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콜 가이드-90화 (90/132)

#90

그제야 고은교는 이승우가 ‘저를 부르셨어야죠.’라고 한 말의 의미를 제대로 깨달았다. 이승우는 마음만 먹으면 뒤를 따라다니고 있다는 걸 고은교가 모를 수 있게 할 수 있었다. 그때 고은교가 이승우를 발견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이승우가 고은교 앞에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우시현이 자신의 어깨 너머를 자꾸 쳐다보던 이유는 이승우 때문이었던 건가.

“……승우 군.”

고작 몇 주 보지 못한 것인데도 아주 오랫동안 보지 못한 느낌이었다. 고은교는 당황한 채로 굳어 이승우를 올려다보았다.

참을성 있게도 이승우는 우시현과 고은교가 대화를 주고받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시현과 고은교의 관계를, 정확히 말하자면 고은교가 우시현에게 쏟아내는 열성을 관조하는 것이 이승우의 오랜 처지였다.

얼어붙은 고은교를 내버려 두고, 이승우는 우시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말하건대 그것은 자신의 친구를 보는 시선이 아니었다. 누구보다 강력해진 자신의 연적을 경계하는 것에 가까웠다.

눈은 여전히 우시현을 향해 있는 채로 이승우가 물었다.

“대화는 끝나셨나요?”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공손히 굴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이승우의 어투는 매우 차분했다. 그에 비해 속은 부글거려, 결국 돌아서는 고은교를 잡아채고야 만 것이 실수라면 실수였다. 우시현은 결코 그들이 순조롭게 대화하도록 놔두지 않을 테니까.

그래, 우시현……. 우시현과 맺어지는 것은 고은교의 오랜 열망이었다. 그걸 아는데도 그 순간을 목도하자 속이 미칠 듯이 배배 꼬였다.

그런 이승우의 생각은 하나도 모르는 채로, 고은교는 대답하는 대신 도리어 질문을 던졌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습니까?”

그러자 우시현을 바라보던 이승우의 시선이 고은교에게로 옮겨 온다. 그 시선엔 속을 뜨끔거리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고은교는 애써 이승우가 제 발로 목록을 떠났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음…… 다섯 시간 전부터요.”

살짝 짓는 눈웃음이 묘한 그리움을 자극한다.

그나저나 이승우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쓰레기장 게이트를 여섯 시간 가까이 걸려 클리어했으니, 그는 현장 이능력자들이 게이트에 들어가고 약 한 시간 뒤 도착했다는 말이 된다.

‘……그럼 그때 들은 목소리는 착각이었던 건가.’

분명 게이트에 들어간 직후, 그는 이승우의 목소리를 들었다. 자신 없이는 위험한 곳에 가지 말라고 말하는 듯한 절박한 목소리를.

“뭐야. 정리했다며?”

그때 우시현이 끼어들었다. 다분한 의도가 보이는 타이밍이었지만, 고은교는 미처 알지 못했다.

“……나는 그런 줄 알고.”

멍하니 중얼거리는 고은교의 너머에서 이승우는 우시현의 말을 똑똑히 들었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어째서 고은교가 우시현에게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이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워커홀릭은 제 주변을 맴도는 가장 강한 에스퍼에게 손을 뻗고 만 것이다.

우시현은 우시현대로, 넋이 빠진 채 이승우를 올려다보는 고은교의 모습에서 알 수 없는 위기감을 느꼈다.

그렇게 생각이 흐르자마자 우시현은 행동했다. 말보다 손이 먼저 나가는 인간다웠다. 고은교는 자신의 팔을 잡고 끄는 손길에 순간적으로 휘청했고, 동시에 이승우가 팔을 잡아주었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우시현과 이승우, 두 사람 사이에 고은교가 붙들려 있는 형태였다.

“놔.”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이승우가 우시현을 향해 말했다. 그러자 우시현의 잘생긴 얼굴 위로 호전적인 미소가 피어났다.

“내가 왜?”

“몰라서 물어?”

우시현이 잡아당긴 덕에 고은교가 넘어질 뻔한 걸 모르냐는 듯이, 이승우가 고은교의 팔을 잡고 있는 우시현의 손을 눈짓했다.

