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콜 가이드-84화 (84/132)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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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주를 조심하라’는 건 에스퍼라면 누구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 말이었다. 물론, 처음에 우시현은 이렇게 생각했다.

‘폭주하기 전에 꼬박꼬박 가이딩을 받으면 되지.’

사람은 누구나 죽지만, 죽는 게 두려워서 살아가는 것을 그만두거나 죽음을 늘상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와 비슷했다. 발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에스퍼는 가이딩을 받지 않아도 오랫동안 폭주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사실 가이딩을 받는다는 것이 뭐가 그렇게까지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인지 체감되지 않았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당연하지만 초기의 우시현 역시 가이딩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강한 에스퍼로 발현한 것은 오히려 그런 방만한 태도를 부추겼다. 컨디션이 꾸준히 나빠져도, 조금씩 몸에서 이상 징후를 호소해도 견딜 만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건 아니기에 일반적으로 에스퍼가 하는 노력은 모두 다 했다고 자부한다. 가이딩 약을 종류별로 찾아 먹고, 가이드란 가이드는 죄다 만나기 시작한 것 역시 문제 해결을 위한 일환이었다.

‘뭐…… 언젠가는 나타나겠지.’

새로운 가이딩 약이 개발되든, 가이드가 나타나든…… 뭐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가끔 수분이 부족하지도 않은데 타는 듯한 갈증을 느낀 날에는 약간 더 간절해지는 식이었다.

가이드를 썩 경시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에게 잘 맞는 가이딩을 받은 적도 없으니 그걸 유니콘쯤으로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시현은 아주 말끔한 정신으로 눈을 떴다.

그날은 모든 것이 너무 완벽해서 스스로도 이게 무슨 상황인지 얼른 이해되지 않았다. 중력이 반쯤 사라진 것처럼 몸이 가뿐했고, 끊임없이 머릿속을 당기는 것 같은 두통도 씻은 듯 사라져 있었다.

그제야 우시현은 자신이 나쁜 컨디션에 지나치게 익숙해져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이드를 찾았어요?’

과연 체내 위험률 수치를 검사해 보자, 유의미하게 수치가 떨어져 있었다. 제대로 된 가이딩을 받은 것 같다고 닥터가 흡족해 했으니 분명 모르는 사이 가이딩이라는 걸 받았거나, 가이딩 약의 약발이 들었거나 한 것 같은데…….

제대로 된 가이딩을 받으면 지금과 같은 효과를 볼 수 있다는 말에 혹한 건 사실이다. 이게 가이딩을 받은 몸 상태라면, 볼썽사납게 가이드에 미쳐 있는 에스퍼들도 충분히 이해 가능했다.

문제는 그가 최근 가이딩을 받은 적이 없다는 것에 있었다. 가이드 약은 늘 먹는 것을 먹었으니 마땅한 변수가 없다는 게 의아할 뿐이었다.

정확히는 고은교의 가이딩을 가능성에서 아예 배제했다.

그저, 먹는 수십 개의 약 중에 몸에 맞는 가이딩 약이 있는 줄 알고 그게 뭔지 알아보느라 병원에 한참 들락거렸다.

이건 약을 먹어서가 아니라 가이드에게 가이딩을 받았기에 회복한 몸 상태라고 닥터가 강경하게 말했어도 우시현은 고개를 내저었다. 관리자 권한으로 우시현의 가이딩 내역을 살펴보던 의사가 고은교를 찾아내지 않았더라면 맹세컨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결국 우시현은 고은교가 매칭률이 맞는 가이드라는 걸 간신히 인정했다.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죽어도 그 불결한 애정행각을 다시 받아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게 고은교라는 걸 알자마자 우시현은 처음으로 찾은 가이드를 깔끔하게 포기했다. 하필이면 그게 고은교라니, 누군가 그를 놀리는 것 같았다. 정상적인 척해도 고은교는 고은교였다. 가능하면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상대라는 뜻이다.

하지만…….

“우시현 군은 정말 내 수업을 듣지 않았군요?”

고은교는 다시 나타났다. 이번에는 이승우를 옆에 낀 채였다.

‘하긴…….’

당연히 좀 맞았다고 해서 고은교가 자신을 포기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걸 모르는 이승우가 안타까웠고, 이전과는 다른 계열로 열받는 소리를 곧잘 하는 고은교 때문에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우시현은 그 모든 것이 예전처럼 최악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게이트에 들어가는 건 기대하는 목표값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사람은 죽기로 결심해서는 안 돼요. 자신의 자아실현을 위해 힘써 정진하며 살아야 합니다.”

“…….”

이런 헛소리를 진지한 듯 늘어놓아서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고은교가 예전처럼 극도로 혐오스럽지 않다는 것이 중요했다.

가이딩이란 건 정말 놀라웠다. 우시현은 고은교를 보자 어쩔 수 없이 그때의 완벽했던 컨디션을 떠올리게 되었고, 가이딩을 받고 싶다는 욕구 때문인지 고은교가 약간 연기하는 것만으로도 그를 아예 다른 사람인 양 생각하고 싶어 하는 스스로가 낯설었다.

