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콜 가이드-99화 (99/132)

#99

그 말이 어찌나 당혹스러웠던지, 고은교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한창 괴롭힘을 받고 있던 시절, 이 말을 들었다 할지라도 그랬을 것이다. 남선재의 손길은 위안이 되어 주었겠지만, 고은교는 언제나 자신의 일을 스스로 처리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으니.

그리고 사실, 선재에게 그 일에 대해 논의하는 것도 우스운 그림이었을 것이다. 남선재는 이승우와 우시현의 동기였다. 고은교에게는 이렇다 할 괴롭힘의 물증이 없었다. 그를 향한 악의가 직접적으로 쏟아지기 전까지는. 그리고 남선재가 택한 것은 보호와 은폐였다. 적어도 자신이 느끼기에는 그랬다.

결과적으로 시간이 빠르게 흘러 고은교는 대학을 떠나게 되었고, 강의를 무사히 마무리했다.

다시 말해, 이제 와서 남선재에게 기대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뜻이었다.

“역시 그런…… 건가요?”

그런 고은교의 반응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남선재의 얼굴이 확 어두워졌다. 그때의 일이 남선재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걸까? 고은교는 조금 난처한 심정으로 남선재를 응시했다. 자신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면 그럴 필요가 없었다. 고은교는 이미 두 녀석들을 품에 들이기로 결정한 바 있었다.

남선재는 바로 그 지점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고, 고은교가 그들을 곁에 두는 것을 외부의 요인 때문이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도움이 필요하시면 말씀해 주세요. 어떻게든 도와 드릴게요.”

“…….”

“협박이라도 당하시는 거예요? 지금 여기는 아무도 없어요. 혹시 너무 불안하셔서 그런 거라면, 고개만 끄덕이…….”

“선재 군.”

입을 좀 다물고 있었더니 혼자서 앞질러 간다. 브레이크를 걸어 주기 위해 그가 손을 내밀어 남선재의 머리를 토닥였다.

“괜찮아요. 아무 문제 없습니다. 이승우 에스퍼와 우시현 에스퍼는…… 굳이 말하자면 내가 원해서 내 목록에 있는 겁니다.”

그래, 정말이지 ‘굳이’였다. 그들과의 깊고도 얕은 관계를 설명할 필요는 없으리라. 다만 그렇게 말하는 순간, 말이 입을 통해 밖으로 나가면서 구체화되는 기분이었다.

자신이 언제 에스퍼들을 원한 적이 있었나?

그들을 원한다고 말하자 그렇게 되는 기분이었다. 몹시 묘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야 확실히 그렇다는 걸…… 알겠다. 처음에는 그토록 격렬히 밀어내고, 절대 자신의 목록에 들일 리 없다고 거듭 강조하여 생각했었는데.

결국에는 손을 뻗게 됐지. 고은교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승우와 시현이에게도 내가 필요하고.”

“…….”

“불필요한 오해는 질색입니다.”

“……네.”

남선재는 착하게 대답했다. 그의 얼굴에 수심이 어리는 걸 알았기에 조금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생각을 정리하는 건 자신이 아닌 남선재가 해야 할 일이었다. 그가 남들에게 해 주는 말은 언제나 잘 정리된 명료한 사실이었고, 그 이상으로 부가적인 설명은 해 본 역사가 없었다.

‘아, 딱 한 번 있지.’

교수 생활을 했을 때.

남선재의 동그란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고은교가 그의 머리에서 손을 떼어 냈다. 남선재에게 유독 친절해지는 것은 그가 장이주였던 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켜서도 맞지만, 교수였던 시절을 강하게 복기시키기 때문이 더욱 컸다.

“그래도 지켜드릴 수 있게 해 주세요.”

물러가는 손에 시선을 주던 남선재가 말했다. 그 목소리엔 약간 힘이 빠져 있었다.

“그래서 굳이 신 게이트 시뮬레이션에 따라온 겁니까?”

“…….”

“어쩐지.”

