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선재 군?”
“교수님 맞으시네요.”
남선재는 작년 2학기에 진행되었던 고은교의 수업에서 A+를 맞았던 유일한 학생이었다. 당연히 제때 졸업했을 것이다.
기억하기로는 햇빛이 비치면 거의 금색으로 보이던 밝은 갈색 머리카락이 인상적이었는데, 지금은 검은색으로 염색해 대충 훑어본 것으로는 알아보지 못했다. 아무래도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한 마당이니 얌전해 보이도록 검은색으로 염색한 모양이었다. 자세히 보니 머리카락은 여전히 곱슬거리는 느낌이 남아 있었다.
“……오래간만이네요. 잘 지냈습니까?”
“네.”
남선재가 약간 쑥스러워하며 대답했다. 대답뿐만이 아니었다.
“저…… 많이 뵙고 싶었어요.”
이 강아지처럼 귀여운 인상의 학생은 여전히 수줍어하면서도 고은교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오려는 경향을 보였다.
‘아니, 이제 학생은 아니지.’
어엿한 사회인이었다. 이제 막 첫발을 뗀 병아리 신입이라는 이야기다. 그래도…… 남선재가 몇 달 동안 그의 가르침을 훌륭히 소화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심지어 이 귀여운 에스퍼는 고은교를 여전히 ‘교수님’이라고 부르고 있기까지 했다…….
“센터에 취업하기로 결정한 겁니까?”
“아, 네. 감사하게도 여러 기업에서 러브 콜이 왔는데…… 그래도 센터에서 몇 년 경력을 쌓은 뒤 이직하는 게 가장 좋다고 해서요.”
이 말은 꼭 센터에 취업하는 일이 손쉬운 것처럼 느껴지게 했지만, 잠깐 실무 경험을 쌓기 위해 수습으로 받아 주는 것이 아니면 센터는 상당히 까다롭게 신입을 고르는 편이었다. 실제로도 센터 소속 이능력자들은 준공무원 취급을 받으며 어디를 가든 인정받았다.
“기특하네요.”
고은교의 칭찬을 들은 남선재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정말이지 아주 가끔이나 먹을 수 있는 간식을 먹은 것 같은 개의 표정이었다. 남선재가 어찌나 행복해했던지, 그 감정이 공기를 통해 주변으로 전염되는 것 같은 착시를 불러일으켰다.
“교수님?”
그때, 창백한 손이 고은교의 어깨를 잡았다. 손은 아주 부드럽게 그의 몸을 돌려세웠다.
“……이승우?”
남선재가 깜짝 놀라 얼어붙었다. 이 ‘얼어붙었다’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너무 놀란 나머지 눈이 동그랗게 커진 남선재가 입을 벌리며 고은교와 이승우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뭐야……. 남선재잖아?”
호의가 담긴 건지 아닌 건지 모를 목소리도 뒤따라왔다. 근처에서 모의 게이트 시뮬레이션에 들어가기 위해 장치를 점검하던 우시현이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온 것이다. 그러자 남선재는 그보다 더 놀랄 수 없을 정도로 눈을 크게 뜬 채 우시현을 쳐다보았다.
“이게 지금…….”
말을 하려다 말고 남선재가 입을 딱 닫았다. 그의 표정이 점점 심각하게 변해갔다.
“괜찮습니다.”
당연하지만 고은교는 남선재의 머리 안에서 어떤 우주가 펼쳐지고 있는지 몰랐다. 단순히 그가 첫 실습 때문에 과도하게 긴장하고 있다고 여겼다.
“과제 때도 잘 해냈으니 이번에도 잘 해낼 겁니다.”
“아, 그…….”
“긴장하지 마세요.”
다 안다는 듯 고은교가 남선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격려했다. 남선재는 약간 혼이 빠진 얼굴로 고은교를 올려다보았고, 갈팡질팡하는 눈길로 고은교와 고은교의 어깨 너머를 응시했다.
“교수님, 저도 신 게이트는 처음이에요.”
“이승우 에스퍼는 과제를 잘했는지 못했는지 모르겠는데요.”
냉담하게 대꾸한 고은교가 남선재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시뮬레이션 기기를 이용할 준비를 하기 위해 자리를 떠났다.
고은교의 뒤를 따라가려던 이승우가 걸음을 멈추고 남선재를 흘깃 돌아보았다.
입가에 떠올라 있던 미소는 어느새 씻은 듯 자취를 감추고, 차가운 눈길이 천천히 남선재의 위아래를 훑어본다. 마치 점수라도 매기듯.
그 시선에 기분 나쁠 틈도 없었다. 완전히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남선재가 뭔가를 물어보기 위해 입을 떼었다.
“이승우, 너…….”
“교수님한테 말 걸지 마.”
“……뭐라고 했어?”
이승우의 눈이 살짝 휘어진다.
“알아들었잖아.”
물론 알아들었다. 귀가 있으니까. 하지만 이 말을 남선재가, 이 착한 남자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야, 이승우. 이것 좀 봐.”
이미 고은교를 따라가고도 남은 우시현이 멀찍이서 이승우를 부른다. 이승우는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그대로 남선재를 떠났다.
