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물론 그렇다고 왈칵 치밀어 올랐던 두려움과 감정 찌꺼기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우시현은 고은교가 실수로 넘어진 것이 아니라 누군가 고의로 밀쳤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이 분노에 가까운 감정을 그쪽으로 죄다 쏟아낼 준비를 마쳤다.
‘어디 다치지는 않았으니, 일단 게이트를 클리어하는 데 집중합시다.’
코웃음이 나왔다. 본인이 언제부터 그렇게 착했다고…….
범인을 검거하러 가기 전에, 또 아까와 비슷한 사태가 일어날까 싶어 얼추 믿을 만한 녀석들 둘을 보호용으로 세워 놓고 가는 것도 잊지 않았다.
딱히 추궁을 할 필요도 없었다. 본인이 범인인 게 다 보이도록 구석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이번 게이트는 워낙 하는 일이 없는 게이트다 보니, 고등학생 시절 알고 지냈던 녀석들 몇을 데리고 들어왔었다. 가족 병원비가 없다기에 이런 게이트가 생기면 종종 데리고 들어와 주었는데, 뒤에서 이딴 짓을 하고 있을 줄이야…….
이 새끼들은 가이드한테 무슨 짓을 할 정도로 대단히 능력이 있는 놈들도 아니었다. 생각할수록 괘씸하여 지나치게 두들겨 팼다. 누가 구경을 하든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러던 중, 고은교가 이 방으로 들어왔다.
우시현은 아차 싶은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최근, 자신 역시 고은교를…….
‘……아, 씹.’
끔찍하게 두들겨 팬 적이 있지 않은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고 생각하겠네.’
물론 그때는 고은교에게 또 농락당했다고 생각해서 진짜 패 죽이고 싶었지만, 진짜 죽여서는 안 되니 힘조절을 하긴 했다. 그래도…….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그렇게 맞은 뒤에도 고은교는 사과했고, 자신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저질렀다. 말하자면 너무 쪽팔려서 기억 속에 묻어 두었던 ‘울었던 일’이 떠올랐다는 것인데…….
“거기 있으라니까 왜 따라왔어?”
그러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말투가 퉁명스러워졌다.
“아니, 큰 소리가 나길래……. 이게 다 뭡니까.”
“뭐긴 뭐야. 보면 몰라?”
이대로 있다간 계속 그렇게 굴 것 같았다. 아니, 자신은 원래 그런 놈이었다. 이승우처럼 간지럽게 말하는 방법 따위는 몰랐다. 우시현은 뒷머리를 벅벅 긁고 싶다는 충동과 싸우며 그 방을 벗어났다.
이 망할 놈의 게이트를 빨리 해치우고 싶었다.
‘신경 좀 끄자…… 제발.’
그렇게 생각해서 터닝 포인트에서도 멀찍이 떨어져 앉았지만…….
“드라이밸리 게이트 때 같이 다니시던 에스퍼님은 어디 가셨어요? 그, 있잖아요. 왠지 사람을 이렇게 가만히 보는데, 분위기가 좀 무서운……. 되게 싸늘하다고 해야 하나?”
이런 말이 들려오는데 귀가 쫑긋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냥 그럴 일이 좀 있었습니다.”
“아…….”
‘그럴 일’이 대체 뭔데?
계속 귀를 기울이려는 자아와 싸우다 패배한 우시현이 이를 악물었다. 왜 이딴 것에 신경을 쓰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머리가 어떻게 되어 버린 것 같았다. 모든 게 짜증 나고 불안했다……. 자신의 기분이 통제 하에 놓이지 않는다는 건 마치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 같은 기묘한 상실감을 안겨 주었다.
이딴 거지 같은 기분을 느끼지 않으려면 고은교 같은 건 단념해 버려야 한다는 걸 아는데도…… 최소한 그가 자신의 보호 아래에 있는 이상, 이딴 식으로 머저리처럼 구는 걸 그만둘 수 없을 것 같았다.
“뭐, 뭐냐?”
우시현이 갑자기 말을 더듬은 건 특별히 멍청해져서가 아니었다. 대뜸 고은교가 자신에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도움을 주면 가이딩을 받아도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두통조차 잊고 우시현은 저도 모르게 고은교를 빤히 쳐다보았다. 스스로도 놀랍도록 고은교의 제안에 혹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우시현은 없는 인내심을 박박 긁어모아 본래의 생각을 고수하는 데 성공했다.
“몸 상태가 보스 몬스터를 상대할 정도는 되는 겁니까?”
예전에는 그런 줄도 몰랐던 깐깐함을 발휘하는 고은교를 제대로 설득해낸 것이다. 하지만, 우시현은 정당한 기쁨을 누리지도 못했다. 그보다 고은교가 이승우와 깨졌다는 정보에 너무 당황하여 얼이 빠져 있었다. 짧은 순간에도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그럼…… 이승우와 깨져서 혼자 게이트에 지원한 건가? 그리고, 자신과 만난 것은 단순한 우연인 건가?
‘그래서 먼저 다가온 거야. 분명해.’
아니어도 괜찮았다. 그 짤막한 사실은 우시현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뭐, 자신이 보험이라도 괜찮았다. 고은교가 가질 수 있는 에스퍼 중에, 쓸 만한 녀석이라 판단되어 스페어가 되었대도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렇게 되면 고은교가 자신에게 적당히 무관심할 것 아닌가. 그렇다면 예전처럼 돌아갈 걱정을 하지 않아도 좋고, 자신은 고은교의 가이딩을 적당히 받을 수 있으니 좋고…….
