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콜 가이드-101화 (101/132)

#101

게이트 안과 현실의 날씨는 똑같을 수도 있지만, 다른 경우가 훨씬 흔했다. 게이트 안을 ‘이세계’라고 종종 부르는 이유는 그런 까닭 때문이었다.

신 게이트는 선선한 가을바람이 부는 날씨였다. 그러나 날이 어두워지자 기온이 몹시 떨어졌다.

‘한겨울처럼 춥지는 않은데…….’

일반인이 온열 매트 없이 잠들면 얼어 죽기 딱 좋은 날씨였다. 하루 만에 게이트 공략이 끝나기라도 하면 그냥 오늘 불침번을 서는 걸로 하룻밤을 버틸 텐데……. 게이트의 규모가 너무 컸기 때문에, 그들은 최소 사흘은 신 게이트 안에 있어야 하는 처지였다. 곤란했다.

“음……. 그냥 주무시려는 건 아니죠?”

이미 깨져 버린 온열 매트의 온도 조절 버튼을 이리저리 매만져 보던 이승우가 살짝 웃는 낯으로 고은교를 돌아본다. 일견 난처해 보이는 표정이지만, 입가에는 웃음이 방울방울 매달려 있었다.

“낯짝 봐라……. 속이 시커멓다, 시커매.”

박경호를 몇 대 쥐어박고 돌아온 우시현이 혀를 쯧쯧 찼다. 에스퍼들은 온열 매트든 맨바닥이든 어디에서 자든 감기 하나 걸리지 않겠지만, 일반인의 몸인 고은교는 다르다. 그깟 이 주 동안 운동 좀 했다고 신체 능력이 월등히 올라갔을 리도 없고.

“그냥 나랑 자.”

우시현이 진지하게 헛소리를 했다.

“저 새끼랑 자면 무슨 짓을 당할 줄 알고?”

“…….”

미안하지만, 고은교가 보기에는 이승우나 우시현이나 비슷했다. 어느 쪽에 흑심이 있고 말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가이드와 에스퍼가 한 침낭을 쓴다는 게 문제다. 아무리 다 큰 성인들이라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굳이 그런 꼴을 보여야 할까?

‘나중에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귀찮은 일은 정말이지 딱 질색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그럼요. 말도 안 되죠.”

이승우가 눈꼬리를 접어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 상태로 우시현의 위아래를 가볍게 훑어본다.

“시현이는 잘 때 코를 곤다고요.”

“……이 새끼야. 너 뒈질래?”

즉시 우시현이 발끈했다. 굉장히 억울해 보였다. 그에 반해 이승우는 이런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면 수혜자는 반드시 자신이어야 한다는 듯이 몹시도 명확하게 고은교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똑바른 시선에 ‘그럴까’라는 말이 튀어나오기 직전이었다.

“교수님, 무슨 일이세요?”

오늘의 불침번이었는지 숲의 경계에서 순찰을 돌던 남선재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단정한 눈길이 이승우가 쥐고 있는 깨진 온열 매트에 닿는다.

이승우는 최상급 에스퍼이니 온열 매트 같은 것은 필요 없었다. 아마 높은 확률로 그것은 이승우와 연관이 있는 사람의 것일 테고, 박경호는 곁에 없으며, 우시현 역시 온열 매트가 필요 없는 최상급 에스퍼였다.

“아, 교수님이 쓰실 온열 매트가 망가진 건가요?”

답은 하나였다.

“배낭을 옮기다 보면 그럴 수도 있죠. 지원팀에 여분의 물품이 있는지 여쭤보고 올게요. 걱정 마세요.”

매우 시의적절하고 눈치 빠른 도움이었다. 물론, 고은교를 안고 한 침낭 안에서 자겠다는 음험한 계획을 세우던 에스퍼 둘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고.

기어코 여분의 온열 매트를 얻어온 남선재에게 돌아온 것이란 싸늘한 눈초리뿐이었다. 오로지 고은교만이 남선재의 호의를 고마워했다.

“고마워요, 선재 군.”

“당연한 건데요. 그런 말씀 마세요.”

