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콜 가이드-93화 (93/132)

#93

국장은 아주 이상한 표정을 했다. 고은교를 증오하는 것이 분명하던 우시현의 태도가 손바닥 뒤집듯 바뀐 것이 낯설었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심지어 고은교의 기호를 살피며 제 나름대로 ‘이렇게 해 주면 좋아할 것’ 따위의 생각이 우시현의 머리통 안에 있다는 것 자체가……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라 친구에게 하는 것 같지 않은가.

사실 우시현은 누군가의 눈치를 살펴 저 알아서 호의를 보인다는 일 자체가 드물었다. 어렸을 때에는 워낙 출중한 외모를 가져 남들이 알아서 비위를 맞춰 주었고, 에스퍼로 발현한 이후에는 대단한 능력을 가졌다는 평이 더해져 거물 대접을 받았다. 그러다 보니 우시현은 대학도 졸업했으면서 꼬봉을 거느리고 다니던 버릇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다.

한마디로 양아치 새끼에 가까운 인물이었다는 이야기인데, 그러다 보니 당연히 섬세하게 사람을 챙기는 일에 서툴렀다.

그럼에도 분위기를 읽는 눈치가 기가 막히게 빠르다. 우시현은 국장이 아무 말도 못 하고 입을 다무는 걸 보고 씩 웃었다.

“……용무 끝나셨으면 가 보겠습니다.”

왜 국장이 폭삭 늙은 느낌이 나는지 알 것 같았다. 고은교는 우시현이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소리에 더 대꾸해 주지 말자고 결심했다. 하나하나 상대해 주면 끝이 없었다.

“그러게.”

떨떠름한 표정의 국장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두 사람은 진한 동질감을 느꼈다. 우시현을 가운데 두고 그를 조금이라도 챙기는 시늉을 하게 된다면 누구라도 이렇게 될 것이다.

국장실을 나서자 우시현이 당연하다는 듯 그의 뒤를 따라왔다.

“끝까지 배웅은 못 해 줘. 국장이 더 할 말이 있다고 해서.”

“괜찮습니다.”

고은교는 냉담하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럼에도 우시현은 자리를 바로 떠나지 않고 미적거렸다. 그들은 센터의 긴 복도를 함께 걸었다.

“게이트 배급 받는 걸 중단했던데.”

“맞습니다.”

가볍게 나온 긍정에 우시현이 신기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어젯밤 고은교는 우시현에게 전화(쓰레기장 게이트 안에서 전화번호를 교환했다. 통신이 안 되는 것이지 휴대 전화의 기능 자체가 정지되는 건 아니었으니까)를 걸어 그의 게이트 일정에 대해 참견했다. 가치 없는 부산물만 뱉어내는 게이트는 정리하게 시키고, 가이딩을 받는 날짜 뒤로 굵직한 게이트를 하나씩 미루는 작업을 했다. 솔직히 말해 약간 일에 미친 사람 같았다.

우시현은 최상급 에스퍼라 일 년차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들어온 콜이 많았다. 워낙 일정이 중구난방으로 잡혀 있기에 보다 효율적으로 일정을 소화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는 명목이었지만, 우시현이 보기에 고은교는 일정을 정리하고 계획을 짜는 일 자체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같이 가면 되겠네.’

은근히 떠보자, 전화 너머의 목소리는 잠깐 말이 없었다.

‘……그러면 나야 좋지요.’

‘분명 좋다고 했다?’

우시현은 목소리가 어린아이처럼 들뜬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쁨을 내색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처럼 굴었다. 그 목소리를 들으며 고은교는 어쩌면 감정은 거친 물살이 빠르게 불어나듯 순식간에 제 모습을 바꾸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게 아니라면 저도 모르게 급류에 휩쓸려 버리거나.

‘한 달 동안은 일정이 있으니 그 이후에 함께 갈 수 있으면 가도록 하지요.’

그 말에 우시현은 게이트 일정을 죄 한 달 뒤로 미뤄 버렸다. 촘촘하게 짰던 계획이 단번에 엎어지는 것을 보고 고은교는 한숨을 쉬었지만, 그를 막지는 않았다.

