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콜 가이드-92화 (92/132)

#92

그 기색을 알아차린 이승우의 눈이 길게 휘어진다.

“어젯밤에도 교수님의 벗은 몸을 생각하며 저를 위로했어요.”

방심한 순간 폭력적일 정도로 달콤하고 비린 말이 쏟아졌다. 이런 것에는 도저히 면역이 없다. 고은교는 발을 구르며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잠깐…… 이승우 에스퍼.”

그러자 이승우가 기다렸다는 듯 손을 뻗었다. 오히려 앉아 있을 때보다 몸이 더 가까이 밀착된다. 에스퍼들과 가이딩하느라 스킨십에 익숙한 건 사실이지만, 가이딩이 완전히 배제된 채 끌어안긴 건 거의 없는 일이었다. 지금 이승우가 그를 삼킬 듯 바라보는 건 온전히 고은교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였다.

“하아……. 교수님.”

낮은 숨소리가 섞인 부름에 심장이 소스라치게 놀라 펄떡인다. 그는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 했지만, 자신의 손 아래 만져지는 것이 끝없이 부피를 키우고 있었다.

애초에 이승우가 고은교의 손을 가져다 댄 것이었기 때문에 당황스러워 손에 힘을 주어도 그것을 움켜쥐는 시늉처럼 보일 뿐 조금도 떨어질 수 없었다. 이승우가 고개를 숙여 고은교의 어깨에 뺨을 기댄다. 무릎이 무릎 사이를 스치고, 그 안을 누르며 다리가 파고든다.

“잠……깐, 읏.”

이승우가 달려들었던 최초의 순간을 기억한다. 가이딩만을 원해 고은교의 입술에 키스하고 그를 덮쳐누르던 장신의 남자를. 그러나 제정신인 이승우는 몹시 교묘하게 움직였다. 목덜미에 숨을 흘리고 귀를 핥고 옷 위로 자신이 들어가야 할 곳을 착실히 더듬어왔다.

그야말로 고은교는 경악해서 남은 손으로 이승우의 손을 붙들 수밖에 없었다. 이 필사적인 행태에 이승우가 웃음을 흘린다.

“이승우, 승우 군. 잠깐이라고 했잖아요.”

그의 만류에 행위는 멈췄지만, 여전히 젖은 숨소리가 귓가에 남아 있는 듯하다. 온몸에 피가 빠르게 돌았다. 분명 이승우가 능력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닐 텐데, 그의 목소리가 온몸을 기어 다니는 느낌이었다.

그는 아찔해지려는 정신을 다잡고 우선 이승우의 것에 닿아 있는 제 손을 떼어 냈다. 이승우는 의외로 순순히 손을 놔주었다…….

고은교는 자신이 할 말을 찾아내야 했다.

“그러니까……. 그래요. 이해했어요.”

“뭘요?”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이승우가 물었다. 깨달음을 확인하겠다는 의도가 담긴 목소리였다. 그 태도에 자꾸만 마른침이 넘어갔지만, 고은교는 용케 대답할 수 있었다.

“……이승우 에스퍼가 나를 좋아한다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이승우는 고은교가 에스퍼들의 고백을 거절할 때 쓰던 레퍼토리를 원천 차단했다. 너는 에스퍼라서, 에스퍼는 가이드에게 끌리니까, 그런 감정들은 쉽게 헷갈릴 수 있고, 혹은 혈기에 치우쳐서…… 따위의 거절 멘트를.

거짓말처럼 폭풍 같던 기세가 사그라진다. 고은교의 말이 정답이라는 듯 이승우가 눈웃음쳤다.

“맞아요.”

그 기쁜 목소리에 고은교는 심란한 얼굴로 잠깐 침묵했다.

“……원래, 게이입니까?”

도저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말끝이 살짝 떨리자 이승우의 눈웃음이 짙어졌다.

“누구를 좋아해 본 건 처음이에요. 그러니까 아마…… 그런 것 같아요.”

그 수줍은 대답에 고은교는 이 어린 양을 바른 길로 인도해 주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를 느꼈다. 물론, 이승우와 두 번이나 키스하며 반쯤 눕혀졌던 일을 잊을 수 있다면 말이다.

고은교 스스로는 한 번도 자신의 성 지향성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본 적 없었다. 장이주였을 때는 병마와 싸우며 일에 매진하느라, 고은교였을 때는 자신의 몸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러니까 양쪽의 삶 모두 연애를 위한 공백을 남겨 둘 여유 따위는 없었다는 의미였다.

이승우가 밀고 들어온 것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틈이었다. 예전과는 달리 건강한 몸이었으니 이승우를 받아 주어도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이승우가 원하는 것은 가이드인 고은교가 아니라 그냥 고은교였다.

