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콜 가이드-100화 (100/132)

#100

에스퍼의 등급을 나누는 기준은 보통 제곱으로 알려져 있다.

D급 에스퍼는 일반인 둘보다 강하고, C급 에스퍼는 D급 에스퍼 넷보다 강하다. B급 에스퍼는 C급 에스퍼 여덟 명보다, A급 에스퍼는 B급 에스퍼 64명보다 강하다. 그렇다면 S급 에스퍼는?

단순 숫자로 환산한다면 S급 에스퍼 하나가 A급 에스퍼 4096명에 준한다는 계산식이 튀어나온다. 원소 계열 에스퍼는 그보다 더 강하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사실 이 ‘강함’이라는 수치는 단순 파워에 정비례하는 것이지 능력의 응용이나 개개인의 차 같은 건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S급 에스퍼 개인은 보통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강함을 압도하는 것이 보통이다. 다시 말해, 최정상급 에스퍼라고 불리기 시작하면 자연재해나 똑같은 취급을 받는다.

“어우…… 상급 에스퍼들이 좋기는 좋아.”

그렇게 말하는 본인도 ‘상급 에스퍼’면서, 김 팀장이 다가와 너스레를 떨었다. 유명 배우들을 연예인들의 연예인이라고 따로 부르는 것처럼, 상급 에스퍼들끼리는 이 S급 에스퍼를 ‘진정한 의미의 상급 에스퍼’라고 농담하듯 따로 부르고는 했다.

“그래, 고은교 가이드. 팀에 상급 에스퍼가 둘이나 있으니까 게이트에도 자주 가야 하고. 고생이 많겠어요?”

팀장쯤 되면 굳이 전방에 나가 몬스터와 전투를 벌이지 않아도 된다. 사실, 에스퍼 몇몇이 제대로 솜씨 발휘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외딴곳에서 튀어나오는 슬라임들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에스퍼들은 손가락이나 빨고 있는 상황이었다.

특히, 물 원소 계열 에스퍼 우시현이 거의 날아다녔다. 슬라임들의 몸을 구성하는 성분의 99퍼센트가 물이었기 때문이다.

“별로 그렇지 않습니다.”

조금 무뚝뚝하지만 어쨌든 평이하게 돌아온 대답에 의외라는 시선이 슬쩍 돌아온다.

‘하긴, 게이트에 들어오기 전에 어느 정도 같은 팀장 라인을 조사하고 들어왔겠지.’

고은교의 평판은 여전히 꽝이었다. 최근 주가가 회복 중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거의 일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저 ‘역시 소문이랑은 좀 다른가?’ 싶은 정도일 것이다.

“그래도 너무 무리다 싶으면 말해요. 내가 일 처리 하나는 죽여주게 잘하거든.”

은근히 호의를 보이는 척 김 팀장이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예나 지금이나 팀장은 영업직과 비슷하다. 어딜 가나 제 이름을 알리고, 콜이 많이 들어올 만한 곳에 가서 자기 PR을 하는 모습이 아주 물 흐르는 듯 자연스러웠다. 본인도 상급 에스퍼라 들어오는 콜이 제법 많을 텐데 그랬다. 아마 그냥 몸에 배인 태도라서 그런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물론 제 손에 들어온 게이트를 넘겨줄 생각은 없지만, 이런 것도 다 사회생활이다.

“뭘요. 팀장은 같은 팀장이 챙겨야지, 응? 하하!”

싱글벙글 웃으며 김 팀장이 뭔갈 보고는 와, 하고 입을 벌렸다. 고은교 역시 그 광경을 보는 중이었다.

우시현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슬라임들의 형체가 죄다 녹아내렸다. 이승우도 만만찮은 실력 발휘를 하고 있는데도 우시현의 상성을 따라가지 못했다. 이렇게 보면 상성이 깡패라는 건 정말 옳은 말이다. 비단 게이트뿐만이 아니라 가이딩에도 적용되는 말이기도 하지만.

1구역을 돌파한 것처럼 빠르게 이동하지는 못했으나, 우시현의 활약 덕에 신 게이트 팀은 상당히 빠른 속도로 2구역도 통과하는 중이었다.

“이 속도라면 일주일이 아니라 이틀 만에 클리어하겠는데?”

한 구역당 도시 하나 수준의 크기인 신 게이트에는 10개의 구역이 있다. 이동에만 신경을 쓴다면 한 구역을 통과할 때 3시간 내외로 걸린다. 하지만 제2구역에서부터는 슬라임들과의 전투 시간도 포함되어야 했다.

그래서 한 구역당 대여섯 시간 정도 걸린다 치면, 하루에 이동할 수 있는 구역은 최대 두 개. 본래 계획대로라면 최소 5일이 걸리는 장기 작전이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고…… 삼 일은 걸리겠어요.”

어느새 다가온 또다른 팀장이 말 한마디를 얹었다.

“전투가 벌써 막바지네요.”

팀장들은 이번 구역이 끝나고 가이딩을 받는 게 아니라, 3구역까지 몬스터를 소탕하고 난 다음 가이딩을 받는 걸로 일정을 조정했다.

제1구역을 돌파하는 데 3시간, 2구역과 3구역을 돌파하는 데 8시간이 걸렸다. 

상급 에스퍼들을 괴물 쳐다보듯 쳐다보던 나머지 에스퍼들은, 그들이 다가오자 얼른 길을 비켜 주었다. 전투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중하급 에스퍼들은 모두 가이드와 지원팀 에스퍼들을 보호하는 역할로 뒤에 빠져 있었다.

그는 별생각 없이 자신에게 다가온 상급 에스퍼들에게 가이딩을 해 주었다. 고은교를 보자마자 반가운 표정으로 줄을 선 남선재는 네 번째 순서였다.