결국, 그 자리에 남은 건 남선재 하나뿐이었다.
“신-게이트, 모의-시뮬레이션. 150초 뒤 시작합니다. 150, 149, 148…….”
딱딱한 기계음이 모의 게이트 시뮬레이션의 시작을 알렸다. 신 게이트에서 나타날 몬스터는 대부분 전기 충격을 가하는 슬라임 형태로 관측되었다. 당연히 단열 고무장갑이 미리 배부되었고, 모든 이능력자들은 실제 게이트에 들어가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마친 뒤 이 자리에 왔다. 신 게이트일수록 모의 게이트 시뮬레이션의 중요도가 매우 커지기 때문이었다.
약 오 분 동안 대기 명령을 받으며 현장 이능력자들은 근처에 서 있는 팀원들과 소소한 잡담을 나누었다. 잡담 말고는 전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그렇다. 단 세 명으로 이루어진 고은교의 팀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우시현은 예의 그렇듯 짓궂은 장난을 걸고 있었다.
물론 고은교에게.
“우시현 에스퍼, 하지 마세요.”
하지 말란 말에도 기어코 제 손가락에 고은교의 머리칼을 걸고 잔뜩 흩트려놓은 우시현이 시원하게 웃었다.
“이것 봐라. 너무 잘 엉키는데?”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건가?
“우시현…….”
부글거리는 속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고은교가 그를 노려보았다. 고은교의 모발은 몹시 얇고 부드러운 편이어서 이렇게 흩트려놓으면 금세 엉킨다. 잘 풀리지도 않았다.
“알았어, 알았어.”
씩 웃는 얼굴로 한쪽 뺨에 세 줄의 엷은 흉터가 진 남자가 재차 손을 뻗는다. 하지만 그 전에 이미 먼저 고은교의 머리칼을 정리해 주는 손길이 있었다.
“제가 해 드릴게요.”
이승우가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손길은 부드럽고 조심스러웠다. 솔직히 말해, 마치 우시현의 뒤처리를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고은교가 약간 눈가를 찡그리며 이승우를 말렸다.
“이승우 에스퍼, 이건 우시현 에스퍼가 해야 할 일이에요. 지금 버릇을 잘못 들이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제가 해 드리고 싶은걸요.”
그 꼴을 지켜보던 우시현이 비죽 웃었다. 물론, 우시현은 왜 이승우가 나서서 고은교의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우시현에 비해 이승우는 소극적이다. 그 이유는 이러하다. 우시현은 이미 한 번 고은교에게 제대로 미움을 받은 적 있었다. 이승우는 상상도 하지 못할 바닥을 찍고 온 셈이다. 이미 한번 미움을 받았으니, 우시현은 과감하게 행동할 수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모두 하고, 고은교를 어디론가 옮기고 싶으면 덥석덥석 잡아 옮겼다. 안고 싶으면 들어서 안고, 끌고 가고 싶으면 끌고 간다. 고은교는 대부분 체념했다. 어쨌거나 ‘좋은 의도’로 ‘자신을 위해’ 우시현이 뭔갈 했다면, 그게 어떻든 대부분은 그냥 ‘원래 이런 놈이니까……’라는 얼굴로 넘어가는 것이다.
그래, 미움받을 걸 각오하면 그 무엇도 무섭지 않다.
‘얼굴에 흠이 생긴 건 약간 아쉽지만.’
사실 우시현은 자신의 얼굴에 난 빗금 같은 흉터가 꽤 마음에 들었다. 너무 완벽한 외모를 갖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건 좋은 일보다 안 좋은 일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은교가 우시현의 외모를 몹시 좋아했으므로 꽤 신경이 쓰였는데…….
요즈음은 그렇게까지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지.
‘그리고…….’
계속해서 속을 긁으며 약을 올리면, 고은교가 이름을 불러 준다. 비록 화가 난 음성이었지만 ‘우시현’하고 그를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나면 자기도 모르게 좋아하는 또래를 괴롭히는 어린애처럼 굴게 되기 마련이었다.
그때였다.
“아니, 박경호 에스퍼. 장갑 어디 갔어요?”
“아…… 깜빡했습니다.”
“허, 참……. 박경호 에스퍼는 아직 졸업도 안 한 학생인 걸로 아는데. 이렇게까지 기강이 해이해지면 어떡해요?”
이승우의 손길마저 물리고 대충 자신의 손으로 앞머리를 정돈하던 고은교의 시선이 어디론가 홱 돌아간다.
당연히, 그의 에스퍼들의 시선 역시 제 가이드가 향하는 곳을 향했다.
“아오, 씨……. 어차피 시뮬레이션인데 뭐 그리 빡빡하게 합니까?”
“뭐라고요? 지금…… 이게…… 반성하는 태도예요?”
“아, 죄송하다고요.”
그쪽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고은교의 입술에 살짝 미소가 맺혔다.
“……박경호네?”
그의 옆에 서 있던 이승우와 우시현은 고은교가 정확하게 이름을 발음하는 것을 들었다. 그들이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고은교는 반가워하며 그 이름을 부른 게 아니었다. 어쩐지 스산한 느낌의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