남선재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고은교는 저도 모르게 남선재의 머리를 토닥였고, 그 익숙해 보이는 손길을 모두가 보았다.

빠득, 하는 심상치 않은 소리가 우시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온열 매트를 받아들고 남선재와 짧은 이야기를 주고받느라 고은교는 제 에스퍼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는 걸 몰랐다. 이대로 헤어지기 아쉬워하며 고은교에게 몇 마디 더 붙이는 남선재와, 그런 그의 말을 적당히 받아 주는 고은교의 뒤로 이승우와 우시현의 사이가 급격하게 좋아지기 시작했다.

내부의 결속은 적이 생겼을 때 단단해지는 법이었다.

*

“교수님, 드릴 말씀이…….”

“할 말이라도 있어?”

향후 일정에 대해 팀장들과 대화를 나누려고 막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남선재가 고은교를 찾아왔다. 고은교가 몸을 돌리는 순간, 이승우가 남선재의 앞을 막아서서 말을 가로챘다.

“교수님 지금 바쁘신데.”

상냥한 말투였지만 어딘가 위화감이 느껴지는 태도였다. 뭐라 콕 집을 수 없는 단호함을 느낀 고은교가 이승우를 잠깐 쳐다보았지만, 평소처럼 부드럽게 미소 짓는 이승우의 얼굴에서 달라진 점을 찾아낼 수는 없었다.

남선재 역시 미묘함을 느낀 모양이었으나, 막 걸음을 옮기려는 고은교를 보고 일단 수긍하는 눈치였다.

“아, 그러면 나중에…….”

“괜찮습니다. 무슨 용건인가요, 남선재 에스퍼.”

분명 남선재가 고은교를 찾아온 데는 합당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빨리 듣고 해결할 수 있는 용무라면 충분히 그럴 용의가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남선재의 볼일이었으니까.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남선재에게는 신의가 있었다.

“아닙니다.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뜻밖에도 남선재는 자신의 용무를 말하는 대신 난처한 듯 웃으며 깍듯하게 말했다. 고은교의 눈에는, 마치 그 모습이 에스퍼들의 텃세에 시달리느라 조금의 책잡힐 거리도 주지 않으려는 신입의 모습처럼 보였다.

한마디로 제법 안쓰러워 보였다는 소리다.

“선재 군, 그냥 말해도 괜찮아요. 무슨 일입니까?”

고은교가 가볍게 이승우의 팔을 잡고 제지했다. 자신의 팔을 붙든 하얀 손을 본 이승우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남선재의 시선 역시 이승우의 팔에 닿는다. 고은교가 이승우를 붙든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선재는, 곧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며 고은교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나중에……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드리고 싶은 부탁이라서요.”

그러고 보니, 신 게이트에 들어오기 전에 남선재가 고은교에게 했던 말이 있었다.

‘나중에 현장에서 마주쳤을 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었다고 했던가.’

개인적인 부탁이라면 아마 가이딩을 해 달라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었다. 남선재에게 가이딩이라……. 결론은 금세 나왔다.

‘안 된다고 할 이유가 없지.’

특히 이곳은 게이트 안이다. 고은교는 어제도 이미 상급 에스퍼들에게 가이딩을 해 준 바 있었다. 물론, 중간에 이승우가 끼어들며 상급 에스퍼들을 최대한 쳐냈지만.

“좋습니다.”

그걸 봤을 테니 따로 말하고 싶을 것이리라. 또, 동기들이 다 보는 자리에서 그런 말을 하기에는 쑥스러울 터였다. 어쨌거나 고은교는 금세 남선재의 생각을 눈치챘고, 역시 귀여운 녀석이 귀엽게 구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남선재가 바랐던 ‘나중’은 금방 찾아오지 않았다.

작정이라도 한 듯 이승우와 우시현이 번갈아 가며 그를 방해했기 때문이었다.

“야, 남선재. 방해되니까 후방으로 가지?”

함께 선두에서 전투를 이어 나가던 남선재를 우시현이 쫓아내는가 하면…….