물론 우시현은 만만찮았다.

“니가 놓는 게 맞지 않냐? 가이드 혼자 게이트 안에 들어가게 한 새끼가 누군데.”

“…….”

“한번 버렸으면 끝난 거지, 왜 구질구질하게 다시 줍고 그래.”

그 말에 황당해진 것은 고은교였다. 애초에 그는 혼자 게이트에 들어갔다 나온 게 아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신을 제외한 아홉 명의 팀원들과 함께 쓰레기장 게이트를 클리어했다. 게다가 버리다니? 그 단어가 주는 수치심에 그야말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잠깐…… 우시현 에스퍼. 사람은 쓰레기가 아니에요. 도대체 뭘 버리고 줍고 한단 겁니까?”

그렇게 말하자마자 팔을 쥔 악력이 세졌다. 우시현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간 것이다. 동시에 그가 으르렁거렸다.

“넌 도대체가 사람이 왜 이렇게 가벼워? 그새를 못 참고 홀랑 다른 새끼한테 넘어가?”

“아프니까 좀 놓고 말하세요.”

“아프시다잖아.”

그 말에 우시현은 코웃음 쳤고, 보란 듯이 고은교의 팔을 계속 붙잡았다.

“어쩌라고.”

“우시현……. 철 좀 들지.”

그러다간 미움을 사게 될 거야. 이승우가 말하려는 바는 명백했다. 물론, 우시현은 이승우의 충고 어린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철은 씨발. 너나 놓지 그러냐?”

그래, 혼자서는 죽어도 못 놓겠다 이거지. 중간에 낀 고은교가 타협안을 내놓았다.

“이승우 에스퍼도 놓으세요.”

“…….”

“…….”

좋아. 이놈이고 저놈이고 말을 듣는 놈이 없군.

고은교가 천천히 심호흡했다. 두 에스퍼 모두 가늘게 흐르는 호흡 소리를 들었지만, 서로 신경전을 벌이느라 고은교의 말은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이승우, 우시현.”

단단히 굳은 얼굴로 고은교가 망나니 둘을 호명했다.

“당장 안 놓으면 앞으로 얼굴 볼 일 없을 줄 알아.”

그러지 않아도 은근히 이쪽을 힐끔거리는 사람들이 신경 쓰였다. 파괴력 강한 우시현의 외모도 외모지만, 에스퍼 둘 사이에 끼어 있는 가이드란 몹시 흥미를 자극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 가이드가 바로 자신이라니, 정말이지 쪽팔려서 미칠 지경이었다.

고은교의 서늘한 협박에 두 에스퍼가 머뭇거리다 손을 놓았다. 물론 언제라도 여차하면 다시 잡을 수 있도록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하…….”

빌어먹을, 얼마나 세게 움켜쥐고 있었는지 양쪽 팔이 다 욱신댔다.

‘하나씩 해결하자. 하나씩.’

자신의 팔을 잠깐 주무른 고은교가 우시현에게 홱 돌아섰다.

“우시현 에스퍼, 내가 항상 에스퍼들에게 연애 감정을 갖고 있는 줄 압니까?”

아무래도 아까까지 동정심을 발휘한 상대가 이딴 식으로 나오는 게 가장 참을 수가 없었다. 이 괘씸한 녀석. 고은교가 힐난하는 눈초리로 우시현을 노려보았다.

“아무리 이승우 에스퍼와 우시현 에스퍼가 동기 사이라지만, 방금 그 말은 실례입니다. 이승우 에스퍼에게 사과하세요.”

솔직히 말해 매섭게 대치하고 있는 에스퍼에게 사과하라는 소리를 들었으니 우시현이 화를 낼 줄 알았다. 하지만 우시현의 반응은 예측과 조금 달랐다.

“아, 나는, 그…….”

‘……귀가 왜 빨개져?’

자신에게 살짝 닿는 떨리는 시선. 그리고 동시에 자신만만한 표정.