가이드로서 누군가를 보살필 필요가 없다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이승우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과는 별개로 자신 역시 그를 좋아하느냐는 근본적인 생각에 도달하게 된다.

진심에는 진심으로 대해야 하는 법이었다. 이렇게 정신없이 휩쓸리는 방식은 자신과 잘 맞지 않았다. 단호하게 이승우의 어깨를 밀자, 그가 얌전히 물러난다.

그제야 고은교가 허리를 바로 폈다.

“……나는 잘 모르겠어요. 미안합니다.”

인생을 두 번이나 살면서 어떤 방식의 인간관계에 미숙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때로는 솔직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있고, 고은교는 지금이 바로 그런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이승우가 솔직했듯이 자신 또한 솔직해야만 했다.

이미 거절을 예상했는지 이승우는 초연한 표정이었다.

“네.”

착하게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는다.

“저는 얼마든 기다릴 수 있어요.”

그는 복잡한 얼굴로 이승우를 바라보았다. 좋은 말로 하면 생각이 깊고, 나쁜 말로 하면 지나치게 머리를 굴리는 녀석이다. 달콤한 듯 사람을 꾀어내지만 정작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일이 이루어지도록 상황을 조장하는 면이 없잖아 있다.

그것을 잘 알았다.

그럼에도 이승우는 공손하며 순종적이었다. 오래 참았고, 늘 고은교를 우선시했다. 어느 순간부터 고은교가 원하지 않는 일은 절대 하지 않는 결벽적인 증세가 조금씩 눈에 밟힐 정도였다.

고은교는 자신의 상처를 어루만진 순간 이승우의 얼굴이 작게 일그러졌던 것을 떠올렸다. 손바닥에 난 그 자그만 상처 하나에 얼마나 깊은 수심과 죄책감이 떠올랐는지도.

분위기를 환기시키고 싶었는지, 이승우가 부러 가벼운 미소를 짓는다.

“게이트 클리어하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다음에는 꼭 저도 데리고 가세요.”

“……이승우 에스퍼는 이제 내 에스퍼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도 위험하잖아요.”

그 어떤 말에도 이승우는 부드러운 태도를 일관했다. 등허리를 붙잡고 가볍게 미는 동작에 몸이 스스럼없이 밀려 나간다.

“걱정하기 싫어요.”

가이딩실 문 앞에서 고은교는 이승우를 응시했다.

그린 듯 다정한 얼굴은 깨지지 않는 가면 같다. 이승우는 오늘 한 줄뿐인 고백을 하기 위해서 에스퍼로서의 권리를 포기했다.

왜 그렇게까지 그의 마음이 핀치에 몰려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어 조금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그의 최선이었을까? 예컨대 충동이나 질투 같은 강렬한 무엇인가가 그의 눈을 가린 건 아니었을까?

“……승우 군.”

조용히 중얼거리듯 그를 부르자, 이승우의 표정이 약간 굳어진다. 바로 가이딩실을 나가지 않고 이승우를 부르는 고은교의 행동에서 불길한 무언가를 감지했다는 것처럼.

그제야 이승우가 왜 자신을 받아 주지 않는 거냐고 항의하는 게 차라리 마음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대 완전히 떼어 내지 못할 방식으로 다가오려는 그의 태도가 마치 애걸하는 것 같았으므로.

두 사람은 서로를 물끄러미 보았다.

이승우는 너무 어려 아직 가이딩이 주는 의미를 모르는 것 같았다. 아마 머지않은 미래에 가이딩을 받지 않기로 결정한 것을 후회하게 되겠지만, 아니 어쩌면 무언가 방책을 생각해 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이대로 어영부영 넘어가는 것 또한 고은교의 방식이 아니었다.

그는 사무적인 어조로 말했다.

“나는 아마 이전처럼 승우 군을 믿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네.”

“또 상급 에스퍼를 무보수로 데려가서 쓰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이유든지, 고은교의 목록에서 먼저 사라지기를 택한 건 이승우였다. 고은교는 이 일에 대해 분명히 지적하고 넘어가고자 했다.

“다음부터는 이러지 않도록 하세요.”

“…….”

“다시 에스퍼 등록 서류를 제출하도록 하고.”

“하지만…….”

“승우 군이 나를 좋아한다는 건 알겠습니다. 그건 확실히 알았어요. 그리고 승우 군이 자신을 위해서 나를 정리했다는 것 역시 잘 알았고.”

“…….”

“하지만 가이딩 받고 싶잖아요. 그렇지?”

이승우가 내리깔았던 눈을 천천히 뜬다. 고은교는 힘주어 말했다.

“그건 승우 군한테 필요한 겁니다.”

“…….”