어제, 신 게이트 시뮬레이션이 끝나고도 떠나지 않고 미적거렸던 이유는 고은교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정말 신 게이트에 깊은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남선재는 보기 드물게도 정의감이 넘치는 청년이었다. 이미 그는 고은교가 순탄치 않은 교수 생활을 보냈음을 목격한 바 있다. 고은교의 눈에 남선재가 밟혔던 것처럼, 남선재 역시 고은교를 본 순간부터 자신의 동기들이 그를 또 한 번 괴롭히고 있을까 봐 못내 걱정스러웠던 게 틀림없었다.

“그렇게 해서 선재 군의 마음이 편해진다면, 그렇게 해요.”

착한 기질은 사람의 태도를 무르게 만들었다. 고은교는 스스로가 남선재에게 보여 주는 다정한 낌새에 놀랐다. 정작 남선재는 묵묵히 눈을 내리깔고 있느라 이 드문 태도를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네, 감사합니다.”

대답과 인사를 빠트리지 않는다.

*

모든 인원이 제때 모이고, 그들은 정확한 시각에 모의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몬스터 수치는 어제보다 딱 반절 더 깎았다. 그 말인즉슨 몬스터의 일격에 기절할 정도는 아니지만, 시뮬레이션이 더럽게 어려운 건 그대로라는 뜻이다.

‘난이도 조절은 원래 힘들지.’

시험 문제를 내던 몇 달 전에도 뼈저리게 느꼈던 것이었다.

“이제 더는 못 참아!”

씩씩대며 박경호가 포효했다.

그는 벌써 우로 백 회, 좌로 백 회, 앞으로 뒤로 각각 오십 회씩 굴러다닌 참이었다. 물론 자의가 아닌 타의로.

이번 시뮬레이션에서는 어제처럼 기절할 정도의 충격이 덮쳐오지는 않았지만 얄짤없이 전신을 두들겨 맞아야 했다.

약삭빠르게 피해 다니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박경호는 슬라임을 잡을 정도로 능력이 뛰어나지 못했으니 (진짜 게이트에서는 충분히 잡을 수 있겠지만, 지금 슬라임의 파워는 두 배나 상승해 있었으므로) 몰이꾼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문제는 슬라임이 군집 생활을 하는 몬스터였다는 거다. 슬라임의 수는 너무 많았고, 아차 하는 순간 몰려든 슬라임에게 몽둥이찜질을 당하는 일이 몇 번이나 있었다. 신 게이트에 들어가야 현장 라이선스도 따고, 실습도 인정이 되니 어떻게든 이를 악물고 제 역할을 해내려나 싶었지만…….

결국 시간 초과로 시뮬레이션을 클리어해내지 못했다. 정확하게는 보스 방 근처에도 못 갔다.

누구 때문이겠는가? 마음대로 시뮬레이션의 난이도를 상향시킨 고은교 때문이 아니겠는가? 시뮬레이션 기기 밖으로 나온 박경호가 고은교를 향해 삿대질했다.

“아니지. 이제 교수도 아닌데 안 참아!”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고은교가 고개를 돌려 시뮬레이션 결과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몬스터의 파워를 높이자 몬스터와 꾸준히 교전하게 되었다. 본래대로라면 순식간에 몬스터가 토벌되고 게이트가 끝났으리라. 이런 식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리면, 처음 보는 몬스터의 공격 패턴을 읽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나를 무시해?”

박경호가 잔뜩 화가 나서 성큼성큼 고은교에게 다가서려다, 우시현에게 가로막혀 크게 비틀거렸다. 우시현이 박경호를 거만하게 내려다보며 이죽거린다.

“뭐 하냐?”

분노에 이성을 잃었는지, 박경호가 우시현에게도 쏘아붙였다.

“너는, 너! 너도 씨발, 저 새끼한테 찍소리도 못하고!”

우시현은 그 말에 기분이 나빴는지, 자신에게 와락 달려드는 박경호를 발로 뻥 걷어찼다. 네 시간 내내 시뮬레이션 기기 안에서 고생할 대로 고생한 박경호가 뒤로 홱 나뒹굴었다.

