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생각과는 달리 몸이 물에 빠지는 충격만 있을 뿐, 살갗이 녹아내린다거나 하는 끔찍한 참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럴 때가 아니지.’
금세 정신을 차린 고은교가 물살을 헤치며 호수 밖으로 기어 나왔다.
“고, 고은교 가이드님. 괜찮으세요?”
새파랗게 질린 김민성이 어쩔 줄 몰라 하며 고은교의 손을 붙잡아 그가 호수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도왔다.
물을 흠뻑 먹은 옷이 팔다리에 휘감겨 몸이 무거웠다. 얼떨떨한 것은 고은교도 마찬가지였다. 산성 호수가 난데없이 힘을 잃은 게 아니라면, 우시현이 몬스터를 잡으면서 굳이 물의 성질을 바꿔 둔 것 말고는 가능성이 없었다.
“괜찮습니다.”
우시현의 쓸데없는 능력 낭비 덕에 살아남았다. 이 사태가 대형 사고를 친 거라는 것 정도는 알았는지, 고은교를 밀쳤던 장본인이 슬금슬금 몸을 피하는 게 보인다. 고은교는 그쪽을 빤히 쳐다보며 그 에스퍼의 얼굴을 제대로 기억해 두었다.
‘나중에 두고 보자.’
게이트가 끝나고 나면 얼마든지 밖에서 혼쭐을 내 줄 수 있을 터였다.
“너 미쳤냐?”
그때, 이미 방을 나간 줄 알았던 우시현이 거의 소리 지르듯 거칠게 화를 내며 빠르게 달려왔다. 한쪽 손에 퍼덕거리는 리자드맨 꼬리가 들려 있는 것으로 보아 다음 방에서 전투를 하다 말고 뛰쳐나온 모양이었다.
“도대체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녀? 호수에 빠졌다간 뼈도 못 추리는 거 몰라?”
퍼덕퍼덕.
물고기처럼 리자드맨의 꼬리가 펄떡이자 자연히 시선이 그쪽을 향한다. 우시현은 화를 내느라 손에 리자드맨 꼬리를 잡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눈치였다. 그제야 그는 신경질을 내며 손에 쥐인 꼬리를 집어 던졌다.
잠시 생각한 끝에, 고은교는 한 가지 가능성을 더 추가했다.
“……고마워요, 우시현 에스퍼.”
“…….”
아마도…… 우시현은 심상치 않은 소리를 듣자마자 전투를 하다 말고 온 것 같았다. 그리고 고은교가 호수 위에 떨어지는 걸 보는 즉시 물의 성질을 바꿨을 것이다. 찰나라도 머뭇거리거나 늦게 왔다면 고은교를 살리지 못했을 테고.
아찔한 순간이었다. 고은교는 우시현의 귀가 밝은 것에 감사했다.
우시현은 고은교의 감사 인사에 말문이 막힌 듯했다. 그때, 김민성이 씩씩대며 끼어들었다.
“저…… 팀장님. 형님, 아니 고은교 가이드님 잘못이 아니에요. 정승환인가? 그 에스퍼님이 고은교 가이드님을 호수로 밀어 버렸다고요.”
“뭐?”
정확히는 죽으라고 떠민 게 아니라 길을 막지 말라고 밀친 거였지만…… 김민성은 우시현에게 아까의 정황을 고스란히 일러바쳤다.
‘그래봤자 우시현이 내 편을 들어주진 않을걸.’
고은교를 가이드로서 필요하다고 인식하기는 했지만, 자신을 대장이라고 부르며 따르는 팀원보다는 소중하지 않을 터였다. 오히려 게이트 내에서 팀장이 팀원을 불러 경고를 한 정황이 참작되면 게이트 밖에서 정승환을 고발했을 때 이미 경질을 받았다며 죄가 없어질 위험이 있었다.
“어디 다치지는 않았으니, 일단 게이트를 클리어하는 데 집중합시다.”
자신이 나서서 이렇게 말해 주면 우시현은 못이기는 척 가만히 있을 터였다. 그렇게 방심시킨 뒤 게이트 밖에서 물을 먹이자. 그렇게 생각하면서 축축해진 옷자락을 꾹꾹 짜고 있는데, 심상치 않은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린다.
“정승환, 그 새끼 어디 있어?”
어디론가 성큼성큼 걸어가려던 우시현이 몇 걸음 떼지 않아 이쪽으로 홱 되돌아왔다.
“김민성, 박도윤. 여기 있어라. 움직이지 말고.”
그러고는 고은교의 주위로 가이드 하나와 에스퍼 하나를 세워 둔 뒤 다시 자리를 떴다.
‘……뭐지?’
“팀장님 빡치셨네.”
박도윤이 휘파람을 불면서 중얼거렸다. 아까 정승환과 그 친구가 고은교를 욕하고 있을 때 그를 편들어 주었던 에스퍼였다.
곧 다음 방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대, 대장. 대장, 실수였어요! 실수였다고요!”
비명과 함께 자기는 안 그랬다고 발뺌하는 목소리가 뒤이어 울렸다. 그것도 잠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목소리들은 사라졌다.
당연히 이쪽 방에 남겨진 사람들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박도윤 에스퍼가 슬쩍 말했다.
“저희도 다음 방으로 이동해 볼까요?”
“팀장님이 아까 여기 있으라고 하셨는데…….”
김민성이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하지만 우시현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궁금한 건 고은교도 마찬가지였다.
“한번 가 봅시다.”