“내가 특별히 동정심이 많아서가 아니에요. 일에 미쳐 있어서도, 승우 군이 예쁘게 보여서도 아니고. 단지…….”

그 말을 하려니 어쩐지 목이 말랐다. 그가 살짝 아랫입술을 핥았다. 혀가 움직이는 모양을 이승우가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나 역시 예전에 승우 군을 말없이 삭제한 적 있으니, 이번 한 번만 넘어가는 겁니다.”

“…….”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승우 군이 제때 와 준 걸 알아요.”

“……제가요?”

고은교의 입술만을 바라보던 이승우가 고개를 살짝 치켜든다. 그는 왜인지 비밀을 말하는 기분이 되어 속삭이듯 말하게 되었다.

“그래요. 승우 군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이승우는 그렇다는 말도, 아니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부드러운 눈웃음을 지었을 뿐이었다.

*

그다음 날 아침, 국장 호출이 있었다.

‘게이트에 이상은 없었는데…….’

간혹 변이를 보이는 게이트가 있기는 했지만, 사실 ‘변이’라는 거창한 말을 쓸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저 모든 게이트가 다 똑같지 않다는 말을 조금 다르게 하는 것일 뿐. 심지어 이 호출은 ‘긴급’ 건이었다. 호출을 확인하는 즉시 센터로 출근하라는 뜻이다.

“안녕하십니까.”

가볍게 노크한 뒤 국장실에 들어가자, 이미 자리를 잡고 있는 두 명의 남자가 보였다. 하나는 국장이고, 다른 또 하나는 우시현이다.

그사이 국장은 십 년은 더 늙은 초췌한 모습이었다. 아주 피곤한 안색으로 이마를 짚은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았다.

“고은교 가이드, 자네가 말해 보게.”

“아, 그러니까 뭐가 문제라는 거냐고요.”

“자네는 조용히 하고. 그래, 고은교 가이드. 왜 또 우시현 에스퍼를 목록에 넣은 건가? 분명히 그때 말했을 때는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없을 거라고 하지 않았나?”

방만한 태도로 반쯤 드러누운 채 국장실 한 구석에 앉아 있던 우시현이 큰 소리로 툴툴거렸다. 국장의 말을 듣고 나서야 고은교는 이 난데없는 삼자대면이 무슨 이유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깨달았다.

‘아……. 우시현을 목록에 넣어서군.’

그날, 고은교는 우시현에게 두들겨 맞은 다음 가능한 빨리 우시현을 ‘my’에서 해제했다. 우시현 에스퍼는 센터에서 특별 관리를 받는 최상급 에스퍼이고 가이드 고은교는 뒷배가 만만치않은 남자였으므로 분명 국장은 그들의 행보를 주시하고 있었을 터였다.

이 일이 완전히 해결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원점으로 돌아온 꼴이니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파악하고 싶었을 것이다. 게이트 때 단순히 이능력자들을 배치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이 말이지.

사실 고은교가 할 수 있는 말은 별로 없었다.

“게이트 내부에서 우시현 에스퍼의 체내 위험률 수치가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을 확인했고, 따라서 당분간 집중적으로 가이딩해 주기 위한 조처였습니다.”

“그 ‘당분간’은 언제까지인가?”

“그건 미정입니다만, 길어도 몇 달 안으로 종료될 예정입니다.”

“확실한가?”

“예.”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국장이 몇 번이나 물었지만…… 정말 그 모든 게 사실이라 더는 해 줄 수 있는 말이 없다. 국장은 속이 터진단 얼굴로 우시현을 쳐다보았다.

“자네는 고은교 가이드랑 하는 가이딩에 동의하는 게 맞나? 고은교 가이드로 괜찮아?”

적어도 우시현은 고은교와 가이딩하는 일에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고은교는 우시현이 잘 대답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혹시 몰라 우시현을 쳐다보자, 눈이 슬쩍 마주친다. 우시현이 피식 웃었다.

변하지 않는 시건방진 웃음에 약간 안심이 됐다.

“우리 교수님이 왜?”

‘……안심은 개뿔.’

황당한 표정을 짓는 국장의 얼굴과 자신의 얼굴이 똑 닮았을 거라는 데 돈도 걸 수 있었다.

“……자네는 이제 대학생도 아니잖나?”

“한 번 교수님은 영원히 교수님이지. 국장님은 은사님과 야자도 트세요? 몰랐네.”

“…….”

국장이…… 에스퍼가 이따위로 이죽거리는 걸 봐주고 있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 두 사람이 얼마나 친하기에 가능한 태도인 건지 모르겠다.

우시현이 시큰둥한 어조로 덧붙였다.

“쟤, 교수님이라고 불러 주면 은근히 좋아해요.”

“……제가 언제요?”

친하고 자시고 그냥 개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거였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