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콜 가이드-91화 (91/132)

#91

덤덤한 말투였지만 내용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고은교는 이 난데없는 고백에 몹시 당황했다. 이승우는 감정적인 것과 거리가 멀었고, 드물게 감정적으로 군다 한들 이렇게 직접적으로, 단숨에 말하는 방식을 선호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까 우시현과 다투면서 자극받은 건가.’

고은교는 이승우를 주의 깊게 보려 노력했다. 하지만 이 남자는 우시현과 달리 제 속내를 전혀 드러내지 않는 타입이었다. 그린 듯 단정한 얼굴은 언제나 그랬듯 고은교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이승우 에스퍼.”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이승우는 차분하게 생각할 줄 아는 녀석이니 홧김에 고백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 식으로 얼렁뚱땅 고백한 걸 고은교가 받아 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을 테고. 그리고, 이 태도는 명백히 계획된 것처럼 보였다.

이승우는 정말로 고은교에게 부딪혀 올 생각이다. 그것도 정면으로. 그 짧은 공백기 동안 고은교에게 마음이 생겼다고 인지하고, 고민 끝에 돌아온 게 분명했다.

‘매칭률이 너무 좋아서…… 착각한 건가.’

손이 닿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고 그 가이드를 잃을까 봐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따라다닌다. 게다가 가이드를 소유하고 싶다는 독점욕은 어떻게 보면 사랑처럼 보였다.

자기 가이드를 처음 만난 에스퍼라면 누구나 한 번쯤 하는 착각이었다. 그건 순수해 보이기도 했고, 안타깝게 보이기도 했다.

“혼란스러운 건 이해하지만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곤란해요. 그건…….”

차마 정면에서 이승우의 감정을 부정하지 못한 고은교가 입을 다물었다. 이승우는 고백하기로 마음먹은 남자답게 몹시 집중력 있는 태도로 눈을 마주쳐 왔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그게 뭐든 말해 보라는 듯.

“야, 이승우.”

그때, 우시현이 기가 차다는 듯 읊조렸다.

“너 뭐 하자는 거냐?”

“끼어들지 마.”

우시현은 이승우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피식 웃었다. 애초에 그는 누군가 자신에게 경고한다고 해서 머뭇거리는 인간이 아니었다.

“내가 뭘 모르고 하는 소리인 것 같나 본데, 저 얼빠진 게 니가 정리했다는 이야기를 했을 정도면 뻔하지.”

“…….”

“쟤 목록에 니가 있었으면 넌 진작 이 게이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을 거야. 니 가이드의 게이트 일정을 열람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는 걸 잊어버릴 새끼가 아니니까.”

그 말에 이승우의 얼굴이 대단히 차가워졌다. 우시현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이죽거렸다.

“지 가이드가 게이트에 들어가는지 안 들어가는지도 몰랐으면서 이제 와서 좋아해? 염치가 없어도 정도가 있지. 씨발, 장난하냐?”

“장난을 한 건 너겠지.”

이승우가 우시현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그깟 B급 게이트 하나 클리어하는 데 힘조절을 못해서 만신창이 수준이 됐는데, 그 안에서 교수님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 만하다. 아니면 동정심이라도 받으려고 그 지경이 됐거나.”

“……뭐?”

덧붙이는 말 하나하나가 빈정거리는 어투였다. 우시현은 황당한 듯 입을 벌렸지만, 이승우는 여전히 손이 벨 정도로 냉담한 표정이었다…….

고은교는 우시현이 쓰레기장 게이트에서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알고 있었으므로, 이승우의 비난에 약간의 책임을 느꼈다.

“승우 군, 우시현 에스퍼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승우 군이 목록에서 탈퇴한 건 승우 군 마음이니 그걸 탓하고 싶지도 않고. 그러니 내가 게이트에 들어갔다고 해서 신경 쓸 필요는 없습니다.”

“네. 들어갈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보통의 가이드는 제 목록에 에스퍼가 없다면 혼자서 게이트에 들어가지 않으니.”

이승우는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고은교의 말을 받아 대답했다. 마치 오랫동안 그 일에 대하여 고민해 온 사람 같았다.

이쯤 되니 고은교야말로 어안이 벙벙해진다.

“무슨……. 하지만 다른 에스퍼를 목록에 넣을 수도 있었잖습니까?”

