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분위기 괜찮으면 연락처라도 물어보지 뭐. 앞으로도 계속 마주칠 텐데, 그럴 기회 한번 없겠냐?”
“그건 그래.”
그렇단 말이지.
듣기로는 고은교가 제주도 게이트도 클리어했다고 했다. 언론에서 한바탕 신나게 떠들어댄 이야기이니 우시현 역시 그에 관해 주워들은 적이 있었다. 정말 고은교가 게이트를 클리어하는 것에 흥미를 들였다면…….
‘다른 게이트에 올 수도 있겠네.’
게이트에서 자꾸 마주치다 보면 고은교가 우시현에게 가이딩을 해 줘야 할 타이밍이 올 수도 있을 것이고, 그렇게 찔끔찔끔 가이딩을 받아도 자신은 효율이 좋으니 무척 이득이었다. 고은교 또한 자신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접지는 않았으니까…….
‘한 번 더 확인해 볼까.’
그 에스퍼의 말대로였다.
우시현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고은교를 또 볼 수 있었다. 이번에는 찜찜한 기분을 들게 만드는 이승우도 없이, 혼자였다.
“……이승우는 어쩌고?”
우시현을 보자마자 입을 꾹 다무는 고은교의 모습에 그는 너무나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진짜 내가 운명이라도 되나?’
차가운 얼굴로 웃어 주지도 않는 남자를 간간이 힐끔거리면서 우시현은 생각했다. 여러 번 사납게 떼어 내어진 끝에 고은교 역시 우시현에 대한 감정이 증오로 돌아선 것처럼 보이지만, 정말 운명의 작용이라는 게 있다면 고은교도 어쩔 수 없이…… 우시현에게 끌리고 있는 중일 테니까.
그래서 이승우까지 떨어트려 놓고 자신에게 찾아온 것이다.
‘이걸 불쌍하다고 해야 할지.’
처음에는 딱히 기분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고은교의 태도가 싸늘한 게 여전히 적응되지 않았고 진실이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글쎄…… 그렇지만 괜찮은 타이밍이다. 고은교의 진심을 가늠해 볼 수 있는 기회였다. 마침 우시현은 드라이밸리 게이트에서 받은 가이딩 때문에 고은교가 가이드인 것이 확실히 인지된 상황이었다. 다시 말해 고은교가 평소와 달리 느껴졌다는 이야기다. 근처에 그 어떤 에스퍼도 없는 자그만 몸집의 남자가 자꾸만 눈길을 잡아끌었다.
그런데…….
‘……책으로 게이트를 배웠나.’
길어봐야 6시간 걸리는 게이트에 굳이 배낭을 챙겨온 것도 그렇고, 10분이나 일찍 도착했으면서 시간에 딱 맞춰 게이트에 들어가려는 것도 그랬다.
‘무슨 십 년 전부터 현장에 다니던 사람 같네.’
아…… 젠장. 자꾸 쓸데없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러면 이승우한테 미쳤다고 할 자격이 없다. 이게 다 고은교 때문이다. 고은교한테 신경을 너무 쓰니까…… 정신 나간 추측까지 하고 앉아 있다.
우시현은 초조하게 굴지 않으려고 혀로 입천장을 꾹 누르면서도, 자신의 모든 감각이 고은교를 향해 곤두서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하지만 그걸 자각했다고 해서 중대한 무언가가 바뀐 것은 아니었다. 신경 쓰이는 게 뭐. 그냥 그게 다라고 생각하면서도, 우시현은 머뭇거리는 고은교를 본능적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곧바로 후회했다.
게이트에 들어오고 난 이후부터 피부가 따끔따끔해질 정도로 위기감이 들었다. 괜히 이승우 없이 고은교를 데리고 게이트에 들어온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고은교를 혼자 두기만 해도, 어디에선가 나타난 몬스터가 고은교를 공격할 것 같았다.
‘씨발…… 그러게 왜 이승우를 안 데리고 와서.’
저 가느다란 팔다리로 뭘 할 수 있겠는가? 팔자에도 없는 수업을 하느라 꼴에 공부 좀 했다고 입만 살았지.
고은교가 성질 긁는 소리를 한 건 채 오 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간접적이나마 우시현이 고은교에게 호감을 드러낸 바로 그 순간.
“내 몸에 함부로 손대지 마세요.”
“…….”
누가 들으면 손이 아니라 다른 데를 잡은 줄 알겠네.
우시현은 속으로 빈정거렸다. 그의 기분은 착 가라앉은 상태였다. 고은교가 자신을 ‘운명이 아니다’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고은교로부터 밀려나는 순간, 우시현의 기분은 가파르게 하강 곡선을 그렸다. 그랬다. 절대로 그 안을 비집고 들어갈 틈 따위는 없었던 거다.
어찌할 여지도 없이 확실하게.
그제야 우시현은 고은교가 한 말이 대부분 진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이건 자신이 오랫동안 바라왔던 상황이었다. 누구라도 몇 년에 걸친 지독한 집착을 받다 보면, 그 인간이 갑자기 돌변하여 자신에 대한 관심이 식는 상황을 몇 번이고 상상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 상황이 찾아오자, 우시현은 문득 허무함을 느꼈다. 두 사람이 팽팽히 당기던 줄을 한 사람만 당기고 있는 묘한 탈력감…….
‘씨발…….’
