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어? 형님!”
의료 팀과 민간인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가드들, 스태프들, 게이트 부산물을 채집하는 수많은 잡역부들 사이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당연하지만 그를 ‘형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김민성뿐이다. 자리에 멈춰 서자 김민성이 다가와 꾸벅 인사했다.
“수고하셨습니다!”
“김민성 가이드도 고생했어요.”
우시현이 그들의 앞을 막아섰을 때, 당연하지만 그의 능력은 제대로 제어되는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가이드를 보호하기 위해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어 보호막을 쳤고, 그래서 정작 그 본인은 제대로 보호할 수 없었지만, 그 순간 그의 능력은 제대로 발휘되어 고은교나 김민성, 그리고 그들을 절박하게 붙들고 있던 에스퍼는 털끝 하나 상하지 않고 멀쩡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워낙 위험한 상황이었는지라 의료 팀은 그들의 상태가 괜찮은지 확인하고 싶어 했다.
“그거 아세요? 머리카락이 날아간 건 초능력으로도 치료할 수 없대요.”
목소리를 낮추며 김민성이 속삭였다. 정승환을 가리켜서 하는 말이었다. 그들은 단기간 탈모가 된 에스퍼 둘을 잠깐 추모하는 시간을 가졌다.
“지금 퇴근이시면 같이 저녁 먹어요! 센터 근처에 맛집이 은근히 있거든요.”
제때 끼니를 챙기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그는 할 일을 다 마치고 식사를 하는 편이었다.
“다음에 먹도록 해요. 그보다, 우시현 에스퍼는 어디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팀장님이요?”
김민성은 우시현과 고은교의 사이가 별로 좋지 않다는 것 정도는 눈치껏 알고 있었다. 그래도 마지막에 우시현이 그들을 지켜 주었으니 고은교가 감사 인사를 하러 간다고 생각하는 듯,당황한 기색을 띠면서도 순순히 우시현의 위치를 알려 주었다.
‘뭐…… 비슷하긴 하지.’
굳이 우시현을 찾아가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우시현의 체내 위험률 수치 상태를 파악하는 것, 그리고 우시현이 얼마나 화가 났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좋고 싫음을 떠나 우시현이 그에게 가이딩이 필요하다고 호소한 이상, 그리고 자신이 그 에스퍼에게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것을 알아버린 이상 첫 번째 과정은 앞으로도 꾸준히 해야 할 일에 속했다.
차라리 몰랐으면 상관없었겠지만, 우시현은 자기 입으로 고은교가 아니면 가이딩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대단한 자존심을 접고 게이트가 끝난 뒤 센터에서 가이딩을 해 달라고 요청하기까지 했다.
그는 에스퍼가 그럴 수밖에 없는 부당함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다. 만약 가이딩이 없었더라면 우시현이 고은교에게 숙이고 들어올 날이 과연 오기나 했을까?
‘아니.’
그는 우쭐하지도 않았고 복수심에 미소 짓지도 않았다. 대신 깊은 생각에 잠겼다.
과거, 장이주였을 때 고은교는 수준 높은 ‘리듬 게임’이 가능한 최상급 가이드였다. 따라서 수많은 에스퍼들이 가이딩을 요청했고 장이주가 아니면 안 되는 이유에 대하여 토로했다. 처음에는 이 많은 에스퍼들이 자신을 원한다는 사실에 들떴고 인정받는 것 같아 기뻤지만, 그 수가 너무 많아지자 금세 기가 질려 버렸다.
알고 봤더니 리듬 게임이 가능한 상급 가이드들은 죄다 그런 과정을 거친다고 했다. 가이딩은 사람의 기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는 곧 몸살이 날 거라며, 선배 가이드로부터 어떤 에스퍼부터 가이딩을 해 주어야 하는지에 대해 배웠다. 그 과정에서 그는 정말로 자신이 아니면 안 되는 몇 명의 에스퍼들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또한 그는 ‘리듬 게임’이 가능한 최상급 가이드로서 긴급 구조를 몇 번씩 했는데, 이때 그는 매칭률 맞는 가이드를 만나지 못한 에스퍼가 얼마나 힘든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단순히 가이딩을 받지 않으면 폭주한다는 게 활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닌, 서서히 자신에 대한 통제를 잃어버리고 미쳐 가는 과정이 주는 고통에 대해서 체감하게 된 것이다.
그는 자신이 가이드로 태어난 이상, 죽을 때까지 누군가를 구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자신의 기력이 허락하는 한 자신이 필요한 게 확실하다면 그게 누구든 가이딩을 해 주겠노라 다짐했다.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서는 그런 결심이 필요했다.
다시 말해, 그건 누군가를 떠맡는 일이 익숙하다는 의미였다.