우시현은 고은교가 자신의 결정을 내심 좋아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가 어째서 한 달 동안이나 게이트 일정을 미루는지 궁금해했다. 고은교의 새로운 취미가 게이트에 드나드는 것인 줄 알았는데, 또 새로운 일정이 생겼다니. 아마 높은 확률로 센터에서 게이트를 배급 받은 게이트를 말하는 것이리라 생각했는데, 막상 확인해 보니 그것도 아니었다.

“운동을 하려고요.”

이 뜻밖의 말에 우시현이 우뚝 걸음을 멈췄다. 자연히 고은교의 걸음 역시 멈추었다.

“뭐? 어디에서?”

“센터에 피트니스 클럽이 있지 않습니까.”

그랬다. 지하 1층에 번듯한 헬스장이 하나 있었지…….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우시현은 가만히 제 엄지로 입술을 쓸었다.

“이만 돌아가세요.”

복도 끝에서 고은교가 축객령을 내렸다.

누군가가 보기에는 친근해 보일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건조한 관계였다. 우시현은 일말의 이견 없이 고개를 까딱하고 몸을 돌렸다.

나른해 보이는 걸음걸이다. 고은교는 말없이 우시현의 뒷모습을 얼마간 바라보다가 센터 정문을 향해 재차 걸어가기 시작했다.

Fourth order

“……자!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삼십 분 동안 유산소하고 가시죠.”

“예. 감사합니다.”

트레이너의 시원스러운 지시에 고은교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헬스장의 공기가 후끈거리는 것 같았다. 동시에 팔다리가 지나치게 축 처지는 기분이 들었다. 혹사당한 근육이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온몸이 지나치게 뜨끈거리고, 동시에 유연해져 있었다.

“제법인데.”

근처에서 느슨하게 풀어진 목소리가 들린다. 이미 고은교는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눈썹조차 찡그리지 않으며 일어서서 러닝머신 위에 올랐다.

체력이 너무 떨어져 있었다. 근력도 형편없고, 온몸의 관절이 뻣뻣한 나무토막 같았다. 일반적인 현장 이능력자의 일정이 가혹하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할 말을 다 한 셈이다. 게이트 하나를 클리어하고 나오면 온몸이 녹초가 되었다. 이대로 일을 지속했다간 몸져누울 기세였다.

이쯤에서 체력 단련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여름에는 운동하기 힘드니 더워지기 전에 몸을 만들어 두어야 했다. 이미 고은교는 오래전 센터의 피트니스 클럽을 이용한 적 있었다.

그러니까…… 장이주였을 때 말이지.

이 헬스장의 시설은 꽤 좋은 편이다. 믿을 만한 트레이너가 스무 명이나 상주해 있고 헬스장을 이용하는 현장 이능력자(대부분은 가이드겠지만)들을 위한 대우도 나쁘지 않았다. 운이 좋으면 의외의 인맥이 생기기도 하고.

그가 막 신입이었을 때, 팀장들과 친해지는 비법으로 돌았을 정도였다.

자신도 반신반의하며 그 절차를 밟은 적 있었다. 헬스장 직원은 상냥한 태도로 센터의 이능력자가 단순히 기구만 이용하는 건 무료라고 알려 주었다. PT 비용도 무려 80퍼센트가 할인되었다. 물론 몸에 무리가 되어 꾸준히 이용할 수는 없었지만 게이트를 드나드는 데는 꽤 많은 체력이 필요했다. 정작 팀장이 되고 난 이후에는 어째서 팀장들이 이 헬스장에 죽치고 있었는지 알 것 같기도 했고…… 그러면서도 그는 왜 팀장들 중 몇이 유난히 헬스장의 사우나에 집착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매일 꾸준히만 한다면, 한 달 뒤에는 어느 정도 몸 안에 에너기가 차오른 것을 느낄 수 있을 터였다.

“정말 30분 탈 거야?”

“……후욱, 후우.”

“아까 트레이너는 영 초짜인 것 같던데.”