“그러려면 센터에 서류를 제출해야 하잖아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제가 교수님 뒤를 따라다니는 걸 워낙 싫어하시니, 센터 사람 몇 명쯤은 매수해도 괜찮지 않나요?”

“그……렇지만.”

너무 황당한 말이라 생각할 새도 없이 대답이 흘러나갔다.

“서류를 거절해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그냥 교수님이 에스퍼를 목록에 등록하면 그걸 좀 알려 달라는 정도인데.”

“…….”

그랬다.

보통의 현장 가이드는, 당연히 ‘my’ 목록의 에스퍼와 동행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제 목록에 있는 에스퍼만이 자신을 가장 우선순위로 지켜 주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my’ 목록의 에스퍼가 받은 콜이 센터에서 배급해 주는 게이트보다 훨씬 질이 좋았으므로 최하급 게이트를 전전하고 싶은 것이 아니면 제 에스퍼와 동행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고은교의 경우는 일반적인 경우와 완전히 달랐다. 일단 그는 실적을 내는 일이라면 그게 어떤 등급이든 괘념치 않았고, 우시현에게 유의미한 매칭률을 가지고 있는 가이드이기도 했다. 센터의 배려가 아니었다면 이번 B급 게이트 작전에 참여할 수 없었을 터였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이승우는 제 나름대로 빠짐없이 고은교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이야기인데.

“이럴 거면 왜…….”

왜 ‘my’에서 탈퇴한 거지?

“언제까지 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어줄 생각이야?”

우시현이 신경질을 내며 고은교의 팔을 잡아당기려 했지만, 이번에는 이승우가 시의적절하게 우시현과 고은교 사이를 갈랐다.

“넌 교수님 말 중간에 끼어드는 못된 버릇 좀 고쳐야겠다.”

그저 싸늘하게 한마디 던진 것뿐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이 말에는 억눌리다 못해 진득해진 감정이 스며있는 듯했다.

“…….”

이승우의 비호를 받으며 고은교는 천천히 자신의 생각을 점검했다.

그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이승우는 허점이 있는 줄 모른 채 고은교를 내내 빈틈없이 감시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것도 본인의 손으로 이어 놓은 고은교와의 인연을 스스로 끊어낸 뒤에.

‘도대체 왜?’

이승우는 너무나 이상했다. 이건 이제껏 고은교가 만나본 적 없는 새로운 유형의 에스퍼였다. 예측불허의, 그러나 누구보다 고은교에게 충실하다는 것이 자꾸만 신경줄을 잡아당겼다.

그는 약간의 호기심을 느꼈다. 동시에 이승우에게 어떤 명백한 이유가 있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보다…….’

일단…… 계속해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며 게이트 앞에서 이야기를 하는 건 좀 그만둘 필요가 있었다.

“……우시현 에스퍼, 퇴근하세요. 내일 서류 제출하는 것 잊지 말고.”

“야, 고은교.”

“아까 이승우 에스퍼에게 한 말을 우시현 에스퍼도 들었겠지요?”

“…….”

고은교가 딱 끊어 말했다.

“내 일에 간섭하지 마세요. 알아들었으면 퇴근하고…… 내일 봅시다.”

우시현은 말 그대로 이도저도 못하는 상태로 이승우와 고은교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런 그를 내버려 둔 채, 고은교는 침착하게 이승우에게 지시했다.

“이승우 에스퍼, 센터 앱으로 내게 가이딩 요청하세요.”

이 자식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복잡한 짓을 벌이고 있는지 알아야겠다.

“지금 바로.”

*

비겁하다면 비겁하다고 할 수 있다.

이승우가 선수를 친 순간, 우시현이 훼방 놓지 못해 안달이었던 이유를 이승우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고은교는 머리도 좋고 맡은 일에 충실했지만 모든 일을 정공법대로 처리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러니까 고은교와 에스퍼, 고은교와 게이트를 분리해내는 데 성공할 수만 있다면.

‘철벽을 뚫는 최초의 사람한테 기회를 주겠지.’

제대로 된 마음이라는 걸 인지시키는 순간부터 고은교는 미안해할 것이다. 고은교에게 있어 일이란 거의 삶의 원동력처럼 보였으니까. 연인에게 쏟을 에너지가 없다고 생각하여 거절하겠지. 하지만 누군가를 그 자리에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면, 바로 그때 이승우가 떠오를 것이다. 이 FM은 가장 먼저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 사람에게 첫 번째 기회를 주려 할 것이고, 바로 그것이 이승우가 원하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우시현은 거기까지 생각해 내지 못했으나 짐승 같은 본능으로 위험을 감지해 이승우를 막으려 했다. 하지만 결국 고은교는 이승우를 택했고, 그건 결정적인…… 아주 결정적인 차이가 되어 줄 것이다.

