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콜 가이드-96화 (96/132)

#96

“이딴 식으로 할 거면 당장 나가요.”

“죄송하다고 했잖습니까. 예?”

“그러니까 이게 죄송한 태도냐고!”

점점 소란이 커졌다. 주변에 있던 이능력자들이 꽤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쪽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박경호가 소속된 곳의 팀장으로 보이는 이능력자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화를 내고 있었다.

“가뜩이나 신삥 많아서 일일이 못 챙기니까 분명히 실수하지 말라고 했죠? 그런데 본인이 잘못해 놓고, 뭐? 아오 씨?”

“…….”

“아까처럼 당당하게 말해 보지, 왜?”

당연하지만 팀장급 정도 되면 온갖 산전수전을 다 겪은 인물들이다. 조금 젊어 보인다고 해서, 혹은 가이드라고 해서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된다. 물론 고은교처럼 예외의 경우가 있을 수도 있지만, 서른 명에 달하는 신입 이능력자를 절반씩 나누어서 케어할 정도면 보통 인사일 리가 없다.

그만큼 햇병아리들을 다루는 데 도가 텄다는 뜻이었다.

“이 새끼야, 입 달렸으면 말해 보라고.”

당연하지만 이 안에서 햇병아리에게 ‘아오, 씨’ 따위의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정도로 녹록한 팀장은 아무도 없었다. 잔뜩 열받은 얼굴로 힘껏 빈정거리는 제 팀장을 앞에 두고, 박경호는 치기 어린 짓을 저질렀다.

“제가 잘못한 건 맞지만, 그래도 새끼라고 하는 건 너무 심하신 것 아닙니까?”

항의를 한 것이다.

시끄러운 소란에도 불구하고 자기 할 말만 하느라 바빴던 사람들마저 조용하게 만드는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뭐?”

혈압이 너무 오르는지 팀장이 목뒤에 손을 대고 몇 번이나 씩씩거렸다. 여기에서 참으면 이 신입은 자신이 정의 구현이라도 한 양 더할 나위 없이 기고만장해질 것이다. 우습게 보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제대로 된 조처를 할 필요가 있었고, 사람들은 기린처럼 목을 쭉 빼며 그가 어떻게 신입을 조질지 본격적으로 구경하기 시작했다.

“야, 너는 진짜 안 되겠다…….”

후, 하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가 들이쉬던 그가 밖으로 손가락질했다.

“나가.”

“…….”

“당장 꺼지라고, 이 새끼야. 누굴 엿 먹이려고, 씨팔……. 나가. 안 나가?”

그 모습을 거기에 있는 모든 이능력자들이 봤다. 당연하지만 자기 일이 아니면 제일 재미있는 게 싸움 구경이고 불구경이다. 신규로 들어온 에스퍼 중 하나를 쳐내는 일이니, 국장으로부터 한 소리 듣겠지만, 고분고분하지 않은 신입이야말로 무슨 사고를 칠지 모른다. 가능하면 초기에 잘라내고 들어가는 것이 현명했다. 현장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으므로.

“아, 진짜 안 돼요? 왜 안 되는데요?”

“그러니까 박경호 에스퍼…….”

뭐, 모든 병아리들이 삐약거리면서 귀엽게 구는 것만은 아니었다. 가끔은 박경호처럼 드물게 천지분간 못 하고 날뛰는 멍청한 녀석들이 있어 줘야 세상의 균형이 맞아 돌아간다.

센터 직원이 곤란한 표정을 짓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박경호는 한국대에서 나온 실습생이었다. 현장 라이선스를 미리 취득하러 온 상급(이 될) 에스퍼이기도 했다. 좋든 싫든 국장의 인가가 떨어졌으니 게이트에 데리고 들어가면 잡음도 안 나고 좋을 텐데, 현장의 입김이 가장 센 팀장에게 쫓겨났으니 다시 그 팀에 들어가라고 하기에도 애매했다.

