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콜 가이드-98화 (98/132)

#98

*

“허, 허억!”

방 한구석에 눕혀져 있던 박경호가 외마디 신음을 뱉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상황 파악을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는, 곧 기절하기 직전 상황이 떠올려 낸 듯했다.

“정신이 듭니까?”

근처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박경호가 인상을 구겼다.

“몬스터. 몬스터가…….”

잔뜩 얼굴을 일그러트린 채 웅얼대던 그가 고개를 번쩍 들어 고은교를 쳐다보았다. 정확히는 노려보았다.

“어딜 야리냐?”

그리고 고은교로부터 한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 우시현이 비딱하게 서서 박경호를 쳐다보고 있었다. 반쯤 일어난 박경호가 반사적으로 입을 닫았다가, 억울하다는 듯 고개를 치켜든다.

“아니……. 야, 우시현. 너도 봤잖아. 어? 저 인간이 마지막으로 시뮬레이션 기기 조작한 거!”

정답이었다. 고은교는 특별히 숨기는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박경호 학생에게 그렇게 무리일지는 몰랐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멀쩡한데, 학생만 기절하더군요.”

“……뭐, 뭐?”

최약체 취급을 당한 박경호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게졌다. 실제로 박경호가 기절하자마자 시뮬레이션을 긴급 종료했으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이거…… 사람 주, 죽이려고 한 거 아닙니까? 위험한 거 아니냐고요!”

이대로 넘어갈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박경호가 목소리를 높였다. 물론 고은교는 여전히 태연한 얼굴이었다.

“안 죽습니다.”

“그러니까, 죽으면 어떡할 거냐고!”

“가이드도 안 죽는데 에스퍼가 죽으면 곤란하지요.”

뺑소니라도 당한 양 고래고래 목소리를 높이던 박경호가 주춤했다. 이까짓 시뮬레이션은 수백 번도 더 돌려 봤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팔짱을 낀 채,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는 시선이 압도적이었다.

문득 몇 달 전에 듣던 수업이 떠오른다.

강의 첫날, 박경호를 위시한 학생들은 고은교를 은근히 깔봤다. 강의 계획서를 가지고 질 나쁜 질문을 던지면서도 그게 잘못된 일인 줄 몰랐다. 오히려 정의의 사도라도 된 양 고은교가 당황하는 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하지만 고은교는 생각처럼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깐깐하게 수업을 이어 나가는 기백에 학생들이 주춤한 것은 당연한 순리였다. 그가 차라리 악만 남은 무능력자였다면, 남선재의 훼방이 아니었더라면 꽤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생겼을 수도 있는데…….

“내일 다섯 시.”

무신경한 얼굴로 휴대 전화를 내려다본 고은교가 말했다.

“시간 맞춰서 오세요. 늦어서 신 게이트 시뮬레이션을 돌리지 못하면 내가 아니라 박경호 학생이 곤란해질 겁니다. 그렇죠?”

“…….”

그제야 박경호는 시뮬레이션을 시작하기 전, 고은교가 ‘내일은 장갑을 챙겨 오라’고 한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

애초부터 고은교는 시뮬레이션 한 번으로 끝낼 생각이 없었던 거다.

앞으로 무슨 일이 펼쳐질지 알 수 없지만, 시뮬레이션 결과지를 받아내려면 고은교가 원하는 대로 따라가야 했다.

“그럼.”

틀린 말은 절대 하지 않는 입이 단호하게 일정을 알렸다. 박경호는 이를 갈면서도 감히 고은교에게 덤벼들 수 없었는데, 금방이라도 자신의 뒤통수를 후려칠 것 같은 우시현이나 경고라도 하듯 지그시 자신을 바라보는 이승우의 시선 때문이었다.

‘이게 도대체 뭐냐고.’

박경호의 얼굴이 황망해진다.

이튿날 오후 3시.