그들은 다음 방으로 이동했다. 이미 도착한 다른 에스퍼들이 방의 가장자리에 서서 호수 근처에 있는 세 사람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그곳에서 우시현은 직접 두 놈을 거꾸로 들고 있었다.
“대, 대장. 사, 살려 줘요…….”
두 손을 모아서 싹싹 비는 녀석들을 양손에 하나씩 발목을 움켜쥔 채 간당간당하게 떨어트릴락 말락 하는 모습에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네? 자, 잘못…….”
“닥쳐.”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나 싶을 정도였다.
눈물 콧물을 줄줄 흘리며 벌써 눈두덩이가 팅팅 부어오른 꼴을 보니 우시현한테 개처럼 처맞은 게 확실했다. 고은교 역시 저 손에 무자비하게 두들겨 맞아본 적이 있었기에 잘 알았다.
“여기 빠져도 멀쩡할 줄 알았다며? 멀쩡한지 한번 보자는데 왜?”
물론 우시현은 진짜로 산성 호수 속에 두 놈을 빠트리진 않았다. 단지 호수 표면 위로 두 사람을 시계추처럼 아슬아슬하게 왔다 갔다 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머리카락이 호수와 닿자마자 치익, 하는 소리를 냈다. 모르긴 몰라도, 당사자들은 지릴 정도로 무서운 상황일 터였다.
결국 그들은 한참을 싹싹 빌고 나서야 우시현에게서 풀려났다. 다리에 힘이 빠졌는지 비틀거리다 주저앉는 모습이 꼴사나웠다.
“……풉.”
정수리가 맨들맨들해진 두 놈을 보고 김민성이 숨죽여 웃었다. 이미 우시현은 세 사람이 진작 이 방에 온 것을 알고 있었는지 정확하게 이쪽을 봤다.
“거기 있으라니까 왜 따라왔어?”
우시현이 손을 털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고은교는 자기도 모르게 한 발짝 나섰다.
“아니, 큰 소리가 나길래……. 이게 다 뭡니까.”
“뭐긴 뭐야. 보면 몰라?”
엎어져 있는 두 놈들의 허벅지를 차례로 걷어차며 우시현이 호수 근처를 빠져나온다.
“우시현…….”
에스퍼, 라고 그를 부르기도 전에 우시현이 다음 방으로 이동했다. 당연히 자신에게 걸어올 줄 알았는데, 그냥 자리를 떠나버린다.
“……와, 쿨하다.”
쿨은 나발이…….
‘쪽팔려서 저러는 거겠지.’
유난을 떨어가며 팀원 둘을 조져놨는데, 그게 하필 고은교 때문이라는 게 쪽팔린 모양이다. 뭐 사실 우시현의 사고방식이 어떤지 잘 이해되지 않지만, 워낙 독특한 놈이니 그러려니 넘어가는 게 정신 건강에 좋았다.
‘……속은 좀 풀리네.’
게이트 밖에서 저 두 놈을 어떻게 조질지 고민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팀장이 가이드를 괴롭히지 말라고 확실하게 경고했으니까 다른 게이트에서 마주쳐도 아까 한 짓을 똑같이 하지는 못할 것 같고.
‘흠.’
뜻밖에도 우시현이 팀장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해냈다.
저렇게 성격이 개차반인데 어떻게 팀원들을 모을 수 있었나 싶었는데…… 의외로 공평하게 사람을 챙길 줄 아는 걸지도.
훌쩍거리는 에스퍼 둘을 내버려 두고, 그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우시현의 뒤를 따라갔다.
*
방 두 개를 더 건너가자, 널찍한 공터가 나온다. 쓰레기장 게이트의 터닝 포인트였다.
“으으, 드디어…….”
세 시간 동안 쉬지 않고 걸은 탓에 김민성이 괴로운 신음을 뱉으며 어기적어기적 걸어갔다. 고은교 역시 느린 걸음으로 그를 따라갔다.
“두 시간만 쉬고 다섯 시에 보스 방 진입할게요!”
물론 잔뜩 지친 것도 가이드였고, 쉬어야 하는 것도 가이드였다. 우시현을 제외한 에스퍼들은 능력도 쓰지 않았으니 아주 쌩쌩했다.
그들은 활발하게 움직이며 가져온 간식을 먹거나, 물을 마시거나, 드러누워 잡담을 나누었다. 물론 그중에는 정수리가 빈 두 녀석들도 있었다.
‘조용해졌군.’
흡족했다. 자기 친구들에게도 타박을 받으며 구석에 박혀 있는 걸 보니 우시현의 일 처리가 과격하지만, 꽤 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민성과 고은교 역시 빈 공터의 한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아, 맞다. 형님.”
고개를 돌리자 김민성이 궁금하다는 듯 묻는다.
“드라이밸리 게이트 때 같이 다니시던 에스퍼님은 어디 가셨어요? 그, 있잖아요. 왠지 사람을 이렇게 가만히 보는데, 분위기가 좀 무서운……. 되게 싸늘하다고 해야 하나?”
누구 하나가 이승우의 소재를 물어볼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지. 고은교는 별생각 없이 대꾸했다.
“그냥 그럴 일이 좀 있었습니다.”
“아…….”
그리고 김민성이 하는 말을 들었는지 이쪽을 힐끔거리는 우시현과 눈이 마주쳤다. 바로 시선을 돌려 버리기는 했지만, 왠지 이승우가 어디 갔는지 궁금해하는 건 우시현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웃긴 자식.’
“그럼 제가 지켜드릴게요. 저만 믿으세요!”
이번에도 어김없이 기특한 소리를 하며 김민성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