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콜 가이드-89화 (89/132)

#89

심지어 교수를 그만둔 지 벌써 두 달이나 지났다.

‘교수였을 때 교수 대접을 해 줬으면 말을 안 해.’

그때 일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난다.

“그냥 평소에 하던 대로 하세요.”

하도 어이가 없어서인지 목소리에서 힘이 빠졌다. 우시현 역시 과하게 눈치를 봤다는 걸 아는지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칼을 털었다.

고은교는 우시현이 말하기를 기다렸지만, 막상 사람을 불러 놓고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이 지지부진한 상태를 이어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자신이 말하고 치우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좋습니다. 우시현 에스퍼가 할 말이 없다면 내가 말하겠습니다.”

“…….”

“우시현 에스퍼는 나 말고 가이딩이 가능한 가이드가 없다고 했어요. 맞습니까?”

“……그래.”

입이 딱 붙은 줄 알았더니 그건 또 아닌 모양이다.

“나라고 해서 우시현 에스퍼의 편의를 봐주는 게 좋기만 한 건 아닙니다.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편한 사이는 아니니까요. 하지만 어쨌든 우시현 에스퍼는 가이딩이 필요하고, 나도 우시현 에스퍼가 일상생활에서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어느 정도는 협조할 생각이에요.”

“…….”

“긴급한 상황이 아니면 대부분은 사전에 접촉 가이딩 정도로만 할 테고, 앞으로는 상호 간에 불필요한 접촉은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내가 예전처럼 우시현 에스퍼에게…… 그런 마음이 있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해했습니까?”

이 소리를 몇 번이나 하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고은교는 인내를 가지고 재차 설명했다.

우시현은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불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알아.”

“예?”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우시현을 훑어보았다.

‘영…… 이상한데.’

아까처럼 틱틱거리던 태도는 어디로 가고, 좀 위축되어 있다고 해야 하나? 시무룩한 느낌이 있다고 해야 하나.

“이제 나한테 관심 없는 거…… 안다고.”

“…….”

자신감 넘치던 녀석이 이렇게 나오니까 조금 이상했다. 그래도 이해력이 아주 떨어지는 녀석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최소한의 양심은 있는 것 같다고 해야 할지.

그때, 우시현이 발끝으로 땅을 발로 차며 말했다.

“얼굴이 망가졌으니까.”

“…….”

순간 그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나를 좋아하지 않을 거잖아.”

그제야 고은교는 우시현이 왜 앞머리를 일부러 늘어지게 했는지 알아차렸다. 최대한 얼굴을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고은교는 우시현의 찡그린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밝은 햇빛 아래에서 보니 상처가 더더욱 잘 보였다. 지난 전투로 인해 이리저리 산성액이 튀어 군데군데 흠이 난 이마와 뺨, 턱, 그리고 목으로 이어지는 길게 패여 있는 상처가.

심지어 우시현의 뺨에 세 줄로 난 흉터는 고은교의 손바닥에 똑같이 새겨져 있었다. 우시현이 정상적으로 능력을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의 얼굴을 양손으로 붙들고 점막 가이딩을 시도했기 때문이었다.

“……어디 좀 봅시다.”

고은교는 저도 모르게 우시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우시현은 순순히 허리를 굽혀 고은교가 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얼굴을 확인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손가락에 감기는 머리카락이 너무 부드러워 속이 아렸다.

대체 무엇이 우시현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오로지 고은교가 우시현의 얼굴을 숭배했다는 이유로 이렇게 되어 버렸다기엔 부족한 느낌이 있다. 그보다는 어렸을 때부터 이 얼굴로 인해 수많은 갈등을 겪어 자신의 얼굴이 가진 파급력에 파묻히게 되었다는 것이 더 적절한 이유이리라.

“며칠만 지나면 이거 하나 빼고는 다 낫는다고 하니까……. 뭐, 그건 밴드로 가리면 되잖아.”

우시현이 변명하듯 재빠르게 읊조렸다.

고은교를 치료해 주었던 에스퍼는 일반인이나 에스퍼나 피부 조직이 완전히 파괴되면 흉터가 지워지지 않는다고 했는데, 우시현은 물 에스퍼여서 그런지 남들과는 달리 피해를 입은 정도가 약한 모양이었다.

가리킨 곳을 보니 고은교가 쥐었던 뺨이었는데, 아무래도 뺨은 얼굴의 다른 부분에 비해 지방으로 이루어진 곳이라 상처가 남으면 사라지지 않았다. 하필이면 얼굴 정중앙에 생기는 흠이라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중에 가이딩하자고 했습니까?”

조용한 목소리로 묻자, 우시현이 눈동자를 위로 흘긋 들어 올려 고은교의 표정을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 태도에서 어렸을 적 착했던 소년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건 지금의 우시현과 겹쳐지며 애틋한 괴리감을 불러일으켰다.

얼굴과 가이딩은 상관없다고 말해 주고 싶지만, 그래도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말문이 막혔다. 자신이 그렇게 말한 순간부터 눈앞의 에스퍼는 어쩔 수 없이 기대하게 될 테니까.

“많이 아팠어요?”

그럼에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우시현의 얼굴에 지워지지 않는 흉터를 만든 건 바로 자신이었다.

“아니.”

그렇게 대꾸하는 우시현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하지만 분명 그 안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소용돌이치고 있을 터였다.

고은교의 손끝이 가로로 난 세 줄의 흉터를 더듬었다. 우시현은 고은교의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로써 얼굴을 다쳐 속상했던 마음이 점점 나아지고 있는 것 같았다. 이대로 시간을 조금만 더 보낸다면, 우시현은 고은교가 흉터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그는 너무 늦지 않게 제 손을 떼어 냈다. 그러자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우시현의 눈썹이 엷게 찌푸려졌지만, 그 아래 모양 좋은 입술은 여전히 다물려 있었다.