“남선재, 너희 팀 가이드가 너 찾던데.”

가이딩을 할 때도 고은교에게 남선재를 보내지 않으려는 수작이 이어졌다.

“아니, 나도 교수님께 가이딩을 받고 싶어서 그래.”

다만 남선재 역시 이전처럼 어영부영 이승우의 수작에 넘어가지는 않았다. 굳건하게 딱 버티고 서서 자신의 위치를 고수했다.

그러자 이승우의 입술이 천천히 호선을 그렸다. 분명히 웃고 있는데 전혀 웃고 있는 것 같지 않는 느낌이다.

남선재를 지그시 바라보며 이승우가 들으라는 듯 말했다.

“하긴, 너도 상급 에스퍼니까 가이딩이 많이 필요하겠다. 그렇지? 우리 교수님이 워낙 가이딩을 잘하시잖아.”

“…….”

“교수님께 가이딩 받고, 너희 팀 가서 또 가이딩 받으면 되겠어.”

남선재의 저항 같은 건 전혀 상관없다는 것처럼, 자신은 남선재를 위해서 선한 제의를 한 것뿐이라는 듯 이승우가 부드러운 태도를 유지했다.

4구역, 5구역, 6구역을 거치며 12시간 동안 긴 전투가 이어지고 난 뒤 가이딩이 필요한 에스퍼들의 수는 어제보다 약 1.5배 정도 많아졌다. 지원팀에서도 치료가 필요한 에스퍼들을 찾아 돌아다녔고, 부상을 입은 에스퍼들은 치료를 받거나 한쪽 구석에서 쉬었다.

슬라임들이 많이 몰려들수록 상급 에스퍼들의 활약이 눈에 두드러지게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쯤에서 고은교는 남선재의 진정한 등급에 대해 알게 되었다.

‘상급 에스퍼가 분명한 것 같은데…….’

남선재가 자신의 특정 능력을 숨긴 것은 아니었다. 그가 쓰고 있는 것은 염동력이 맞았다. 다만 능력의 세기와 응용성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일반적인 염동 에스퍼라면 떠오르는 중급의 보급형 에스퍼 느낌이 전혀 아니었다는 이야기였다.

“아, 교수님은 모르시겠구나. 남선재가 사실…… 상급 에스퍼거든요. A급이라고 알고 있는데. 맞아?”

“…….”

남선재가 아주 티 나게 움찔하며 고은교를 바라보았다. 이미 남선재의 능력에 대해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던 고은교 또한 별생각 없이 남선재를 마주 보았다.

그 순간 남선재의 눈에 옅은 죄책감이 어렸다. 당황한 것 같기도 했다. 입술이 떨리고, 정처없이 헤매는 눈동자가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았다.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고은교가 이승우의 말을 받았다.

“남선재 에스퍼가 말하고 싶지 않은 내용일 수도 있잖습니까.”

“음, 저는 그냥……. 네. 죄송해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이승우가 생긋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고은교가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남선재를 다시 바라보는 순간, 울상에 가까운 남선재가 해명을 쏟아내기라도 하듯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게 아니라…… 학교 다닐 때는 보통 C 등급으로 서류를 제출했어요. 학생회에 상급 에스퍼로 등록해 두면 귀찮은 일이 많아서……. 어렸을 때 시골 병원에서 발현 검사를 받았는데, 기기가 낙후되어 있었던 탓에 C 등급 에스퍼라고 판정받았었거든요.”

“그렇군요.”

남선재는 척 보기에도 초등학교 때부터 반장을 도맡아 했을 관상이었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자신만의 요령을 터득했을 수도 있다. 그게 나쁜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다만 남선재가 고은교에게 몇 번이고 자신의 본래 등급을 알려 줄 수 있는 상황이 있었음에도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다는 게 썩 좋아 보이지 않을 수도 있었고…….

이승우는 바로 그것을 노린 듯했다.

“그래요, 남선재 에스퍼. 가이딩합시다. 손 주세요.”

고은교가 별다른 말 없이 손을 뻗었음에도 남선재는 시무룩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가이딩을 받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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