본래대로라면 박경호는 이쯤에서 현실의 쓴맛을 보고 눈물을 줄줄 흘리며 대학으로 돌아가는 것이 맞다. 초반에는 인성에 문제 있는 놈으로 찍혀 은근히 빈축을 사다, 차차 변한 모습을 보여 주면 조금씩 제 평판을 회복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게 아니면 도태되거나. 어쨌든, 이리저리 구르고 나면 뾰족한 모서리도 둥글게 변하는 법이었다.

“어…… 잠깐만요. 그, 고은교 가이드님? 맞으시죠?”

일부러 이쪽으로 걸어왔다. 난처해하는 시선에 걸리라고. 고은교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센터 직원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교……수님?”

박경호가 매우 미심쩍다는 듯 고은교를 불렀다. 그래, 박경호 역시 고은교를 알아본 것이다.

“잘됐네. 아는 사이셨구나?”

“네. 제가 잠깐…… 가르쳤었습니다. 오랜만이네요, 박경호 학생.”

“……예에.”

제 처지를 아주 모르는 건 아닌지, 박경호가 말끝을 늘리며 대답했다. 아예 박경호를 ‘학생’이라고 부르자 센터 직원의 표정이 확 펴졌다.

“아, 다행이네요! 고은교 가이드님 팀이 소수라고 들었는데. 혹시 이 학생 좀 이번 실습에 끼워 주실 수 있을까요?”

직원의 얼굴은 상당히 간절해 보였다. 빨리 이 일을 해결하고 퇴근하고 싶다는 마음이 가득 담겨 있다고나 할까. 만약 고은교가 안 된다고 하면 박경호에게 바로 ‘이분이 신 게이트에 들어가는 마지막 팀장님이시라서…… 아무래도 안 되겠네요.’라고 말할 게 분명했다.

“네, 그러죠.”

별 기대를 하고 있지 않았던 모양인지, 센터 직원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당연한 일이다. 박경호가 예의 그 ‘불미스러운 일’을 벌인 건 신 게이트에 들어간 모든 팀원들이 모인 자리에서였다. 눈과 귀가 있다면 이 시건방진 햇병아리를 아무도 집어 가지 않을 터였다.

“그럼…… 그렇게 등록해 둘게요. 아이고, 얼른 감사하다고 해요 학생.”

“가…… 감사합니다.”

흡사 센터 직원이 고은교를 보는 얼굴은 ‘신출내기라 그런가, 순진하네…….’라고 쓰인 듯했다. 박경호의 ‘감사합니다’는 ‘감삼니다’로 들릴 정도로 몹시 얼버무리는 발음이었으나, 고은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 역시 감사 인사를 듣기 위해 박경호를 데리러 온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박경호 학생, 지금 잠깐 시간 됩니까?”

“예? ……아, 예.”

‘예’는 반쯤 ‘에’로 들렸다. 누가 봐도 눈앞의 젊은 팀장을 업신여기고 있는 태도였지만, 고은교는 이를 모른 척했다.

“그럼 따라와요. 박경호 학생은 오늘 있었던 신 게이트 시뮬레이션에서 빠진 상황이니, 신 게이트에 들어가기 전에 시뮬레이션 결과지를 받아 두어야 합니다.”

“아…….”

“처음부터 모의 시뮬레이션을 돌려야 하니까 시간이 좀 걸릴 수도 있는데. 괜찮겠습니까?”

그 말에 박경호의 얼굴이 약간 찌그러졌지만, 센터 직원 앞이어서 그런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박경호는 고은교의 뒤를 따라가면서 작년과 지금을 은근히 비교해 보았다.

‘꼬장꼬장한 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고.’

볼품없어 보이는 마른 몸과 재수 없는 얼굴도 그대로였다. 마침 박경호는 고은교에게 앙심을 품은 상태였다. 고은교 때문에 마지막 필수 교양에서 낙제점을 받았다는 이유에서였다.

