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콜 가이드-87화 (87/132)

#87

왜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는 법이 없을까.

우시현은 뱀장어를 상대로 제법 고전했다. 뱀장어는 미꾸라지처럼 우시현의 공격을 잘도 빠져나갔다.

“이쪽에서도 대단위 공격을 한 번 써야 할 것 같은데…….”

고은교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간간이 보스 몬스터에게 물의 창을 꽂으며 몸을 날리는 우시현에게 그만한 힘이 남아있을지 의문이었다.

‘그 요란을 떨며 잡몹을 잡았으니.’

퍼뜩 우시현이 폭주 증상을 보였던 것에 생각이 미쳤다. 시간을 더 끌수록 불리한 것은 우시현이었다. 하지만 우시현이 회심의 공격을 뱀장어에게 꽂아 넣을 수 있을까? 그러기엔 뱀장어는 너무 재빨랐고, 미끈거렸다…….

어느새 가져온 투척 무기를 다 사용한 물질 변형 에스퍼가 자신을 좀 도와 달라며 고함을 질렀다. 근처에는 진흙밖에 없으니 이걸 변형하여 보스 몬스터에게 던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진작 우시현을 돕고 있던 육체 강화 계열 에스퍼들은 후방을 지원하러 갈 수 없었다. 그랬다간 더듬이를 바르르 떨고 있는 전기뱀장어에게 그대로 구워질 것이 자명했으므로. 결국, 가이드를 각각 품에 안고 있던 에스퍼들 중 하나가 차출되었다.

“괜찮을 겁니다.”

졸지에 가이드 둘을 양팔에 끼게 된 에스퍼가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그다음 상황은 더더욱 급박하게 흘러갔다.

계속해서 에스퍼들로부터 공격에 얻어맞은 전기뱀장어의 움직임이 점점 더 둔중해지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전기뱀장어는 회복을 위해 늪지대 안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시현이 그걸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는 남아 있는 능력을 모두 끌어다 쓰는 것처럼 근처 지반을 죄다 딱딱하게 굳혔고, 숨이 막힌 뱀장어는 견디지 못하고 땅에서 튀어나왔다.

“젠장, 비켜!”

뱀장어가 웩, 하는 소리와 함께 어마어마한 산성액을 쏟아냈다. 이 쓰레기장 게이트의 호수와 똑같은 성분의 강력한 산성액이었다. 다행히도 에스퍼들은 저마다 펄쩍펄쩍 뛰어 보스 몬스터가 토해내는 공격을 피해낼 수 있었다.

“버, 번개!”

뱀장어의 산성액으로부터 훌쩍 멀리 떨어지자, 바로 한 걸음 뒤에 번개가 꽂혔다. 고은교는 자신의 두 발 사이가 까매지는 것을 보고 침을 꼴깍 삼켰다. 한 치라도 옆으로 움직였다간 그대로 발 하나가 타 버릴 뻔했다.

‘이게 이렇게 고생할 일이냐고.’

다음에 또 이 게이트에 들어올 일이 있으면, 최소한 40시간 전에 우시현을 가둬 놓고 가이딩한 뒤 들어오리라. 고은교는 단단히 다짐했다.

자신은 쓰레기장 게이트를 선호하지 않았다. 가이드가 할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에스퍼에게 고목나무의 매미처럼 매달려 있는 꼴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또 땅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네.’

뱀장어가 마구 머리와 꼬리를 흔들며 주변에서 자신을 성가시게 하는 에스퍼들을 튕겨 나가게 했다. 그 과정에서 능력을 발산해대는 것은 물론이었다. 우시현을 비롯한 에스퍼들은 침착하게 뱀장어로부터 떨어졌다.

단단한 지반 안으로 내려가기만 하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 걸까? 뱀장어는 오오오, 하는 소리와 비슷하게 울부짖었다. 우시현이 늪을 얼음처럼 딱딱하게 만들었다가, 말랑하게 바꾸자 머리를 그 안으로 집어넣는다. 우시현은 그사이를 놓치지 않고 다시 늪을 딱딱하게 만들었다.

뱀장어는 괴로워하며 늪에 반쯤 박힌 몸을 뒤틀었다. 굵기만 해도 2m가 넘는 녀석이다. 딱딱해진 지반이 사방으로 쩍쩍 갈라지더니 땅 구석구석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피해!”

우시현이 이를 악물며 소리치는 게 들렸다. 혹시 능력의 통제를 잃어버린 건 아닌가 하고 그를 살폈지만, 그 이상으로 이렇다 할 특이점이 보이지는 않았다.

“이 게이트 공략이 이렇게 오래 걸린 적은 처음인 것 같아요…….”

고은교와 함께 하나의 에스퍼에 대롱대롱 매달린 김민성이 신음 섞인 소리를 중얼거렸다. 그러다 에스퍼가 번개를 피하기 위해 펄쩍 뛰는 통에 혀를 깨물었는지 외마디 비명 소리를 내고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갈수록 우시현이 능력을 쓰는 빈도가 줄어갔다. 애초에 폭주 증상을 보였던 에스퍼가 멀쩡히 전투에 참여하는 것부터 이상했다. 이제 점점 능력에 대한 통제를 잃어가는 것 같은데, 저대로도 괜찮을까 싶었다.

‘괜찮지는 않겠지.’

능력이 강력한 에스퍼일수록 폭주 증상에 약했다. 자신의 손발처럼 사용한 능력이 사라지려는 것처럼 깜빡거리는데 이성을 잃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냐, 이 말이다.

다행히 우시현은 혹독한 상황에서도 머리를 잘 썼다. 뱀장어는 몇 번이나 늪지대 안으로 파고들려 한 탓에 온몸에 진흙이 가득 묻어 있었는데, 영리하게도 그것을 이용하여 뱀장어의 움직임을 막기 시작한 것이다.

