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김민성은 고은교가 자신을 구해 준 보답을 하고 싶은 듯했다.
“김민성 가이드가 자기 몸 잘 건사하면 그게 나를 도와주는 겁니다.”
고은교가 픽 웃으며 말했다.
“헤헤. 그건 그렇지만요.”
김민성이 옆에 달라붙어 너스레를 떨었다.
‘그건 그렇고…….’
할 일이 있었다. 애초에 고은교는 우시현이 자신을 구해 준 것과 상관없이, 터닝 포인트에서 우시현에게 가이딩을 해 둘 생각이었다.
오지랖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가 생각했을 때, 지금이 가이딩하기에 가장 효율적인 타이밍이었다. 분명 아까 우시현은 능력을 과도하게 써 미약한 폭주 증상을 보였다. 사고는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제일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우시현에게 다가가자 우시현이 약간 당황한 얼굴로 쳐다본다.
“뭐, 뭐냐?”
이쪽을 힐끔거리면서 본 걸 다 아는데 발뺌이다.
“도움을 주면 가이딩을 받아도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시현이 나서 준 덕에 뭐라고 서두를 뗄지 고민할 수고를 덜었다. 우시현 역시 고은교의 말을 즉각 알아들은 눈치였다. 갈색빛이 섞인 검은 눈동자에 이채가 돈다.
고은교가 충고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보스 몬스터 방에 들어가기 전에는 웬만하면 가이딩을 받아 두는 게 좋습니다.”
우시현은 무언가 잠깐 생각하는 눈치였다.
“쉬었더니 괜찮아졌어.”
“정말로 괜찮아진 것은 아니잖아요.”
“…….”
우시현이 약간 말을 고르다, 입술을 떼어 냈다.
“어차피 네 가이딩…….”
설마, 아무 도움이 안 되는 건가 싶어 가만히 우시현의 말을 집중하며 듣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우시현이 말을 이어 갔다.
“받은 직후에는 별로 소용없던데. 이틀쯤 지나야 몸에 돌기 시작하더라고.”
“……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우시현의 설명은 이랬다.
여러 가이딩 약을 먹어 보기도 하고, 가이드를 만나 보기도 했지만 아무것도 효과가 없었다. 당연하지만 매칭률이 조금 되는 고은교와 가이딩을 한 직후에도 별다른 차이점이 있지는 않았다고 한다. 다른 가이드와 가이딩할 때 들었던 불쾌감이 미미한 수준이라는 것 말고는.
그런데…….
“효과가 한참 뒤에 있어서 가이딩 때문인지 몰랐으니까.”
“…….”
“처음엔 신기했어.”
고은교가 우시현에게 최초로 가이딩을 해 준 날. 그러니까, 우시현을 목록에서 내보내 주었다가 고은서의 오해로 다시 고은교의 목록에 강제로 들어오게 되어 우시현이 고은교에게 화풀이한 날로부터 이틀 뒤, 우시현은 좋아진 몸 상태를 느꼈다고 한다.
우시현은 그게 그냥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면 그 전날 먹은 가이딩 약이 드디어 몸에 적응한 거거나.
하지만 그 이후로 몸 상태는 꾸준히 나빠졌고,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갔다. 변수는 오로지 고은교가 해 주었던 가이딩뿐이었다는 결론이 나기까지 정말 꽤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결국 가이딩 분야의 저명한 의사를 여럿 만나고 나서야 그는 ‘매칭률이 그나마 일치하는’ 고은교의 가이딩이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우시현 에스퍼는 물 원소 계열 능력자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정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네.’
‘그게 가이딩에 적용될 수도 있어요.’
사실 고은교의 가이딩이 우시현과 퍽 잘 맞는 편이라고는 할 수 없다. 다만, 우시현은 잘 맞지 않는 가이딩도 어느 정도 효용성만 있다면 그걸 몸에 품고 있으면서 꾸준히 스스로의 몸을 정화시킬 수 있었다.
그래서 대대로 물 원소 능력자들은 다른 에스퍼만큼 가이딩 때문에 고통받지 않지만, 우시현처럼 대부분의 가이드 매칭률이 거의 0퍼센트에 수렴하는 경우는 또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우시현의 말을 듣던 고은교가 물었다.
“……그래서 갑자기 내 목록에 들어오고 싶다고 한 겁니까?”
“그럼 너한테 말 안 했겠지.”
그건…… 또 그랬다. 우시현에게 매칭률이 조금이라도 맞는 가이드가 정말 고은교뿐이라면, 우시현은 스스로 자신이 불리한 입장이라는 것을 알려 준 셈이다.
“여기서 가이딩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야.”
“…….”
“어차피 40시간은 아무 효과 없으니까.”
우시현은 담담히 이야기했다.
아마 우시현은…… 드라이밸리 게이트 호수에서 고은교의 가이딩을 받고 난 뒤, 고은교의 가이딩이 정말 효과가 있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전까지는 고은교의 가이딩이 진짜 쓸모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반신반의했다고.
“점막 가이딩을 해서 그런가, 그날은 효과가 좀 빠르긴 했는데…….”
“…….”
그래서 키스를 시도한 거였냐.
그 짧은 시간 안에 다양하게도 시도해 봤다 싶었다. 입술을 누르긴 했지만 그건 진짜 점막 가이딩이 아니었다. 까 놓고 말해 가이딩이라고 볼 수도 없었다. 고은교는 그때 가이딩 기운을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으니까.