본래 그 필수 교양 수업은 패스 과목이나 마찬가지인 수준으로 유명했다. 센터에서 나온 가이드들이 수업을 대충 했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상식적으로, 한 번도 누군가를 가르쳐 본 적 없는 일반인이 콧대 높은 한국대생을 가르치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고은교 저 자식도, 지금 보니 현장 이능력자인 것 같은데 그게 아니었다면 한국대생을 그렇게 쥐락펴락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동기 중 몇몇은 그래도 현장에서 도움이 되는 수업이었다며 만족했다지만, 박경호처럼 꿀 빨 생각만 하며 수업을 들어온 동기들은 대부분 낙제점을 받았다. 과제 점수는 그렇다 쳐도 시험 난이도가 미친 수준이었다.

솔직히, 중간고사를 망친 동기들은 전의를 상실했다. 졸업만 하면 탄탄대로가 기다리고 있는 소수의 이능력자가 아닌 이상 대부분이 기말고사도 백지를 냈다. D-를 받아봤자 취업에 지장이 생기니, 차라리 낙제를 받아 재수강을 하자는 의도였다.

‘저 자식 때문에 졸업도 못 했어.’

고작 그 수업 하나를 다시 듣기 위해 한 학기를 더 다녀야 했다. 화요일 두 시간 연강을 제외하고는 텅 비어 있는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졸업이 미뤄진 동기들은 전부 실습을 나갔다.

혹시라도 그 교수 얼굴 마주치면 살인 날 것 같다며, 실습을 나가는 동기들 중 태반은 일반 사기업으로 빠졌다. 남선재와 자신만이 센터로 들어왔다.

“아, 교수님. 퇴근하시는 것 아니셨어요?”

남선재는 지루할 정도로 노력형인 인간이었다. 사람이 요령이 좀 있어야 하는데, 그런 부분이 전혀 없었다. 고은교를 역겨운 스토커로 칭하는 우시현의 면전에서 애매한 표정으로 ‘사람을 소문으로만 판단할 수 없으니, 내가 겪어 보고 판단할게’라고 선언한 녀석이기도 했다.

“아닙니다. 시뮬레이션 더 돌려 보려고요. 선재 군은 왜 가지 않고 있습니까?”

“아, 저…… 저도요. 아까 돌 때 규모를 200:1로 축소해서인지 지리를 잘 모르겠어서…… 모의 시뮬레이션 결과지를 분석하느라 늦었어요. 그, 실례가 아니라면 혹시 저도 같이 할 수 있을까요?”

“안 될 건 없지요.”

승낙이 떨어지자, 헤헤 웃는 얼굴로 남선재가 고은교의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 모습을 보며 박경호는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워낙 고루한 녀석이라, 남선재는 좀 눈치가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고은교처럼 별 볼 일 없는 가이드에게 달라붙다니. 제 인생이니 참견할 건 아니지만, 귀찮게 됐다. 시뮬레이션 안에 들어가서 겸사겸사 고은교에게 앙갚음을 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박경호는 어떻게 남선재의 주의를 돌릴지 고민했다.

그때.

“교수님, 여기 몬스터 수치 좀 봐 주세요.”

박경호의 눈이 부릅 뜨였다. 아까는 백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섞여 있어 몰랐는데, 이승우가 있었다. 그것도 아주 친근하게 고은교를 부르는 모습이었다.

‘꾸, 꿈을 꾸고 있는 건가?’

그의 기억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분명 우시현뿐만 아니라 이승우도 고은교에게 적대감을 드러냈다. 둘 사이가 호전되었다는 건 듣지 못한 사실이었다. 호전된 정도가 아니라, 고은교는 아주 익숙하다는 듯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복잡한 기계판을 조정하러 가기까지 했다.

“남선재는 왜 데리고 왔냐?”

게다가 우시현도…… 있었다. 그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이 눈에 확 뜨이는 미남은 그가 알기로 우시현 하나뿐이었다.

“문제라도 있습니까?”

무심한 얼굴로 대꾸하며 고은교가 몬스터의 수치를 조정했다. 하얀 손가락이 가볍게 숫자 보드판을 누른다.

“동기끼리는 사이좋게 지내야지요.”

99.

맥스 수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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