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콜 가이드-94화 (94/132)

#94

“이승우 에스퍼.”

이름을 부르자 이승우는 대답하는 대신 멈춰 섰다. 그러고는 고은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날 이후로 고은교는 이승우의 연락을 조금씩 피했다. 아무래도 생소한 느낌을 주었던 고백이 거북한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당황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알지 못하는 관계가 주는 새로움에 흥미를 느끼는 쪽도 물론 아니었다.

‘한 주에 한 번은 가이딩을 해야 하지만…….’

그것조차 최대한 미루었다.

“일부러 이러시는 건가요?”

이승우가 말했다. 그 말은 어쩐지 고은교를 탓하는 것으로 들렸다. 그럴 것이다. 고은교는 이승우가 느끼고 있을 부당함에 대하여 짧게 생각했다. 그가 태연한 얼굴을 가장하며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뜻밖에도 이승우는 웃고 있었다.

부드럽고 다정한 웃음은 아니었다. 약간은…… 야성적인 느낌이 드는 미소였다. 살짝 이를 드러내고 있었으니까.

“뭘 말입니까?”

“…….”

이승우는 잠시 침묵했다. 기분을 살피듯 얼굴을 배회하는 시선이 이어진다. 짐작하는 바는 있지만 일단 모르는 척을 했다. 그는 잠자코 그들이 헬스장 앞을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문 앞에 서 있는 건 민폐가 될 겁니다.”

지금 고은교는 헬스장이 딱 오픈하는 시간대에 맞춰서 온 참이었다. 사람들이 자주 오가는 길목을 두 사람이 막고 있는 행태는 옳지 못했다.

충분히 가까운 거리에서 한 걸음 더 다가가자 두 사람은 숨결이 닿을 정도로 바짝 붙게 되었다. 고은교가 다가올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지, 이승우의 얼굴이 약간 굳어지는 게 보인다. 그가 손을 뻗어 이승우의 등 너머에 있는 투명 문을 밀었다.

“들어올 거면 들어오세요.”

“…….”

이승우는 순순히 몸을 비켜 고은교가 헬스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 주었다. 자신의 락커로 가 운동복으로 갈아입는 사이 이승우 역시 헬스장 안으로 들어왔다.

휴대 전화로 회원 인증을 하는 내내 이승우는 너무 조용했다. 묘하게 신경이 쓰이는 느낌에 고개를 들자, 이승우는 그가 뛰곤 하던 러닝머신 근처에 서서 헬스장의 기구며 설비를 가만히 둘러보는 중이었다.

“친구분이신가 봐요.”

일주일 중 월, 수, 금만 수업을 봐주는 트레이너가 알은 체를 해 왔다. 고은교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목례했다.

“네. 안녕하세요.”

오늘은 목요일이었기 때문에 수업을 듣지 않았다. 가벼운 준비 운동을 하며 고은교는 몸을 달굴 준비를 마쳤다.

“항상 이곳에서 운동하세요?”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이승우가 물었다. 고은교는 이승우에게 힐긋 시선을 주었다.

“며칠 안 됐습니다.”

“그렇구나.”

자연스럽게 뻗어 온 손이 잘못된 자세를 잡아 주었다. 이승우의 손이었다. 그 순간 고은교는 어쩔 수 없이 움찔했지만, 걱정을 불식시키듯 담백한 손길이 가볍게 허리를 누른다. 동시에 다리 근육이 약간 당겨지면서 팽팽해졌다.

“아는 사람이 많아지신 것 같네요.”

의도가 영 아리송한 말이었다. 눈썹을 치켜세우며 돌아보자 이승우가 살짝 웃는다. 예의 그 눈웃음이었다. 남들보다 조금 긴 나뭇잎 같은 눈동자가 부드럽게 휜다.

“굳이 도와주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아니요. 죄송해서요.”

난데없는 사과에 고은교는 잠시 스트레칭을 중단했다.

“뭐가 말입니까?”

“오해했거든요.”