고은교에게 속아 고은교의 것이 된 친구는 아예 고은교를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우시현은 이승우가 분명 미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왜 이승우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럼에도 우시현은 고은교가 자신에게 미련이 남았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자신을 열렬하게 좋아하는 것은 아닐지 몰라도, 가끔 눈이 마주칠 때 유독 좋아하는 부위를 은근슬쩍 훑는 시선은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고은교는 절대로 아니라고 주장하듯 꿋꿋하게 자신을 무시했다.

“미쳤습니까?”

반쯤은 오기로 고은교의 입술을 물었을 때, 우시현은 이상하게 시원한 감각이 입 안에 남았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그 이후로 곧장 날아오는 주먹을 순순히 맞아 준 건 그 때문이었다.

예상대로 고은교는 자신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다. 운명이라는 소리를 아직 기억하고 있는 우시현을 향해 경악한 듯 입을 벌렸으면서도, 정면으로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내친김에 찝찝한 것을 털어내기 위해 이승우를 놓아 주고, 자신을 목록에 대신 들이라고 권유했는데…….

“우시현 에스퍼는 내 에스퍼가 아닙니다.”

고은교는 그를 아주 단호하게 거절했다.

‘……더 굽히기를 바라서 이러나.’

그동안 고은교가 자신에게 지나친 냉대를 받기는 했다. 하지만 우시현은 이보다 더 고은교의 비위를 맞춰 줄 생각이 없었다.

고은교는 우시현을 더 기다려 주지 않고 마치 진짜로 우시현이 상관없어졌다는 것처럼 몸을 돌려 얼마간 걸어가기까지 했다.

‘하.’

그런데 그게…… 사람이 바뀐 것처럼, 너무나 고집스럽게 굴기에 오히려 더 신경이 쓰였다. 다친 게 분명한 다리로 절뚝거리는 게 선명하게 눈 안에 들어온다.

‘바늘에라도 찔리면 오만 패악을 다 떨어대던 새끼가…….’

그래서 우시현은 평소라면 결코 하지 않을 짓을 했다.

하지만 손수 호수로 데려가자, 고은교가 발칙하게도 우시현에게 도움을 받았으니 가이딩을 해 주겠다고 했다. 우시현이 선의로 베푼 호의를 무효로 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는 짜증을 느꼈지만 고은교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어찌저찌 가이딩을 받고, 그다음은…….

‘순록을 죽이고.’

중간에 그의 근처까지 온 가이드들을 지켰던 기억이 났다. 그날따라 유독 가이드들을 어떻게 지켜야 할지 신경 쓰였는데, 이승우와 합을 맞추니 완벽하게 가이드들을 제대로 지킬 수 있었다.

다만 고은교는 확실히 이승우에게 의지하는 것 같았고…….

‘이승우는 고은교한테서 눈을 못 뗐지.’

그 모습이 확실히 잘 맞는 페어처럼 보였다. 조금 심술이 나기도 했다. 전날 밤에 고은교는 자신을 피해 뺨을 붉히면서 어둠 속을 열심히 헤쳐 나갔던 것이다.

만약 고은교가 자신의 시선을 끌어 보려는 의도였다면, 이번에야말로 성공인 게 아니냐고 우시현은 생각했다. 하지만 이승우에 대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반복한 것으로 보아 고은교의 마음 중 일부가 우시현을 떠나 이승우에게 향한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아직도 내가 운명이라고 했는데.’

솔직히 우시현은 진짜 자신이 고은교의 운명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고은교에게 아직 마음이 있는 게 맞는지 간접적으로 물어본 것이었고, 고은교는 아직도 우시현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거두지 않았다고 말한 것뿐이었다.

이 애매한 태도에 화가 나면서도 잠자코 두고 보자는 생각이 든 게 가장 어이없었다. 체념인지 기다림인지 모를 막연한 시간을 보내면서 우시현은 제 할 일을 했다.

B-급 쓰레기장 게이트를 앞둔 지 일주일 전.

관성적으로 모의 게이트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나오는 길이었다. 어차피 이번 게이트는 우시현 본인만 잘하면 되었기에 다른 사람들은 모의 게이트 시뮬레이션을 돌릴 필요가 없었다. 물론 임무 수행 직전 해당 게이트의 시뮬레이션을 돌리는 건 의무지만, 이번에는 굳이 결과서를 가져오라며 눈을 부라릴 필요가 없었다는 이야기다.

적당히 힘을 아낀 채 각 방을 클리어하고, 보스 방에서 남은 힘을 쏟아 붓는 게 이번 게이트 클리어 작전의 전부였다.

‘여섯 시간 걸리나.’

우시현은 어깨를 으쓱이며 카드 키를 반납하기 위해 카운터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때,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에스퍼들끼리 모여서 큰 소리로 잡담을 나누는 것을 우연히 들었다.

“가이드한테 까이는 게 한두 번이냐? 난 상관없어.”

“아서라. 그 가이드 성깔 장난 아니더만…….”

딱히 자신의 상황과 비슷하지는 않지만 이상하게 관심이 갔다. 물론 가까이 다가가면 반색을 하며 우시현을 대화에 끼워 넣으려고 하기 때문에 잠자코 명부를 적는 척하며 대화를 몰래 엿듣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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