그때.

“저쪽 가이드 줄이 비었던데. 저기 가서 받을래?”

“어? 아니, 나는…….”

“괜찮아. 나는 교수님이 아니면 파장이 안 맞거든.”

마치 사양하지 말라는 어투였다. 고은교는 이승우가 웃는 낯으로 남선재를 끌고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승우는 금세 다시 나타났다.

“가이딩 좋으시네요. 감사합니…….”

“끝났어요?”

최상급 에스퍼의 기에 눌린 상급 에스퍼가 이승우의 눈치를 슬쩍 보더니, 자리에서 주춤주춤 물러난다. 이제 연차가 일 년밖에 안 되는 놈이지만 힘의 논리에 좌우되는 에스퍼들 사이에서 이승우는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메기나 다름없었다.

“이승우 에스퍼.”

“네.”

약간 못마땅한 기색으로 그를 호명하자, 기쁘다는 듯 눈꼬리를 접어 웃으며 손을 잡아 온다. 그리고 제 뺨에 가져가 손등을 비빈다.

‘……뭐라고 하지 말라 이건가.’

전투가 끝난 뒤였어도 이승우의 뺨은 놀라울 만큼 부드러웠다.

“남선재 에스퍼와 순서를 바꿀 필요는 없었잖습니까.”

그 말에 이승우의 표정이 약간 불퉁해졌다.

“걔는 왜 신경 쓰세요?”

“신경을 쓰는 게 아니라…….”

“애처럼 구는 걸 좋아하시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니, 누가 애처럼 구는 걸 좋아하는…….”

“제 앞에서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시면 서운해요.”

“…….”

그래. 말을 말자.

고은교가 입을 다물고 가이딩에 집중하자, 언제 불퉁해졌냐는 듯 이승우의 표정이 다시 부드러워졌다.

다음 순서는 우시현이었다.

“야. 남선재가 왔었다며?”

우시현은 이미 게이트에 들어오기 48시간 전에 충분한 가이딩을 받았다. 어차피 지금 가이딩을 받아봐야 48시간 뒤에나 효과가 날 텐데, 왜 가이딩을 받으려고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지금 가이딩을 해 두면 대충 보스 방 앞에서 가이딩 고갈로 시름시름 앓을 일은 없을 거라는 판단이 섰다.

고은교가 손을 내밀자 우시현은 반사적으로 손을 붙잡아 놓고 아차 싶은 표정이다.

“우시현 에스퍼도 그 이야기입니까?”

손바닥 안으로 밀려드는 파장을 느끼며 우시현이 눈썹을 찌푸리는 순간, 이승우가 자리를 비키더니 고은교에게 가이딩을 받을까 말까 고민하는 상급 에스퍼들의 교통정리를 자처했다.

“최영길 에스퍼, 한미진 가이드랑 파장이 잘 맞지 않았어요?”

“응? 그건 맞는데…….”

“한경진 가이드가 한미진 가이드 동생분이라는 거 모르셨죠.”

“오? 정말이요?”

상급 에스퍼를 데리고 슬슬 멀어지는 이승우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고은교가 우시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 자식…… 이상한 놈이야.”

“……그래요.”

“진짜라니까.”

누군가를 ‘이상하다’라고 말하는 게 우시현 본인이라는 자각이 없나 보다. 고은교는 조금 한심하다는 눈길을 보내며 우시현의 몸 안으로 가이딩 기운을 더 많이 흘려보냈다.

“으…….”

외부 접촉 가이딩은 그다지 잘 맞지 않기 때문에, 우시현이 괴로움에 찬 신음을 흘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고은교는 입을 꾹 다물고 가이딩의 속도를 높였다.

그러던 와중, 갑자기 우시현이 팔을 쑥 뻗어서 고은교의 허리를 붙잡고 끌어당긴다.

“야, 그냥 점막 가이딩하면 안 되냐?”

“……하.”

그동안 애원에 못 이겨 가끔 가이딩실에서 점막 가이딩을 몇 번 해 준 게 문제였을까? 온갖 사람들이 다 지나다니고 있는데 점막 가이딩을 하면 안 되냐는 소리가 이렇게 쉽게 튀어나온다. 이대로 내버려 뒀다간 입술을 비빌 기세였다.

가만히 주변을 살핀 고은교가 우시현의 귓가에 고개를 가져다 댔다.

“우시현. 적당히 해라.”

“……쳇.”

쳇은, 이 녀석이. 고은교의 눈썹이 심상치 않게 꿈틀거리자 그제야 입을 닥친다.

가이딩이 끝나고, 신 게이트 팀은 슬라임을 소탕한 제3구역과 제4구역의 인접 지역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전투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상급 에스퍼들의 수가 확 줄어듦에 따라, 각 에스퍼들의 역할이 재분배되었다. 다시 말해, 지원팀을 돕는 에스퍼들을 각 팀에서 차출하여 짐꾼으로 써먹었다는 이야기다.

고은교의 팀에서 짐꾼이 될 만한 녀석은 당연히 박경호밖에 없었고.

쿵, 소리와 함께 팀의 배낭을 쏟아놓은 박경호가 대놓고 툴툴거리며 제 침낭을 가지고 갔다.

“……저 새끼가.”

우시현의 살벌한 시선이 닿자마자 박경호가 얼른 줄행랑을 쳤다. 고은교는 별다른 생각 없이 가장 밑에 깔린 제 배낭을 끄집어냈다.

“이런.”

고은교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갔다. 쥐를 쫓는 고양이처럼 박경호의 움직임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우시현과 가볍게 이부자리 근처를 살피던 이승우의 시선이 고은교에게 돌아갔다.

온열 매트가 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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