이승우의 얼굴에는 산뜻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사실, 그의 웃음은 거의 습관인 것처럼 보였다.

“저는 또, 제가 고백한 게 교수님께는 금방 잊어버릴 정도로 별것 아닌 일인 줄 알고.”

“…….”

“제가 교수님을 더 좋아하게 만들려고 일부러 다른 남자랑 알고 지내시는 거죠?”

이승우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은근히 말해왔다. 이번에는 명백한 의도를 담고 손가락이 귀밑을 살짝 간지럽힌다.

이 부적절한 말에 고은교는 황당한 표정을 금치 못했다.

“우시현 에스퍼와는 원래 아는 사이 아닙니까. 내가 무슨…… 뭘 했다는 건가요?”

스스로 질투를 유발했다는 소리를 듣는 건 진정 처음 있는 일이었다. 너무 어이가 없어 화조차 나지 않았다.

“시현이 말구요.”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대꾸했다. 우시현이 아니라고? 눈썹을 찌푸리는 사이, 이승우가 다른 회원과 대화를 나누는 트레이너를 눈짓했다.

이승우의 눈길을 따라간 고은교가 헛웃음을 뱉었다.

“……하.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니겠지요? 이승우 에스퍼. 저분은 트레이너입니다.”

“네, 알아요.”

이승우가 못마땅하다는 듯 덧붙였다.

“설마 저 남자가 교수님의 몸 여기저기를 주무르는 걸 시현이가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렇죠?”

“아니…… 잠깐만. 저분은 에스퍼도 아니에요.”

“그러니 더 문제예요. 처음부터 가이딩이 배제된 관계잖아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이승우는 질투에 미쳐 있었다. 우시현은 동기이기도 하고, 과거 ‘고은교’가 열렬히 선망했던 대상이었으므로 질투하는 줄 알았는데…… 그냥 모든 사람을 싫어하는 모양이었다. 솔직히 이 태도가 독점욕으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아주 떨떠름한 기색으로 고은교는 이승우가 징징거리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자신은 수십 가지의 풍파를 헤치면서 겨우 고백을 닿게 만들었는데, 헬스 트레이너는 그런 과정이 필요 없으니 너무나 불공평하다는 이야기였다.

이대로 두면, 이승우는 고은교가 만나는 족족 모든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해댈 것이다. 이치에도 맞지 않는 이야기일뿐더러 자신을 세기의 경국지색처럼 묘사하는 말에 몹시 기가 빨렸다.

앞으로도…… 앞으로도 계속 이 피곤한 소리를 들을 수는 없다.

“그만 하세요, 이승우 에스퍼.”

“…….”

“나 좋다는 사람이 그렇게 흔하지도 않지만, 그렇다 해서 내가 아무나에게 호감을 가지는 것도 아니니까.”

넌더리를 내며 다시 운동을 시작하자, 이승우는 말없이 근처에 서 있기만 했다.

‘그냥 입 다물고 있을 녀석은 아닌데.’

운동 기구 쪽으로 걸어가던 고은교가 이승우를 힐끔 바라보았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은 단정한 얼굴 위로 옅은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그럼 제가 아무나는 아닌 건가요? 교수님.”

근력 운동을 하기 위해 몸을 눕히자, 재빨리 곁에 다가온 이승우가 기구를 드는 것을 도왔다.

그 말이 그런 식으로 해석되나. 그는 잠깐 자신이 방금 한 말을 되새김질한 뒤, 그럴 수도 있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냥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저렇게 좋아하는데…… 굳이 기분을 망칠 필요는 없겠지.

“…….”

그런 고은교의 어른스러운 마음가짐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승우는 빙긋 웃으면서 계속 고은교에게 말을 붙였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경계하실 필요는 조금 있으신 것 같아요.”

그래…… 헛소리에는 응답하지 말자. 고은교는 묵묵히 근력 운동을 시작했다. 처음 시작했을 때는 목뒤를 뻐근하게 만들었던 운동이 이제는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다.