‘……그냥 강제 키스인 거지.’
하지만 우시현이 효과를 봤다면…… 일반적으로 접촉 가이딩을 했을 때 효율이 낮은 대신, 점막 가이딩을 하면 효율이 엄청나게 높아지는 타입인 것 같았다. 물론 우시현에게 점막 가이딩을 해 줄 생각은 전혀 없었기에 고은교는 이 추측에 관해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래도 뭐…… 그 말은 진심이었어.”
“…….”
“보니까 괜히 끼어든 것 같다 싶긴 했는데.”
이승우가 좀 고생했어야지. 우시현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
누구 때문에 고생했는지 말하지 않았지만 그게 누구인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보나 마나…… ‘고은교’ 때문이겠지.
솔직히 말해 우시현이 지나치게 잘생긴 편이긴 했다. 사람의 외모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자신조차 종종 의도치 않게 우시현의 얼굴에 시선을 빼앗기는 경우가 있었으니까.
깎아지른 듯 완벽한 형태의 검은색 눈썹과 그 아래에서 강렬하게 빛나는 두 눈이 짧게 친 검은 머리카락과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다. 솔직히 이 섬세하게 가다듬어진 얼굴은 너무 미형이어서 미남보다는 미인이라는 형용사에 더 가까웠다.
결국, 묘하게 사람의 소유욕을 자극하는 이 얼굴은 재벌가의 힘을 휘두르는 ‘고은교’라는 재앙을 불러일으켰다.
우시현의 친구, 이승우는 그 재앙에 함께 휘말린 희생양이었다. 우시현이 줄곧 걱정하는 대상 역시 바로 이승우였고 말이다.
“……승우 군이라면 이제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결국 그는 우시현에게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을 말해 주었다.
“서로 의견이 맞지 않는 부분 때문에 충돌이 있었는데…… 그렇게 끝나게 됐습니다.”
“……뭐라고?”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기는 했지만 스스로 목록에서 탈퇴했더군요.”
말하던 중 고은교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아, 그래요. 내 생각에는…… 승우 군이 나를 정리하기로 결정한 것 같아요.”
“…….”
유능한 가이드로서도, 드물게 높은 매칭률의 페어 가이드로서도 받아들이기 힘든 결과였기에 깨달음이 늦었다.
아쉽지 않다고 하면 거짓이겠지만, 인간관계는 뜻하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서로가 운명이어도 안 될 수 있는 거지. 세기의 연인이라던 로미오와 줄리엣도 결국 집안의 반대로 비극적 결말을 맞지 않았던가.
고은교가 생각하기에, 자신과 이승우는 그렇게까지 정열적인 관계에 비할 정도로 대단하지도 않았다.
그는 빠르게 이승우에 대한 생각을 접었다. 우시현은 뭐라고 위로하거나 대답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는 눈치였다.
“몸 상태가 보스 몬스터를 상대할 정도는 되는 겁니까?”
“아, 어.”
얼떨떨한 표정으로 우시현이 일단 긍정한다. 고개를 끄덕인 고은교가 몸을 돌렸다. 어차피 가이딩을 해 줘도 즉각적인 효과를 보지 못한다는데 굳이 해 줄 필요가 없었다.
뜻밖에도 우시현이 돌아가려는 고은교를 붙들었다.
“야, 그럼…….”
손목 윗부분이 덥석 붙잡혔다.
의아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자, 약간 긴장한 표정의 아름다운 남자가 고은교를 보고 있다.
“그러면…….”
“네.”
우시현은 답지 않게 침을 삼키며 시간을 끌었다. 눈썹을 까딱이며 계속 말을 하기를 종용하자, 우시현이 천천히 입을 연다.
“게이트 끝나고…… 센터에서…….”
“네.”
센터에 같이 보고하자는 건가?
자신보다는 김민성이 훨씬 더 좋은 경력을 가지고 있을 텐데……. 연장자와 함께 보고를 하러 가는 게 마음이 더 편해서일지도 모른다.
‘그러면 오히려 나야 좋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우시현이 말했다.
“가이딩해 주면…….”
“…….”
“안 되냐?”
그건 정말이지, 우시현으로부터 들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소리였다.
시선이 슬쩍 아래를 향했다가, 무언가를 결심한 듯 도전적인 눈빛으로 자신을 올려다본다. 고은교는 서 있고 우시현은 앉아 있어서 가능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고은교는 아주 짧게, 우시현에게도 학생 같은 모습이 남아 있다고 생각했다.
“안 될 건 없지요.”
악의로 가득했던 관계가 정상적으로 돌아올 수는 없겠지만, 표면적으로나마 무난히 관계를 이어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다 보면 우시현 역시 언젠가 쓸모가 있어질지도 모른다.
“좋아.”
어울리지 않게 우시현이 약간 들뜬 목소리로 대답했다. 가이딩이 그렇게 품이 드는 일도 아니었으니 목숨 구해 준 값이라고 생각하고 한번 해 주는 것도 괜찮겠다……. 그런 마음으로 별생각 없이 한 말이었는데.
고은교는 처음으로 우시현의 얼굴에서 비웃음이 아닌 제대로 된 웃음을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