능력은 최소한으로 사용하고, 공격력은 최대로 올린 효율의 극치였다.

더듬이와 네 다리가 굳어버린 뱀장어는 균형 감각을 잃고 바닥에 엎어졌다. 에스퍼들이 뱀장어의 뒤집힌 배를 향해 총공격을 기울이는 순간이었다. 뱀장어의 열린 입으로 산성액이 한 번 더 쏘아졌다. 그야말로 최후의 공격이었다.

산성액이 파도처럼 사방으로 덮쳐온다.

‘……이거 피할 수 있나.’

우시현의 능력이 멀쩡했다면 이 정도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겠지만, 우시현을 제외한 나머지 이능력자들은 단 한 사람을 믿은 죗값을 치르고 있었다.

비교적 뱀장어의 가까이에 있는 에스퍼들은 뱀장어의 뒤쪽으로 뛰어 들어가고, 나머지는 뱀장어가 파고들었던 딱딱한 지반 속으로 몸을 숨기는 가운데…….

“돼…… 됐다.”

가이드 둘을 건사하느라 이리저리 뛰어다닌 가여운 에스퍼는 그럴 수 없었고, 절체절명의 순간 사이좋게 부둥켜안은 셋을 막아선 사람이 있었다.

‘……되긴 뭐가 돼?’

“티…… 팀장님!”

김민성이 악 소리를 내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는 우시현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산성액을 쏟아내자마자 뱀장어가 죽은 탓에 그들 뒤로 우웅-하는 소리를 내며 임시 탈출 포털이 생성되었지만, 그런 것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우시현 몸 절반에 산성액이 온통 튀어 있었다. 보통 인간이었으면 그대로 녹아버렸겠지만, 우시현은 에스퍼였다. 그것도, 물을 지배하는 에스퍼였다. 기본적으로 독성이 있는 물에 내성이 있다는 소리다.

옷이 녹는 소리가 난다. 우시현의 옷을 녹이고 목 뒷덜미와 귀, 뺨, 팔다리의 살갗이 타들어 가는 고약한 냄새가 진동을 했다.

“우시현 에스퍼…… 침착하고 능력을 쓰세요.”

이건 고작해야 물이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산성 호수 전체를 물로 바꾸었던 녀석이, 제 몸에 쏟아진 산성액 따위를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고은교는 우시현이 고통에 이를 악물고 있는 것을 올려다보았다. 무언가 생각할 겨를 없이 우시현의 얼굴을 덥석 쥐자, 산성액이 튄 자리인지 손바닥이 미칠 듯이 아파왔다. 이대로 일 분만 더 우시현의 뺨을 쥐고 있으면 산성액이 살갗을 파고들어 뼈를 상하게 할 것이다.

“뭐 하는 거야? 물러서!”

“…….”

우시현이 화내는 게 그걸 반증했다.

빠르게 심장이 쿵쿵 뛰었다. 불안함 때문인지 고통 때문인지 모르겠다. 고은교는 우시현의 턱과 뺨을 움켜쥐고 입을 맞추며 가이딩했다. 단단하게 힘이 들어간 입술 사이를 핥았지만, 우시현은 너무 놀란 탓에 입을 벌리지도 못하는 듯했다.

“키스도 할 줄 몰라요?”

점막 가이딩으로 우시현의 폭주 증상이 가라앉자마자 손바닥의 고통이 따끔거리는 수준으로 바뀌었다. 동시에 그들을 덮쳤던 산성액이 힘을 잃고 중화되었다.

우시현은 줄곧 노력하고 있었던 거다. 그들에게 고통을 주는 이 빌어먹을 물질을 무해한 것으로 바꾸려고. 하지만 고은교의 손바닥에는 우시현의 뺨과 똑같은 상처가 생기고 말았다.

‘생각대로…… 점막 가이딩을 하면 효율이 무척 좋아지네.’

숨을 헐떡이는 우시현을 가만히 바라보던 고은교가 힘이 빠진 우시현의 입술에 천천히 입을 맞추었다. 얼어붙어 있는 혀를 건드리고, 입술 안쪽 점막을 훑으면 훑을수록 가이딩 기운이 우시현의 몸 안에 스며들어 그를 돕는 게 느껴졌다.

“아…….”

결국, 우시현이 고은교를 끌어안았다.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탈출 포털을 타고 넘어가자, 대기하고 있던 의료 팀으로부터 치료를 받았다.

“흉터가 완전히 지워질지는 미지수입니다.”

치료 에스퍼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확실히 흉은 희미해지긴 했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고은교는 자신의 손바닥에 남은 세 줄의 흉터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우시현이 덮어쓴 산성액은 우시현의 몸에 얼마나 깊은 잔해를 남겼을까.

“……그래도 에스퍼는 회복력이 좋지 않습니까?”

“에스퍼요?”

치료 에스퍼가 놀란 듯 눈을 치켜떴다. 그러더니 아, 하고 대답했다.

“다른 분 말씀이시죠? 에스퍼라고 해서 다를 건 없을 거예요. 피부 조직이 파괴되고 나면 회복할 수 없는 건 일반인이나 에스퍼나 마찬가지니까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조금 심란했다.

그렇게 잘생긴 놈이, 몸은 그렇다 쳐도 하필이면 얼굴에 흉터가 생겨도…… 되는 건가? 누군가 심혈을 기울여 매만진 것 같은 얼굴을 망가트린다는 것은 안타까움을 넘어 죄라도 지은 듯한 기분을 들게 했다.

‘국보를 훼손한 느낌인데.’

한참 동안 앉아 있던 고은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치료를 받고 있는 우시현을 찾아 돌아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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