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콜 가이드-97화 (97/132)

#97

과연 박경호는 힘의 논리에 좌우되는 인간다웠다. 익히 잘 알고 있는 강력한 에스퍼, 이승우와 우시현이 등장하자 찍소리도 못하고 쭈뼛대며 지시에 따랐다.

“저는 동기 별로 안 좋아해요.”

이승우가 농담처럼 말했다. 그 말에 남선재는 약간 웃었지만, 우시현은 전혀 웃지 않았다. 그저 불퉁한 얼굴로 대꾸했을 뿐이었다.

“나도.”

둘 사이가 왜 좋은 것 같지? 고은교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최근 이승우와 우시현 사이는 빈말로라도 그닥 좋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 헬스 사건 때문이었다. 우시현이 몰래 고은교를 독점했던 바로 그 사건.

그 이후로 두 사람은 경쟁적으로 고은교와 시간을 보내려 했다. 물론 서로를 배제한, 독점적인 경쟁이었다. 고은교의 협조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 경쟁은 번번이 실패로 끝나곤 해서 그들 사이의 골은 더더욱 깊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남선재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고은교가 신호를 보내자, 총 네 명의 이능력자가 모의 게이트 시뮬레이션 기기 안으로 들어갔다. 지형은 여전히 200:1 비율로 축소한 상태에서 진행될 예정이었다. 어쨌든 다시 한번 더 게이트를 클리어해 보는 건 분명 모의로 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도움이 될 것이다.

“신-게이트, 모의-시뮬레이션. 150초 뒤 시작합니다. 150, 149, 148…….”

그의 시선이 박경호의 맨손에 가 닿는다.

“오늘은 어쩔 수 없지만, 내일은 꼭 장갑 챙겨 오세요.”

“아…… 예.”

박경호가 부루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답을 들은 고은교는 별다른 표정 없이 정면을 주시했다.

잠깐.

‘……신 게이트에 들어가는 건 다음 주인데?’

박경호의 표정이 약간 아리송해진다.

‘착각했나 보네.’

애초에 고은교를 우습게 보고 있던 박경호는, 고은교의 말이 실수라고 생각했을 뿐 그 안에 저의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사실, 알았다 하더라도 고은교의 얼굴이 워낙 평이했으니 그럴 거라 짐작도 못 했다는 것이 옳았다.

‘그나저나…… 아직도 스토커 짓을 하고 있는 건가?’

남선재야 중간에서 만나기도 했고, 본래 고은교에게 알랑방귀를 뀌던 스타일이었으니 동행할 수도 있다고 치지만 이승우와 우시현은 아니었다. 생각보다 두 사람이 고은교에게 호의적인 걸 보니, 어떻게 잘 꾀어낸 것 같기는 한데…….

고은교의 입장에서는 시시각각 변하는 박경호의 넙데데한 얼굴이 웃기기만 할 뿐이었다. 손에 쫙 달라붙는 장갑을 끼며 그는 가볍게 박경호를 곁눈질했다.

불민한 청강생을 위해 다시 교수 노릇을 해 주어야 할 시간이었다.

*

“헉, 헉……. 아니, 왜 이렇게, 헉, 빨리, 갑니까?”

처음 신 게이트가 눈에 들어왔을 때, 박경호는 게이트 안을 구경하느라, 그리고 자신을 제외한 세 사람의 눈치를 보느라 어느 정도 입을 닫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침묵한 채 아무런 설명 없이 달리기만 하자, 결국 불만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건…….”

“선재 군, 정면.”

“아, 네.”

고은교는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를 줄이기 위해 말을 초장에 잘랐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남선재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신 게이트의 환경은 무성한 숲속이었다. 슬라임이 서식하기 좋은 환경이었다. 습하고, 그렇지만 무덥진 않고, 여기저기에 호수와 웅덩이가 괴어 있었다. 몬스터가 어디서든 충분히 수분을 보충할 수 있도록.

처음 시뮬레이션에 들어오지 않은 박경호는 모르겠지만, 첫 번째 구역에서는 슬라임이 출몰하지 않았다. 시간 낭비를 할 필요는 없었으니 속성으로 통과한 것이지 굳이 박경호를 괴롭히기 위함은 아니었다.