“그러면 나중에…… 필요할 때, 가이딩 요청을 하세요.”

마땅히 들려올 대답을 기다렸지만 우시현은 얼른 대답하지 않고 머뭇거렸다. 하지만 결국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인다.

고은교는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아마 우시현은 예전에 폭력을 휘두른 것을 떠올리고 고은교에게 ‘my’ 목록에 넣어 달라는 말을 하지 못하겠다는 양심적인 생각을 한 건 아닐 것이다. 본래의 ‘고은교’가 우시현에게 했던 짓도 있으니 그럴 만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을뿐더러 그렇게 조심스러운 성격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얼굴 때문이라고 생각하겠지.’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우시현은 상식과 동떨어져 있었다. 정확히는 사람들이 자신을 좋아하는 이유가 외모 때문이라는 것을 가혹할 정도로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외모가 너무 강렬하기 때문에, 우시현이 가진 모든 장점을 한 가지가 덮어 버린 것이다.

우시현은 단순히 고은교의 기호에서 벗어났다는 생각 때문에 아무 말도 못 하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게 너무 잘 보였다. 그는 속으로 탄식했다.

“우시현 에스퍼.”

고은교가 우시현을 불렀다. 하지만 우시현은 대답도 하지 않았고, 고은교의 눈을 마주 보지도 않았다.

“…….”

이름을 부르면 바로 대답을 하는 누구와 상당히 비교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제 고은교는 우시현이 사람을 대하는 데 상당히 서툰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눈치는 빠르지만, 사회성은 기가 막힐 정도로 없고, 자존심은 세지만 자존감은 낮은…….

‘하…….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다.’

불쌍하다는 이유로 에스퍼를 거두는 건.

어쨌거나, 사람을 갱생시키기 위해서는 한 번쯤 세상이 자신에게 아무 이유 없이 친절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 주어야 하는 법이었다.

“우시현 에스퍼만 싫지 않다면 최소 며칠에서 최대 몇 달 동안…… 정확한 기간을 정해서 내 목록에 들어오겠어요?”

“……뭐?”

시선을 피하기 위함인지 고은교의 어깨 너머를 가만히 응시하던 우시현이 놀란 듯 고은교를 퍼뜩 쳐다본다.

당연하지만 고은교는 우시현이 좋다라고 말하기 위해 황급히 벌어지던 입술에 힘을 주는 걸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왜?”

자신을 영 내키지 않아 하던 고은교의 모습이 떠올랐는지 되묻기까지 한다. 기간제를 조건부로 달았음에도 얼떨떨할 정도로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좀 이상했다.

“어쨌든 나를 지키려다 다친 거니까요.”

“…….”

“며칠 동안만이라도 괜찮으니 체내 위험률 수치를 낮춰 두면 우시현 에스퍼에게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상처도…… 사라질지도 모르고.”

완전히 납득이 되는 이유는 아니었는지 우시현이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고은교는 설명해 둔 것 외에 그 어떤 변명도 덧붙이지 않았다. 우시현에게 찾아온 이 행운의 전말이 그저 완전한 호의라는 듯. 최초로 남을 위해 다치는 것을 무릅쓴 그의 희생이 불러온 나비 효과일 뿐이라는 것처럼.

“그건…… 그러니까…… 아무것도 아닌, 아니,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고…….”

그는 우시현이 ‘자신은 그저 에스퍼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말을 하려다 실패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런 말을 구변 좋게 할 수 있는 녀석은 아니었다.

“물론 싫으면 안 해도 됩니다.”

“그게 아니라…….”

“그럼, 그렇게 하겠어요?”

워낙 잘생긴 녀석이 복잡한 표정을 짓자, 얼굴에 난 상처가 어우러지며 사연 있는 미인의 애처로운 정취가 물씬 풍겼다.

물론 고은교는 우시현의 표정에서 솔직한 의도를 대강 읽었다.

‘내가 순진한 걸 기뻐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걱정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단 거냐.’

하긴, 원래 ‘고은교’는 오냐오냐 자란 도련님이었으니 지나치게 순진한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겠지. 미안하지만 번지수를 잘못 짚었다. 계속 책임지기 싫어서 그를 반쯤 고쳐 놓고 방생하겠다는 의도로 기간을 정하자고 말한 것이었으니까.

‘그때가 되면 나 말고도 매칭률이 얼추 맞는 가이드가 생길지도 모르고…….’

고은교는 우시현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걸 바라보며 생각했다.

“좋습니다. 오늘은 이만 퇴근하고, 내일 센터에서 등록 서류를 제출하도록 하세요.”

“너는?”

“저는 돌아가는 길에 제출하고 가겠습니다.”

굳이 자신은 언제 서류 제출을 할지 물어보는 게 꼭 누구와 닮았다. 고은교는 가벼운 미소를 머금은 채 우시현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다음에 봅시다. 오늘 수고했어요.”

그리고 몸을 돌린 순간, 고은교는 그들을 쭉 지켜보고 있던 남자를 발견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다가와서 고은교의 앞을 가로막는다. 이 남자는 공교롭게도 고은교가 방금 막 떠올렸던 그 ‘누구’였다. 사실, 요 며칠 동안 고은교는 이 남자를 종종 떠올리고는 했다.

이 뜻밖의 등장에 고은교는 깜짝 놀라 걸음을 멈췄다.

“교수님.”

그랬다. 이승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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