고은교는 두 시간 일찍 센터에 도착했다. 신 게이트는 흔치 않은데다 이번에 인원이 워낙 많았으니 미리 예약해 두지 않으면 제때 모의 시뮬레이션을 돌지 못할 수도 있었다.

어차피 박경호의 일이 아니더라도 그는 신 게이트 모의 시뮬레이션을 여러 번 돌릴 계획이었다. 이미 알고 있는 게이트라면 족히 몇백 번은 돌았으니 굳이 여러 번 돌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지만, 신 게이트라면 말이 다르다. 일단 클리어하기 전까지는 부산물의 가치가 어떤지 모르는 데다, 기본적으로 신 게이트를 무사히 클리어하면 그만큼 실적이 오른다. 센터로부터 받는 인센티브의 금액이 달라진다는 말이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신 게이트에는 특전이 있었다. 몬스터를 공략하는 현장 이능력자만이 체감할 수 있는 특전.

‘경험치가 뻥튀기되지.’

수치로 따지면 약 두 배 정도다. 그야말로 상급 이능력자의 눈에 생기가 돌게 하는 요소들이었다. 당연하지만 게이트의 ‘새로움’이라는 요소 또한 공략의 재미를 더했다. 베테랑인 자신도 ‘신 게이트’라고 하면 사족을 못 쓴다는 소리를 종종 들었으니까.

“고은교 가이드님, 이미 예약되어 있으신데요?”

“네?”

“팀원분께서 먼저 들어가셨다고 적혀 있네요.”

그의 에스퍼 중 하나가 이미 도착한 걸까? 그러고 보면 어젯밤 이승우가 평소와 달리 굳이 데리러 오겠노라 고집을 부렸다. 틈만 나면 그러고 싶어 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게까지 끈질기게 달라붙은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우시현에게도 집 주소를 알려 준다고 하니까 수그러들긴 했지만…….’

이제는 이승우와 우시현을 다루는 법을 조금 알게 되었다. 그건 고은교가 이승우라는 사람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잘 자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어쩐지 평소와 다른 듯해서 조금 찜찜했다. 차라리 이승우가 일찍 왔다면 다행인 셈이다. 어젯밤 걱정이 기우인지 아니면 정말인지 판단할 수 있을 테니까.

“아, 교수님 오셨어요.”

막 문을 열고 들어가자 쌀쌀한 초봄 특유의 공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멋쩍은 표정으로 창문을 열어젖히던 남선재가 이쪽을 돌아본다. 쿰쿰한 공기를 환기시키려는 노력은 보통 모범생들의 전유물이다.

이승우가 아니었다.

잠깐 멈춰 서 있던 고은교가 언제 그랬냐는 듯 담담하게 인사를 건넸다.

“일찍 왔네요.”

“네.”

남선재의 얼굴 위로 청량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를 봐서 정말 좋다는 듯. 간밤에 기대하고, 설레던 일이 있었다는 것처럼.

열심히 하는 건 좋은 일이었다. 약간은 기특하고, 또 약간은 흐뭇했다. 그가 기대하는 신입의 자질을 남선재는 모두 갖추고 있었다. 그가 교수였던 시절, 학생들에게 가졌던 기대를 갖추었던 것처럼.

“혼자서도 해 보고 싶어서요. 그, 제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기기 조작법, 알려 주실 수 있으세요?”

“그래요.”

고은교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계판 옆에 서 있는 남선재에게 고갯짓을 하자, 남선재가 순순히 그 앞으로 간다.

“여기까지는 알겠어요. 그런데 게이트 정보를 받아올 때, 어떤 경로로 접속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신입이라면 모르는 게 당연했다. 남선재는 자신이 모르는 부분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 있었다. 이러면 가르치는 입장에서도 뭔가를 알려 주기가 쉽다. 고은교는 선뜻 남선재의 뒤편에 서서 팔을 뻗어 조작키를 눌렀다. 남선재가 약간 놀라 고은교를 돌아본다.