우시현은 몇 번이고 입술을 이로 짓씹으면서 더 이상 고은교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물론, 생각이 마음대로 되는 것이었다면 그는 진작 자신의 페이스를 되찾았을 것이다.
스스로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우시현은 보이는 만큼 비정하고 무도한 성품이 아니었다. 부모로부터 버려져 센터 보육원에서 홀로 자라나면서, 인형처럼 유달리 예쁘고 잘생긴 아이에게 쏟아지는 관심과 못된 손길이 세상을 향해 가시를 세우도록 만들었다. 기실, 우시현은 일단 정을 주기 시작하면 끝까지 의리를 지키려 하고, 선의를 선의로 갚아 주려는 기본적인 양심이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곰곰이 생각한 끝에 고은교가 원하는 대로 해 주자는 결론을 낼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언제는 옆에도 오지 말라면서?”
“…….”
정말 고은교가 자신과 엮이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더 이상 자신을 원하지 않는다면, 이번 게이트에서 가이딩을 받아서는 안 됐다. 드라이밸리 게이트에서 고은교가 한 말을 핑계로 댔지만, 본심은 그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우시현은 자신이 멍청한 짓을 하고 있다는 자각 정도는 하고 있었다. 이 망할 가이드는 우시현이 근처에만 가도 발작을 하며 펄쩍 뛰니, 아예 완전히 멀어져서 모든 몬스터를 잡아 죽이는 짓을 감행해야만 그를 지킬 수 있었다. 물의 파도로 거대한 크기의 호수를 몇 번이고 휩쓰는 짓을 하며 능력을 낭비하기 시작한 것은 평생에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짓거리였다.
당연하지만 폭주하고 싶어서 그랬던 건 아니었다. 혹시라도 뒤에 남겨진 몬스터 때문에 고은교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한 짓이었다. 고은교를 안고 다니면서 오로지 그만 보호하는 이승우가 없으니, 고은교를 제대로 보호할 만한 에스퍼는 자신뿐이라는 게 우시현의 신경줄을 갉았다.
몸 안쪽을 스멀거리며 기어오르는 폭주 증상은 스스로가 더 적나라하게 느낄 수 있었다. 우시현은 자연히 초조해졌다. 이러다가 능력이 뚝 끊기기라도 하면…….
‘빌어먹을.’
의도치 않게 말실수를 한 것도, 왜 혼자 왔느냐고 고은교를 타박한 것도 초조함 때문이었다.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곳은 게이트 안. 찰나의 실수로 고은교를 잃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자, 그가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자 눈앞이 아득하고 손발이 부들부들 떨렸다.
‘빌어먹을…….’
페이스를 잃지 말고 능력을 조절해서 써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지 못했다. 혹시라도 뒤에 남은 에스퍼들이 재빨리 움직이지 못해 고은교에게 몬스터를 흘릴까 봐. 우시현을 제외한 에스퍼의 수가 일곱이나 되는데, 상식적으로 그럴 리가 없는데.
이 말도 안 되는 망상 때문에 일을 그르치기 직전이었다.
간신히 우시현은 자신이 낸 결론을 잊지 않았다. 고은교가 가이딩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땐 못 이기는 척 그러라고 할 뻔했다.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건 아무래도 그깟 가이딩 하나에 약해질 준비를 하는 마음 때문이다. 우시현은 그 자리를 피하는 것으로 더 이상의 내적 갈등을 접으려 했다.
하지만 아까 ‘가이딩해 주겠다’는 말 때문이었을까?
그다음 방으로 걸음을 옮기면서도 우시현은 계속해서 뒷방에 남은 고은교를 신경 쓰고 있었다. 물의 창을 불러 내 눈에 보이는 족족 리자드맨들을 학살하자, 우시현에게 공포를 느낀 리자드맨들이 죄 도망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보면 몬스터들도 어느 정도 지능은 있는 것 같단 말이지.’
무표정한 얼굴로 가장 가까이에서 달아나는 리자드맨의 꼬리를 잡아채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해충이니 뭐니, 꼭 누군가를 두고 욕을 하는 것 같은…….
그와 동시에, 목뒤로 쭈뼛거리는 소름이 돋아났다. 우시현은 그대로 뒤를 돌아 원래 있던 방으로 달음박질쳤다. 굉장한 속도였음에도, 그가 느끼기에 자신의 달리기는 턱없이 느렸다.
우시현이 가장 먼저 본 것은 놀란 표정으로 ‘형님!’이라고 외치는 김민성이었다.
그는 이것저것 생각할 것 없이 즉시 산성 호수의 농도 균형을 일반적인 물로 맞추었다. 거의 본능에 가까운 속도였다. 다행히 능력은 그의 생각을 곧바로 들어주었다. 턱끝까지 차오른 숨을 내쉬기도 전에 풍덩, 하는 소리가 났다.
마침내 우시현이 창백한 얼굴로 방의 입구에 섰을 때, 물에 젖어 호수 밖으로 헤엄쳐 나오는 고은교가 보였다.
“너 미쳤냐?”
그 순간 우시현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고은교가 실수로 호수에 빠진 줄 알고 계속해서 고함을 질러댔다.
그리고…… 고은교로부터 고맙다는 인사를 듣자, 그만 할 말을 전부 잊어버렸다.
‘이건 좀 반칙 아닌가.’
뭐가 반칙인지도 모르면서 우시현은 망연히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