“가끔 좀…… 표정이나 분위기가 야하게 보일 때가 있으셔서.”

그 말엔 저도 모르게 손에서 힘이 빠졌다. 이승우는 솜씨 좋게 고은교가 들고 있던 바벨을 가로챘다. 자신은 두 손으로 낑낑거리며 들어야 하는 운동 기구를 이승우는 가볍게 한 손으로 들고 있었다.

누운 채로 이승우를 노려보며 고은교가 이를 갈았다.

“이승우 에스퍼…….”

“네, 이런 거요.”

이승우가 한숨을 내쉬며 고은교의 이마에 살짝 맺힌 땀을 손가락으로 훔쳤다.

“누워서 이렇게 자극적인 표정을 지으시면 어떡해요?”

“…….”

이승우는 자신의 헛소리가 사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고은교는 이승우의 말에 전혀 동의할 수 없었다. 실제로도 이제 제법 자신처럼 느껴지는 ‘고은교’의 외모는 뛰어난 축이 아니었다. 눈, 코, 입 모두 평범했다는 뜻이다. 게다가 근육이 전혀 없는 깡마른 몸이었으니 정장을 입었을 때면 특히 볼품없어 보였다. 그나마 피부가 깨끗하다는 것이 장점이라면 장점이라지만, 뭐랄까.

자신감 없는 표정이 어울리는 우울한 인상이랄까…….

“……하아.”

무시하자. 그는 힘겨운 숨을 뱉으며 다시 바벨에 손을 뻗었다.

“그런 소리를 내시면…….”

위험한데. 이승우가 기상천외한 소리를 지껄이며 뺨을 붉혔다.

우시현이 도착한 건 그로부터 삼십 분이 지나서였다. 고은교에게 단단히 혼나고 근처에 서서 반성하고 있던 이승우의 시선이 먼저 문에 가 닿았다.

“뭐야?”

바벨을 천천히 내리던 고은교가 눈가를 좁히며 우시현을 바라보았다.

“후우…… 우시현 에스퍼. 사람한테 ‘뭐야’라고 하지 마세요.”

“아니, 진짜 뭐냐고. 얘가 왜 여기 있어? 니가 불렀냐?”

고은교가 잠깐 입을 다물었다.

“내가 부르지는 않았고…….”

거기까지 말한 그가 이승우를 힐긋 돌아보았다. 내려놓아진 바벨을 정리하던 이승우가 태연히 우시현에게 고개를 돌린다.

“뭘 한 거야, 이 자식아.”

우시현이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화를 내는 것 같았지만 정말 진지하게 화가 났다기보다는 짜증이 난 듯했다. 자신만 알던 비밀을 들킨 어린애 같다고나 할까. 이승우는 픽 웃으며 고은교가 일어나는 것을 도왔다.

“그러게 요즈음 헬스장을 다닌다는 건 비밀로 하지 그랬어?”

“……아, 씨발. 김민성 이 새끼가 진짜.”

“에스퍼가 헬스장에 드나드는 이유야 뻔하지.”

부드러운 목소리에 우시현이 뚱한 표정으로 입을 닫았다. 그들을 내버려 둔 채, 고은교는 러닝머신 위를 올랐다. 자신에게 기웃거리는 에스퍼가 하나에서 둘이 되었다 한들 뭐가 그리 대수겠는가?

그는 별다른 생각 없이 운동을 재개했다.

그랬는데…….

“시현아, 아무것도 모르면서 충고만 하면 교수님이 오히려 혼란스러우시지 않을까?”

“니는 뭐 알아?”

경쟁적으로 서로에게 시비를 털며 신경 쓰이게 만드는 것은 물론,

“여기는 왜 개인 탈의실이 없는 거야? 락커룸에서 옷 갈아입지 말라고, 씨발.”

“……이건 시현이 말이 맞네요.”

서로 합심해서 고은교의 행동에 간섭하기도 했다. 혼자 있을 때는 고은교의 눈치를 살살 보느라 안 그러던 녀석들이 이럴 때만 죽이 척척 맞는다.