“……후우, 후우.”

“기합이 너무 들어가 있단 말이지.”

그러면 영 피곤하게 가르치는 것 아니냐는 신경줄 긁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그럼에도 고은교는 별다른 말없이 트레이너가 지시한 30분 유산소 운동을 마쳤다. 턱 끝으로 땀이 물처럼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수건으로 손을 뻗으려는데, 이미 한발 먼저 다가온 수건이 이마와 뺨, 목덜미를 닦아 냈다.

“자, 물.”

“…….”

그는 말없이 물병을 받아들었다. 자신의 것은 아니었다. 시원하게 출렁이는 물을 잠시 내려다보던 고은교는 순순히 뚜껑을 열고 물을 몇 모금 마셨다. 그리고 아까부터 계속 말을 붙이는 녀석에게 물었다.

“오늘 아무 일정 없습니까, 우시현 에스퍼?”

그래, 누구겠는가…… 그날 무심코 말해 버린 고은교의 일정을 알 수 있을 만한 인간은.

“응. 없어.”

우시현뿐이지.

껄렁한 태도로 시종일관 옆에서 고은교의 운동에 대해 간섭하던 그는, 이번에는 종류가 다른 말을 했다.

“유산소는 좀 덜 해도 돼.”

“……무슨 소리입니까? 유산소를 하지 않으면 체력이 늘지 않아요.”

물병을 돌려 주자 우시현이 그걸 옆에 내려놓았다.

“다른 인간들이 쳐다보잖아.”

“우시현 에스퍼…….”

고은교가 경고하듯 그의 이름을 부르자, 우시현이 어깨를 으쓱인다.

“내가 없는 말 했어? 니가 숨을 헐떡일 때마다 오십 미터 안에 있는 인간들이 다 돌아본다고.”

“하아.”

‘내가 아니라 본인 때문이겠지.’

그걸 모르지 않는 주제에 뻔뻔하게도 군다. 저 무례한 말을 들을 때마다 골치가 다 아팠다. 선을 모르고 내뱉는 말과 함부로 움켜쥐곤 하는 손. 모두 익숙하지 않고 그닥 마음에 차지 않았지만, 원래가 그런 인간이니 별 기대 역시 없었다. 그러려니 한다는 얼굴로 고은교가 두 시간 남짓 이어졌던 운동을 마무리했다.

“끝났냐?”

“네.”

샤워한 뒤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우시현이 어슬렁어슬렁 일어났다.

며칠 동안 우시현은 고은교가 운동하는 것을 구경하며 시답잖은 소리를 했다. 대부분의 소리를 흘려들었지만 유산소 운동을 하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았던 건 우시현 덕분이었다. 수많은 단점 중에서 그나마의 장점을 건져내며 수건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쳤다.

에스퍼가 운동을 하려면 이 헬스장 전체를 들어 올려도 부족하기에 우시현은 운동할 수 없었다. 정확히는 할 필요가 없었다는 말이 알맞았다. 그걸 알면서도 꼬박꼬박 출석 도장을 찍는 정성이 가상했다.

점차 고은교는 우시현에게 신경을 껐다. 그가 자신에게 친밀감 있게 구는 것도, 귀찮게 구는 것도 모두 체력 증진에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간혹 시간이 나면 함께 저녁을 먹기도 했다. 목록에 있는 에스퍼와 시간을 보내는 건 자주 있는 일이었다.

꼬리가 밟힐 거라는 걸 예상했어야 했는데.

“요즈음 안 보인다고 했더니…… 여기 계셨네요.”

평소보다 삼십 분 이른 시각이었다. 누군가 헬스장의 투명한 유리문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승우는 평소처럼 태연한 표정이었다. 고은교는 짧게 우시현의 부주의에 대하여 떠올렸다가 금세 상념을 흩었다.

“오랜만입니다. 이승우 에스퍼.”

“네. 오랜만이죠.”

이승우가 ‘오랜만’에 힘을 주며 말했다. 몇 걸음 걷지 않았는데도 다리가 길어서인지 금세 그들 사이의 틈이 좁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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