“뭐 이 새끼야?”

인상을 쓴 우시현이 제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 넘기면서 잠깐 생각해 보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생각보다 쿨한 인정에, 벌게진 얼굴로 박경호가 고개를 홱 치켜들었다.

“거 봐!”

우시현이 콧방귀를 뀌었다.

“근데?”

다시 자신의 멱살을 잡으려 드는 박경호를 한 번 더 뻥 걷어차 주는 건 덤이었다.

B급 게이트 몬스터치고 수는 많았지만, 패턴은 무척 단순했고 속도도 느렸다. 슬라임의 공격 패턴을 다 분석한 고은교가 고개를 들고 이 한심한 광경을 바라보았다. 박경호는 자신을 괴롭히기 위해 일부러 시뮬레이션을 어렵게 한 것이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는 것 같았지만, 고은교는 평소 자신이 하는 루틴을 따랐을 뿐이었다.

“어차피 박경호 학생은 내가 교수였을 때도 안 참았잖아요?”

“이, 이 새끼가.”

그 말에 박경호는 이를 꽉 악다물었다. 정확히는 그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애초에 남선재와 이승우가 고은교의 근처에서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데, 그보다 훨씬 앞에 서 있는 우시현조차 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패턴 분석은 끝났으니, 내일은 수치 변동 없이 시뮬레이션을 진행하도록 합시다.”

“그래도 되나요?”

이승우가 걱정스럽다는 듯 되물었다.

“지난번에 몇 번은 더 하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이 정도로 괜찮습니다. 워낙 패턴이 단순한 몬스터여서.”

“역시 베테랑은 다르시네요.”

아부는. 부드럽게 살금살금 흘려 넣는 목소리를 끊으며, 고은교가 박경호를 정확히 바라보고 말했다.

“우리야 이쯤에서 끝내도 되지만, 박경호 학생은 모의 시뮬레이션 결과지가 필요할 테니까요.”

그래, 처음부터 칼자루를 쥐고 있는 건 저쪽이었다. 고은교를 비롯한 에스퍼들은 이미 첫날 한 시뮬레이션으로 인해 기본 조건을 충족했다.

‘씨발!’

박경호만 제외하고.

박경호가 애꿎은 허공에 화풀이를 했다.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던 고은교가 시뮬레이션 기기를 종료했다. 그러고 난 다음, 주저앉아 있는 박경호에게 다가갔다. 씨근덕대는 넙데데한 얼굴이 고은교를 쳐다본다.

고은교는 평이한 어투로 박경호 학생, 하고 그를 불렀다.

“아무래도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

“아무도 억지로 박경호 학생에게 이 팀에 들어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박경호 학생이 없었어도 나는 이렇게 모의 시뮬레이션을 하면서 몬스터의 공격 패턴을 분석했을 거예요. 굳이 학생을 괴롭힐 의도 같은 건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

물론 박경호가 예쁜 녀석이라 일일이 사정을 봐주고 싶었던 건 아니었기에, 이리저리 구르는 걸 방관하긴 했지만.

“계속 이렇게 무례하게 굴어서 박경호 학생이 취할 수 있는 이득은 뭡니까? 억울하고 분하면 그만큼 능력을 보여 주어야죠. 아무도 경호 군을 무시할 수 없도록 말입니다. 애초에 박경호 학생이 원래 있던 팀에서 퇴출된 이유도 본인이 장갑을 챙기지 않아서잖아요?”

기본적으로 그는 자신이 교수였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박경호를 ‘에스퍼’라고 부르는 대신 ‘학생’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그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함이었지 박경호를 깔보기 위함은 아니었고.

‘이 나이 먹고 햇병아리를 굴리면서 희희낙락할 수는 없으니.’

자신은 할 일을 했을 뿐인 것이다.

