어떤 억하심정이 있는 건지, 아니면 정말 고은교를 죽이려는 마음이 있었던 건지 그 에스퍼는 힘 조절을 전혀 하지 않았다.
물 위에 떨어지는 순간 고은교는 몸을 비틀어서라도 호수가 아닌 땅에 넘어지려 했지만, 장이주의 몸과는 달리 얄팍한 고은교의 몸은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죽는다.’
이 산성 호수는 몹시 투명해 보이지만, 몇 톤 단위의 쓰레기를 단번에 녹이는 강력한 산성을 띠고 있었다. 고은교는 이대로 자신이 뼈째로 녹아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에게 다가오던 김민성의 눈이 커다래지며 손을 뻗는 게 슬로우 모션처럼 보인다.
“형님!”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그는 호수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