“앞을 보세요. 선재 군.”

가까이에서 본 남선재는 생각보다 키가 컸다. 월등히 키가 크다고 느껴지는 이승우나 우시현보다는 작은 것 같았지만, 그래서인지 인상이 훨씬 귀엽게 느껴졌다. 다른 에스퍼들에 비해 딱딱한 호칭이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무의식이 남선재를 보살펴야 하는 존재로 인식한 것 같았다.

그게 썩 싫지만은 않았다.

남선재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약간 난처한 얼굴로 고은교를 응시했다. 고은교의 두 팔 사이에서 이도 저도 못하는 꼴이다.

“앞을 보라니까.”

약간은 책망 어린 말에 부끄러웠는지 남선재가 살짝 뺨을 붉혔다. 하지만 고은교에게 이런 자세는 좀 그렇다든지, 아니면 옆에서 알려 줄 수는 없냐고 물어보지는 않았다. 대신 잠자코 고은교의 지시를 따랐다.

센터의 인프라에 대하여 간략히 알려 주고 나자, 남선재는 낯선 지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금세 고은교의 말을 스펀지처럼 흡수했다. 그야말로 가르치는 보람이 있는 학생이었다.

“아, 이렇게 하면 되네요. 저장되어 있는 게이트 정보를 다 불러올 수 있는 건가요? 신기해요.”

“시뮬레이션 기기는 유용한 편이죠.”

착하게도 고은교의 팔 아래에서 남선재는 순종적이었다. 고은교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고, 남선재가 자신의 눈을 들여다보며 환하게 미소 지었을 때 머리 대신 어깨를 토닥여 주려고 손을 뻗었다. 남선재가 허리를 굽혀 고은교의 손에 제 머리를 가져다 대지 않았다면 아마 이번에도 어깨를 토닥이고 말았겠지만…….

“머리 만지고 싶어 하시는 거 같아서요.”

이제 쑥스러워하는 남선재의 표정은 익숙하다. 그는 내심 약간 당황한 채로 남선재를 바라보다가, 그의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조금 쓰다듬었다.

남선재의 성격이 아주 온화하고 착해서 머리카락도 부드러울 줄 알았는데.

‘……약간 거칠거칠하네.’

탈색과 염색을 반복한 탓인지 녹아내릴 듯 부드럽지는 않았다. 그런데 오히려 거친 듯한 감촉이 묘하게 중독성이 있었다. 남선재가 얼마든지 더 만지라는 듯 계속해서 허리를 굽히고 있지 않았다면, 딱 한 번만 쓰다듬었을 텐데.

그는 꽤 오랜 시간 머뭇거리다가…… 남선재의 머리를 한 번 더 쓰다듬었다. 이번에는 그의 앞머리만 조금 쓰다듬고 마는 게 아니라 뒷머리까지 매만졌다. 강아지에게 하듯이 여러 번 토닥이고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넣었다. 순종적으로 고은교의 손길에 머리를 맡기던 남선재가 가볍게 고개를 기울여 그의 손에 머리를 기댄다.

그래, 고은교는 이런 관계에 익숙했다.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기다리면서, 주위를 맴돌면…… 그걸 눈치챈 자신이 손을 내미는 관계 말이다.

그건 안정적이고 자연스러웠다. 어쩔 수 없이 손을 내밀었을 때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꼭 붙드는 손 같은 게 그리웠을지도 모른다.

“……언젠가 교수님과 마주치면 꼭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었어요.”

어색하게 손을 떼어 내자, 기분 좋은 듯 살짝 눈을 감고 있던 남선재가 말했다.

“그게 뭡니까?”

“그 전에 질문 먼저 해도 괜찮을까요?”

질문?

거친 감각이 남아 있는 손끝을 말아쥐고 남선재를 바라보자, 남선재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혹시…… 괴롭힘을 당하는 중이세요? 그러니까 우시현, 이승우한테서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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