“끝이 보이네요.”

고은교를 안고 이동하던 이승우가 말했다. 남선재에게 뭔가를 더 말하려던 고은교의 시선이 저절로 앞을 향했다.

“그렇군요.”

네 명의 이능력자가 첫 번째 구역을 주파하는 데는 정확히 십 분이 걸렸다. 본 게이트에 들어가면 똑같은 속도로 달려도 3시간 20분이 걸린다는 의미였다.

‘박경호 때문에 좀 느리긴 했지만.’

그래도 두 번째로 보니 게이트의 규모가 얼마나 큰지 확실히 알겠다. 얼굴 주위를 쏜살같이 지나쳐 가는 나무들은 온통 푸릇푸릇했다.

이승우와 우시현은 원소 계열의 최상급 에스퍼로, 특히 이승우는 바람 계열이라 속도가 몹시 빨랐다. 특이한 건 남선재 역시 이들에게 뒤처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예전, 고은교는 출석부를 통해 남선재의 에스퍼 등급이 C급이라는 걸 확인했다. 그렇지만 당시 학생들의 반응이 왜 남선재가 C급이냐고 수군거리던 것으로 보아……. 아마 모종의 이유로 자신의 등급을 숨긴 모양이었다.

‘등급만 숨긴 건 아닌 것 같았지.’

몇 달 된 해묵은 기억이 슬금슬금 떠오른다. 착하게 보이면서도 남선재에게는 아리송한 구석이 있었다. 하는 말이 묘하게 맞지 않는다는 건 뭘 해도 사람을 의뭉스럽게 보이도록 만들기 마련이다.

“하실 말씀 있으세요?”

남선재가 살짝 몸을 붙여 왔다. 공손한 어투는 물론이었다. 고은교는 남선재의 바로 이런 일관적인 태도가 경계심을 누그러뜨린다고 생각했다.

“조심해야지.”

“아, 미안.”

이승우가 불쾌한 티를 내자, 남선재가 곧바로 사과한다. 그리고 고은교를 조심스럽게 바라보는 눈길.

“없습니다. 괜찮아요.”

“네.”

대답과 함께 남선재가 제자리를 찾아간다.

고은교는 가이드이기 때문에 에스퍼들의 속도를 맞출 수 없었다. 현재 이승우는 고은교와 함께 이동하는 중이었다. 그가 바람 에스퍼였기 때문에 기동성 측면에 있어 남들보다 유리했기 때문이다.

그 말은 남선재가 근처에 왔다고 해서 특별히 예민하게 굴 필요가 없다는 뜻인데.

“이승우 에스퍼. 괜찮습니까?”

혹시 컨디션에 문제가 있나 싶어 몸을 돌려 이승우의 얼굴을 살피자, 입꼬리가 살짝 솟는 게 보인다.

“머리가 조금 아픈 것 같아요.”

표정과 말이 다르다. 꾀병을 부리는 걸 보니 멀쩡한 듯했다.

“자, 잠깐! 잠깐!”

그때 뒤에서 간신히 따라오던 박경호가 소리를 질렀다. 자연히 다른 에스퍼들의 속도가 늦추어졌다.

“젠장, 왜 이렇게 빨리…… 헉, 헉. 가느냐고요. 예?”

“아…… 씨발.”

무표정한 얼굴로 선두를 달리던 우시현이 돌아왔다. 고은교는 그쯤에서 우시현의 인내심이 박살났다는 걸 알았다.

“아까부터 자꾸 입 못 벌려서 지랄이야. 영원히 입 못 열게 해 줘?”

욕설을 얻어먹은 박경호는 바로 깨갱하고 닥쳤다.

“1 구역에서는 몬스터가 나오지 않습니다.”

고은교가 짧게 설명했다.

“지금 우리는 최대한 신 게이트 작전에 맞추어서 시뮬레이션을 진행하고 있는 중입니다.”

“헉, 헉…….”

“질문 더 있습니까?”