“야, 그럼……. 그러면…….”
하지만, 그래도 괜찮나?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고은교는 그날 이후, 줄곧 자신을 거부해 왔다. 이렇게 갈팡질팡해 본 적은 처음이었다.
‘젠장, 그렇다고 해서 등신 같이 묻지도 않을 수는 없잖아.’
“게이트 끝나고…… 센터에서…….”
밑져야 본전인 거라고, 큰 소리로 떠들던 이름 모를 에스퍼의 말을 떠올리며 우시현이 힘겹게 말을 이었다.
“가이딩해 주면…… 안 되냐?”
우시현은 자신이 고은교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들려올 대답에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다는 자각조차 없었다. 손에 진땀이 나는 것도, 폭주 증상에 컨디션이 끔찍하게 나빠진 것도 모두 잊었다. 그냥 가이딩 좀 받겠다는 생각 하나로 이러는 줄 알았다.
“안 될 건 없지요.”
그래서 고은교가 승낙했을 때, 그는 너무 좋고 행복해서 이렇게까지 기쁜 마음이 드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
두 시간은 금방 지났다. 쉬는 시간 내내 고은교는 우시현에게 붙잡혀 있었다. 시간이 얼추 다 되자, 우시현이 아쉬운 얼굴로 고은교를 김민성에게 보냈다.
“조심해라.”
몰랐는데 의외로 시답잖은 소리를 하는 재주가 있다. 분명 싸가지 없는 성격 때문에 친구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경계심을 내려놓고 난 뒤에는 제법 친근하게 말할 줄 알았다. 고은교는 자신의 안에서 우시현에 대한 평가를 상향 조정했다.
보스 방에서도 우시현이 선두에 설 예정이었다. 다른 에스퍼들은 다 논외로 두고 오직 저 혼자서 보스 몬스터를 잡겠다는 전략은 무식하기 짝이 없었다.
‘지금 몸 상태로 괜찮으려나.’
괜찮으니까 강행하는 것이겠지만, 저러다 큰일이 나면 어쩌려고 저러나 싶은 마음도 없잖아 있기는 했다.
“보호복 챙겨 오셨습니까?”
“그런데 공격을 정면에서 맞으면 아무 효과 없다고 하던데. 솔직히 저희가 쫄쫄이를 입고 들어올 수도 없잖아요…….”
박도윤의 말에 김민성이 툴툴대는 소리가 들렸다.
고은교는 말없이 준비해 온 단열 장갑을 꼈다. 고무 소재로 만들어진 장갑이라 몹시 뻑뻑했다.
쓰레기장 게이트의 보스 몬스터는 뱀장어다. 사실 생김새가 뱀장어보다는 이무기에 가깝지만, 이무기처럼 강력하지는 않다. 다만 대단위 전기 공격을 사용해서 주변 지반이 뜨겁고, 전기가 곧잘 통했다. 에스퍼들도 안전하지 않은 마당에 가이드는 보호복이 필수였다.
물론, 그것도 정면에서 전기 공격을 맞으면 그대로 전기 통구이가 되어 버릴 것이다. 그냥 이건 운 나쁘게 전기가 흐르는 사물을 만졌다가 감전사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에 불과했다.
“이동합시다.”
에스퍼 여덟 명, 가이드 두 명. 전원이 보스 방으로 진입했다.
뱀장어가 보스 몹이기 때문에 보스 방 역시 물속일 것 같지만, 놀랍게도 이 뱀장어는 땅 위를 네 다리로 뛰어다닌다. 보스 방은 발목까지 들어찬 늪지대였다.
침입자들을 발견한 뱀장어가 꾸물대며 몸을 일으키자마자, 가이드를 보호할 두 명의 에스퍼를 제외한 나머지는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전기 공격에 집중포화당하지 않기 위해서다.
‘육체 강화 에스퍼가 셋, 물질 변형 에스퍼가 둘……인 건가.’
그리고 가이드를 보호하는 에스퍼 둘 역시 육체 강화 계열이었다.
“가이드님, 잘 부탁합니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고은교에게 하나, 김민성에게 하나씩 붙은 에스퍼들은 뱀장어가 가이드를 공격할 때마다 가이드를 겨드랑이 사이에 끼고 펄쩍펄쩍 뛰어 도망 다닐 예정이었다.
나머지 에스퍼들은 우시현을 대신해서 뱀장어의 시선을 교란하며 어그로를 끌거나, 후방에서 원거리 공격을 해 보스 몬스터에게 꾸준히 대미지를 누적하기 시작했다. 물질 변형 에스퍼들은 준비해 온 무기를 들고 보스 몬스터를 조준했다.
A급 게이트 몬스터도 아니었으니 이 뱀장어의 공격 패턴은 페이즈가 구분되어 있지도 않았다. 고은교는 육체 계열 에스퍼의 품에 안긴 채 마구 흔들리며 산발적으로 꽂히는 번개를 바라보았다.
그럼에도 위력이 상당했다.
‘한 대라도 제대로 맞으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까맣게 그을리겠지. 고은교는 부디 최대한 빠르게 보스 몬스터를 공략하길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