고은교는 예전의 ‘고은교’가 우시현에게 가졌던 ‘연애 감정’이 워낙 명백했고 모두에게 알려진 사실이라 별생각 없이 꺼낸 말이었다. 예전의 ‘고은교’는 자신이 아니기도 했으니, 타인의 감정을 이야기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문제는 우시현이 그 말을 ‘내가 너를 예전에 좋아했다’는 말로 이해하고 받아들였다는 것에 있었다.

“……미안하다?”

달아오른 귀를 매만지며 우시현이 씩 웃었다. 고은교는 우시현이 이승우에게 미안한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없이 즐겁게 사과하는 걸 멀뚱히 지켜보았다.

“…….”

사과라도 하는 걸 대견하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그에 비해 이승우의 표정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이를 악문 것 같다고나 할까. 말없이 우시현을 쳐다보는 이승우의 눈빛은 그야말로 드글드글 끓고 있었다.

‘……사과보다는 약 올리는 것 같기는 해.’

애초에 우시현에게는 거의 기대가 없다.

“그리고 이승우 에스퍼…….”

고은교는 가벼운 한숨과 함께 이승우를 바라보았다.

이승우에 대하여서는 이미 생각한 바가 있었다. 이승우는 제 이름이 불리자, 사람을 잡아먹을 것 같은 시선 그대로 고은교에게 눈을 돌렸다.

아무 말 없이 눈을 마주치고만 있는 그를 보며, 고은교가 숨을 골랐다.

“음…… 잠깐 어디 가서 이야기할까요?”

“아니. 그냥 여기에서 해.”

재빨리 우시현이 끼어들었다.

“저 새끼 눈 돌아갔는데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따로 이야기해?”

“하지만 이야기가 길어질 수도 있고…….”

침착하게 설명하려고 하는데, 이승우가 불쑥 중얼거렸다.

“시현이가…… 많이 달라졌네요.”

“…….”

그 말을 듣자 고은교는 부당하게도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먼저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고, 돌연 목록을 탈퇴한 건 이승우였는데 왜 애먼 자신이 바람……을 핀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냐고.

“알면 여기에서 말하든지, 아니면 꺼지든지.”

우시현이 기세등등하게 뱉었다. 썩 곱다고는 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또 일리가 있는 말이라 골치가 아프다. 심지어 이승우는 운명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매칭률이 잘 맞는 에스퍼라 더욱 그랬다. 아무래도 온순하게 매달리러 왔다기보다는 다시 목록을 되돌려 달라고 협박할 것 같은 느낌이랄까.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이승우가 묵묵히 고은교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건 마치 우시현이 뭐라고 하든 말든 고은교가 하자는 대로 하겠다는 태도처럼 보였다.

“이곳에서 말해도 괜찮습니까?”

“네.”

순순한 대답이 바로 돌아왔다. 고은교는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열었다.

“……내가 승우 군에게 할 말은 별로 없어요. 승우 군에게는 무슨 일이든 혼자 하지 말라고 해 놓고 내 일에 끼어들 여지를 주지 않았던 건 미안합니다. 하지만 나는 필요하다면 앞으로도 계속 다른 에스퍼에게 가이딩을 해 줄 거고, 내 목록을 채울 겁니다. 그건 내 일이에요.”

“…….”

“그리고…… 사실 승우 군이 우시현 에스퍼뿐만이 아니라 다른 에스퍼라면 누구든지 싫어했다는 걸 알아요. 매칭률 높은 가이드에게 독점욕을 느끼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것 때문에 내 목록을 탈퇴할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았다면…… 앞으로도 각자의 길을 가는 게 더 나은 방법일 수 있을 겁니다.”

이승우도 아닌 주제에 우시현은 옆에서 숨죽이며 고은교의 말을 듣고 있었다. 의외로 고은교가 단호하게 나온다고 생각했는지 꽤 안심한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그에 반해 이승우는 어쩐지 묘한 표정이었다.

고은교의 말을 끝까지 들은 뒤, 그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알고 계셨군요?”

무엇을?

의아한 듯 이승우를 보자, 그가 부드럽게 덧붙인다.

“제가 교수님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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