그 말에 박경호의 얼굴에 난색이 떠올랐다. 박경호는 육체 강화 계열 에스퍼였기 때문에 이런 속도전에는 불리했다. 속도보다는 힘에 치중되어 있는 능력이라는 뜻이다.

“헉, 어차피, 허억, 시뮬레이션인데, 빡빡하게 할, 필요가…….”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소심하게 중얼거리는 것을 물끄러미 보던 고은교가 대꾸했다.

“그런 정신머리로 게이트에 들어갔다간 죽어도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아니, 무슨 그런…….”

황당한 듯 박경호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고은교는 여전히 평이한 태도였다.

“박경호 학생은 내 수업을 안 들었습니까? 시뮬레이션은 실전처럼 하라고 했을 텐데요.”

“…….”

“모두 다시 정면 보세요.”

이견을 허락하지 않는 단호한 태도에 남은 에스퍼들은 미적거리지 않고 속도를 올렸다.

전투에 참여하지 않거나 독단으로 행동하면 그것들이 전부 시뮬레이션 결과서에 찍혀 나오기에 박경호 역시 눈물을 머금고 입에 단내가 나도록 뛸 수밖에 없었다.

2 구역을 지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슬라임들이 조금씩 출몰하기 시작했다. 고은교가 수신호로 에스퍼들을 멈춰 세웠다.

“전투 준비.”

“헉, 허억……. 아니, 이렇게 무식하게 뛰고, 어떻게 바로, 헉, 전투를…….”

정말 불평이 많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고은교는 담담한 어투로 덧붙여 설명했다.

“박경호 학생에게 많은 걸 기대하지는 않아요. 시뮬레이션은 네 시간 뒤에 종료되니까, 이번에 우리가 어디까지 갈 수 있나 한번 보는 겁니다.”

그 말에 박경호가 얼굴을 확 일그러트렸다. 자신은 타고나기를 B급 에스퍼였다. 이곳은 신 게이트라고는 하지만 B급 게이트였고, 시뮬레이션인지라 본래 몬스터보다 훨씬 약할 터였다. 그런데 어딘지 자신을 얕잡아보는 듯한 말투가 몹시 신경 쓰였다. 그리고, 어디까지 갈 수 있나 보는 거라니……. S급 에스퍼가 둘이나 있는데 말이 되는 소리인가?

박경호가 이렇게까지 반응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클리어를 안 하면…… 결과지가 안 나오잖아!’

보스까지 잡지 못하면 모의 게이트 시뮬레이션 결과서 자체가 출력되지 않는다. 당연하지만, 신 게이트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 결과서가 꼭 필요했다. 대부분 게이트에 들어갈 때 모의 게이트 시뮬레이션 결과서는 대체로 눈감아 주는 편이었지만, 박경호의 경우에는 하나라도 미달일 경우 그를 곱게 보지 않은 팀장 중 하나가 이를 걸고넘어질 게 뻔했다.

고작해야 슬라임이었다. 박경호는 자신의 힘을 과신했다.

2 구역에서 사람 냄새를 맡고 천천히 몰려들기 시작하는 슬라임을 보며, 에스퍼들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서로를 등졌다.

그리고…….

“어억!”

단말마를 지르며 박경호가 고꾸라졌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우시현이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리며 발끝으로 박경호를 툭 쳤다. 당연했다. 아무리 진짜처럼 보여도 이곳은 시뮬레이션 기기 안이었고, 충격이 온다 하더라도 절대 정신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슬라임은 잡기 까다롭지만, 이렇게 한 번 덮치는 걸로 B급 에스퍼가 기절을 한다는 건…….

“흠.”

그 순간 슬라임이 펄쩍 뛰어올라 이승우의 머리 위를 노렸다. 머리털이 삐죽 설 정도로 강력한 에너지였다.

“경호 군이 기절했으니, 일단 시뮬레이션을 종료합시다.”

고은교가 태연히 말하며 시뮬레이션 긴급 종료 명령어를 발동했다.

“파워를 조금 낮춰야겠는걸.”

그가 흘리듯 중얼거렸다. 물론, 남은 에스퍼들은 모두 그 중얼거림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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