그게 느껴졌는지, 이후로 박경호의 기세가 확 꺾였다. 그다음 날 있었던 시뮬레이션은 불과 두 시간 만에 종료되었다. 최상급 에스퍼들이 아낌없이 능력을 사용한 덕분이었다. 몬스터의 파워 수치를 정상화하자 게이트를 클리어하는 속도가 대단히 빨라졌다.

‘규모가 크지 않으면 순식간에 끝났겠는데.’

그래, 하지만 규모가 커도 너무 컸다.

3월 16일, 오전 10시 00분.

신 게이트.

“키야…… 공기 죽인다.”

“김 팀장님, 그렇게 말하지 좀 마세요. 진짜 아저씨 같아요.”

“사십이면 아저씨 맞거든.”

이번 신 게이트 작전을 수행할 팀원에는 서른 명 정도의 신입 에스퍼와 실습생들이 있었다. 따라서 혹시라도 있을 미연의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센터에서는 과도할 정도의 인력을 쏟아 부었다.

클리어하는 데 어려움은 없겠지만, 팀원들의 수가 많은 만큼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언제 어디서 사고가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적당히 긴장감 어린 분위기 속에서 백 명의 이능력자들이 게이트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그들을 맞이한 건 탁 트여 있는 거대한 들판이었다. 바람이 부는 방향대로 평화롭게 이리저리 흔들리는 갈대 우림과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 이름 모를 풀꽃 무더기와 흰색의 납작한 버섯들,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오자 깜짝 놀라 포르르 날아오르는 작은 새까지.

‘여기가 제1구역…….’

관광지로 써도 쓸 만하겠는데.

물론 감상에 오래 빠질 시간은 없었다. 1구역은 몬스터가 출몰하지 않으므로 팀원들은 빠르게 첫 번째 구역을 돌파했다.

이쪽에는 최상급 에스퍼가 둘이나 있었기 때문에 현재 고은교는 이승우의 품에 안겨 선두를 내달리고 있었다. 남선재는 본래 자신의 팀으로 돌아갔기에 근처에 없었다. 죽을 맛인 건 박경호였다. 본래 있던 팀에서 퇴출당했기 때문에 고은교의 팀 소속으로 선두에서 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헉, 헉…….”

그래도 시뮬레이션에서 죽어라 구른 덕분이었을까? 아니면 대인원이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시뮬레이션보다는 덜 빠르게 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그나마 따라잡기 수월하다는 느낌이었다.

“정지.”

고은교가 가볍게 손을 들어 수신호를 보냈다.

사실, 고은교 같은 신출내기 팀장은 번번이 무시당하기 마련이다. 다만 그가 거느리고 있는 최상급 에스퍼가 둘이나 됐고, 미친놈처럼 실적을 내고 있다는 소문이 있어 다들 겉으로나마 고은교의 입지를 존중해 주고 있는 것이었다.

“전투 준비하세요.”

꼬박 네 시간을 달린 상황이었다. 2 구역에 진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땅의 울림을 느꼈는지, 슬라임들이 여기까지 마중을 나와 있었다.

파직파직 튀는 까만 전류를 바라보던 고은교가 이승우의 품에서 내려왔다. 전투 시에는 그와 붙어 있는 게 오히려 전투의 효율을 떨어트릴 것이다.

“야. 그……냥 그러고 있지?”

이승우와 딱 붙어 있는 게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인 주제에 우시현이 고은교를 힐끔 보며 말했다. 약간 초조한 듯해 보이는 얼굴을 보니, 지난 쓰레기장 게이트에서 생긴 트라우마가 아직 완전히 치유되지 않은 것 같았다.

“우시현 에스퍼.”

담담한 목소리에 눈썹이 크게 움찔한다. 매사에 까칠하게 나오지만 전형적으로 채찍보다 당근이 잘 먹히는 타입이다. 이번에도 과도하게 힘을 써서 빌빌거리는 꼴을 볼 수는 없지. 그랬다가는 이번에도 게이트 안에서 점막 가이딩을 해야 할 테니까.

“나를 믿어요.”

훈련시켜야 할 에스퍼가 박경호뿐만이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뒤를 지키고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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