에스퍼로서 그 사실이 민망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시현이 저자세로 나와도 되지 않아도 되도록 최대한 비지니스적으로 굴면 된다. ‘고은교’가 과거에 한 짓이 있으니…… 그건 오히려 서로에게 배려가 되어 줄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바로 한 시간 전, 그는 뜻하지 않게 예전 ‘고은교’가 우시현에게 한 짓을 그대로 답습해 버렸다. 우시현을 구하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동의도 구하지 않고 그에게 긴급-접촉 가이딩을 했다는 의미였다.
‘솔직히 머리가 있으면 오히려 고맙게 생각하겠지만.’
일반 가이딩으로는 40시간 뒤에나 효과가 나타난다니, 어쩔 수 없이 점막 가이딩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반쯤은 도박이었다. 그때, 드라이밸리 게이트에서 우시현이 시범 삼아 입술을 비볐을 때 그는 가이딩하고 있지 않았다. 때문에 정말로 점막 가이딩의 효율이 좋은지 좋지 않은지에 대해서는 미지수였다.
하지만, 그 결과 긴급 상황의 에스퍼를 구조해 팀원 둘과 스스로를 구해냈다. 그거면 된 것 아닌가.
‘한 대 정도는 때려도 봐주자.’
마지막에 우시현은 고은교를 힘껏 끌어안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이 상황이 전부 고은교의 탓이라며 화를 내기엔 애매한 상황이지 않느냐고 고은교는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최초로 합이 맞는 가이딩을 했을 때, 그 냉철한 이승우도 완전히 고장 났다는 사실을 슬쩍 모른 척하며 고은교가 컨테이너 박스의 문을 열었다.
“뭐야.”
우시현은 문과 마주보는 방향으로 앉아 있었다. 헝클어진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형형한 눈빛을 쏘며 녀석이 말했다.
‘사람이 들어오는데 뭐야가 뭐냐, 뭐야가…….’
하여간 저 말투는 생사를 넘나들어도 변하질 않는다.
“접니다. 치료는 끝났습니까?”
“…….”
들어오는 사람이 누구인지 진작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우시현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보스 몬스터를 잡기 직전 꽤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기억하고 있던 고은교로서는 아무래도 ‘역시…….’ 싶은 생각이었다.
‘아주 단단히 토라졌군.’
고은교가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키스해서 빡치긴 빡치는데, 그때 당시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입을 다문 듯했다.
최소한 눈이 찢어져라 노려볼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정도로 인간 말종은 아닌 것 같았다. 의외로 고쳐 쓸 재목은 되는 건가.
‘아니지, 내가 무슨 생각을.’
무심코 하기에도 별로 좋을 것 없는 생각이다. 그는 재빨리 머리를 휘휘 저어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냈다.
빨리 용건을 말하고 나가는 게 자신을 위해서도, 우시현을 위해서도 좋을 것 같았다.
“게이트 끝나고 가이딩을 해 주기로 했잖습니까.”
“나중에.”
“예?”
바로 가이딩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안 좋은 상황인가 싶어 우시현을 빤히 쳐다보았지만, 아무리 봐도 거동이 불편한 수준의 부상을 입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걸 잘 알고 있는지 우시현이 고은교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얼씨구?’
“아, 씹. 나중에 하면 되잖아.”
좋은 마음으로 찾아왔는데 욕을 먹으면 성인군자라도 화가 나기 마련이다. 그때 말랑말랑하던 분위기는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그는 한숨을 참으며 팔짱을 꼈다. 어차피 여기에서 우시현에게 그놈의 말본새를 고치라고 해 봤자 들어먹지도 않을 것이고.
‘누구는 입술을 비비고 싶어서 비빈 줄 아느냐고.’
저 태도가 민망해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화가 나서 그러는 건지 알 수 없지만 가이딩을 지겨운 학교 숙제처럼 대하는 놈을 참아 줄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됩니다. 의무는 아니니까.”
“…….”
“그럼 쉬세요.”
단호하게 말하며 돌아서자, 놀란 듯 숨을 집어삼키는 소리가 들린다. 그게 얼마나 바보 같은지 우시현은 잘 모를 것이다. 무슨 이유로 뻗댔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게 본심이 아니라는 건 알겠다. 고은교는 웃고 싶은 건지 한숨을 쉬고 싶은 건지 모를 기분을 참으며 컨테이너 박스를 빠져나갔다.
우시현이 뒤를 따라온다.
너무 단호하게 굴자 얼결에 쫓아오는 것 같았는데, 자신의 모습이 바보 같다는 걸 깨달았는지 우시현이 뭔갈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고은교.”
그래, 어디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나 보자. 터벅터벅 앞으로 걸어 나가던 고은교가 기다렸다는 듯 홱 돌아보았다. 한 번쯤은 제 손을 뿌리칠 줄 알았는지 당황한 눈빛이 머리칼 사이로 보인다.
고은교는 아무 말 없이 우시현을 쳐다보았다. 할 말이 있으면 하라는 태도였다.
그 말 없는 시선에 우시현이 고개를 한 번 갸웃하더니, 떨떠름한 기색으로 덧붙인다.
“……교수님?”
……아니, 누가 교수님이라고 불러 달랬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