“좋아하는 게 맞아요.”

가이딩실 안에서, 고은교는 등 뒤로 문이 닫히자마자 이승우의 품에 거의 빨려 들어가다시피 했다.

이승우의 턱이 어깨에 닿을 듯했다.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귀를 울린다.

“……이승우 에스퍼, 일단 앉아서 대화합시다.”

“네.”

늘 그랬듯 이승우는 순순했다. 고은교는 뭐 하나 빠질 것 없는 에스퍼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앉았다.

“……승우 군.”

이승우는 맞은편에 앉는 게 아니라 고은교의 다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려 했다. 고은교가 저지하자 몸을 굽힌 채로 그를 기우뚱하게 올려다본다.

“의자가 있잖습니까.”

“저는 여기에서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

아주…… 작정을 했군.

고은교는 이승우에게 말려들지 말자고 생각했지만, 사실 이승우는 원래도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다. 처음 고은교의 집에 찾아왔을 때, 그는 창문 바깥에서 노크를 하며 자신을 집 안으로 들여보내 주기를 종용하던 미친놈이었다.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며 고은교가 입을 열었다.

“내가 궁금한 건, 왜 승우 군이…… 아니 이승우 에스퍼가 굳이 나를 떠났냐는 겁니다. 떠난 뒤에 센터 직원을 매수하다니요. 그런 결심을 한 마당에 수고로운 일을 할 필요가 있었습니까?”

“네.”

물론 이승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은교가 하아,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시겠지.

“왜요?”

“그건 제대로 말해 두고 싶은데.”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이승우가 빙긋 미소 짓는다.

“제가 교수님의 목록을 탈퇴한 이유는 교수님한테 달라붙는 에스퍼들을 못 봐줄 것 같아서가 아니에요.”

“그럼…….”

“물론 개좆같기는 하지만.”

순간 고은교는 제 귀를 의심했다.

……그러니까 개좆같다고 한 건가? 그, 부드러운 말투로?

“목록에 계속 있으면 자기 에스퍼다…… 그렇게만 생각하시는 것 같아서요. 그래서 정리했어요. 교수님이 빠져나갈 구멍 없게.”

“무슨…….”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목록에 있으면 자신의 에스퍼라는 게…… 왜 굳이 자신의 에스퍼가 아니어야만 하지?

“에스퍼는 게이트를 함께 클리어하는 동료면서 교수님이 돌봐 주어야 하는 대상이죠.”

“그래요.”

“거기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상 절대 교수님과 동등해질 수 없고.”

그 말에 고은교가 움찔 입술을 벌리려 했다. 그리고 그대로 멈췄다. 이승우는 고은교가 말하기를 충분히 기다렸지만, 고은교의 목소리는 입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았다.

“오래 고민하지 않으면 귓등으로도 듣지 않으실 테니, 생각하고 또 생각했어요. 이 감정이 사랑이 맞는지.”

“…….”

이승우가 고은교의 손을 쥔다.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상처가 난 손바닥을 보고, 뭐라 설명할 수 없는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조심스레 그 상처에 제 뺨을 비빈다.

가이딩 안 하셔도 돼요.

고은교는 끊임없이 움찔거렸다. 더운 숨이 몇 번이고 피부 위로 닿는다. 자신의 목록에 없는 에스퍼인 이승우. 현재 고은교는 그를 통해 게이트를 받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목록에서 탈퇴하여, 그가 받는 콜을 공유 받을 수 없으므로……. 그러니 자신에게는 이승우를 돌보고 그를 가이딩해 주어야 할 의무도 없다.

이 순간 이승우는 고은교의 의무 밖에 있는 사람이다. 자신의 지시대로 가이딩 요청을 넣었지만, 가이딩을 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니 이 불필요한 접촉은 몹시 난감하다.

“가이딩을 받지 않아도…….”

벨벳처럼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고은교는 이승우가 제 앞에 꿇어앉아 연신 입 맞추던 손을 겹쳐 스스로의 중심부로 끌어당기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이렇게 된다면, 이건…… 도대체 뭔가요?”

딱딱한 무언가가 더듬어졌다. 고은교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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