결국, 그는 평소에 하던 운동을 채 반도 하지 못했다. 그다음 날 트레이너에게 수업을 받을 때는 고은교의 뒤에 나란히 서서 눈을 부라리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고은교가 뒤를 돌아볼 때는 귀신같이 얌전한 표정들이었다. 나날이 안색이 핼쑥해지는 트레이너의 얼굴을 통해 심증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한 달은 안 한다고 하지 않았냐?”

약 이 주 만에 고은교는 운동을 그만뒀다. 빙글거리며 웃는 우시현을 한 번 흘긴 뒤, 그는 센터로부터 배급받은 신 게이트를 살펴보았다.

이 새로운 형태의 게이트는 최종적으로 B급 판정을 받았지만, 게이트의 환경과 거기에서 나오는 몬스터의 유형이 전에 본 적 없는 것들이라 상당한 변수가 있었다. 당연하지만 고은교는 이 게이트 작전에 꼭 참여하고 싶었고, 그런 그에게 기회가 온 건 그가 데리고 있는 두 명의 최상급 에스퍼들 덕분이었다.

우시현은 멋대로 게이트 일정을 한 달 뒤로 싹 밀었고, 이승우 역시 확실하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고은교의 일정에 맞추어 그렇게 한 것처럼 보였으니까.

“위험하지는 않겠네요.”

이승우가 다행이라는 듯 말했다. 그는 언제부터인가 꾸준히 고은교의 안위에 관련된 것이 아니면 뭐든 상관없다는 태도를 견지해 왔다.

“귀찮을 것 같기는 해. 인간이 너무 많아. 고작 B급에 몇 명이 들어가는 거냐?”

우시현이 약간 투덜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게이트는 쓰레기장 게이트를 방불케 할 정도로 대규모에 속했다. 각 구역은 고작 열 개밖에 되지 않지만, 하나의 도시 크기에 육박했다. 실제 크기가 어떤지는 게이트 안에 들어가 봐야 알 수 있을 터였다.

따라서 센터는 안전을 위해 백 명에 달하는 현장 이능력자들을 게이트 작전에 참여하도록 했다. 팀으로 치면 네 개의 팀이 이 안에 들어가게 된다. 게이트를 클리어하기 위한 공략 팀이 셋, 의료, 지원 계열의 에스퍼로만 이루어진 서포트 팀이 하나였다.

“초짜도 수두룩하고.”

“이것도 다 경험이 될 겁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불평을 단칼에 잘라내자, 우시현이 입을 꾹 다문다. 사실, 이 정도로 많은 인원의 에스퍼와 가이드가 들어오는 이유는 이 게이트가 별로 위험하지 않아서였다. 수습들에게 현장 이능력자 라이선스를 빠르게 취득하게 만드는 괜찮은 기회였다는 소리다.

이 게이트에 들어오는 신입 에스퍼가 무려 서른 명이었다. 아무리 규모가 커도 B급 게이트 수준의 몬스터만 나오는데 S급 에스퍼가 둘이나 들어가는 건 이 신입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처였을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갓 대학을 졸업한 말랑거리는 녀석들이었다. 그들에게 이 신 게이트는 괜찮은 실습 장소가 되어 줄 것이다.

군기가 바짝 든 녀석들이 허리를 확 굽히며 인사했다. 게이트에 자주 드나들던 이능력자들 중 몇몇은 귀찮다는 듯 건성으로 인사를 받았고, 또 몇몇은 병아리들이 귀엽다며 웃기도 했다.

자신이야 현장 이능력자로 활동한 지 이제 겨우 세 달째였으므로 고참 행세를 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병아리들의 얼굴 정도는 기억해 두자 싶었다. 만일의 상황을 대비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고은교 교수님?”

대충 앞에 선 얼굴들을 훑어본 다음 모의 게이트 시뮬레이션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데,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한동안 듣지 못했던 목소리다…… 고은교는 약간 놀란 기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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