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콜 가이드-102화 (102/132)

#102

‘이대로 사라질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라는 표정으로 고은교가 남선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현재, 남선재는 우시현과 이승우의 뒤를 맹렬히 추격하며 슬라임들을 죽여 없애고 있었다. 이걸 뚝심이라고 불러야 하나? 고은교는 어딘가 결연한 표정이 되어 슬라임들을 처치하는 남선재를 바라보며 약간의 흥미를 느꼈다.

착각이 아니라면, 남선재는 보다 공격적으로 고은교의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이승우와 우시현의 야비한 견제가 오히려 그의 마음에 불을 지핀 것 같았다.

“그, 고은교 가이드.”

7구역을 막 통과했을 때였다. 조금 있으면 8구역에 도달하기 직전이었는데, 김 팀장이 갑작스럽게 이동 중단 사인을 보냈다.

“무슨 일입니까?”

김 팀장은 금세 가까이 왔다.

“아까 갈림길 말이요. 저 숲 뒤쪽에, 시뮬레이션할 때는 없었던 길이 있는 거 혹시 봤어요?”

“……길이요?”

김 팀장이 약간 흥분한 듯 속사포로 말을 쏟아냈다.

“그래요! 아니, 이상하잖아. 8구역이랑 9구역, 엄청나게 떨어져 있지 않아요? 다른 구역에 비해 이 거리는 말이 안 되는 거거든.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쭉 이동했는데, 방금 내가 샛길을 발견했어요. 우리가 시뮬레이션할 때는 200:1로 축소해서 돌리니까 이 길이 안 보인 것 같아.”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지름길이 있는 게이트가 없지는 않았으니까. 지난 경험을 떠올린 고은교가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긍정적인 신호에 김 팀장의 얼굴이 환해졌다.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는지, 그가 얼른 본론을 말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지름길이라서 좀 위험할 것 같거든. 혹시 이승우 에스퍼랑 우시현 에스퍼 좀 데려가도 괜찮을까? 멀쩡하게 쓰고 돌려 드릴게.”

그 말을 들은 고은교가 자신의 에스퍼들을 돌아보았다. 우시현은 이쪽을 쳐다보는 중이었고, 이승우는 얌전히 눈을 내리 깐 채 고은교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흠.’

이 둘이 가는데 고은교도 빠질 이유가 없었다.

“그러면, 저도 같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근처에 서 있던 박경호와 눈이 마주쳤다.

‘아, 박경호가 있었지.’

박경호까지 데리고 가기에는 과한 듯한데……. 그렇다고 박경호가 적극적으로 나서며 자신도 게이트 작전에 참여하고 싶다고 어필하는 성실한 녀석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곳에 박경호를 혼자 두고 가도 괜찮을까? 사고를 쳤으면 쳤지, 얌전히 있을 성미는 아닌 것 같은데.

게다가 박경호는 변수에 충분히 대응할 수 있는 녀석이 아니었다. 박경호를 동행시킬 수 없고, 홀로 남겨 둘 수도 없겠다는 판단이 서자 자연스레 우시현과 이승우만 차출시키는 데 마음이 기울었다.

“뭘 같이 가냐? 그냥 여기 있어.”

그때, 우시현이 딱 잘라 말했다.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김 팀장의 말에 과보호하던 버릇이 발동한 것 같았다. 그러자 김 팀장이 호탕하게 웃으며 끼어들었다.

“이 친구 아주 독립적이구만? 좋아요, 좋아. 그래도 우리 고 팀장님이 걱정될 테니까, 우리 팀에 귀여운 막내도 하나 딱 붙여 놓을게. 그러면 됐지? 응? 가 보자고, 얼른!”

내키지 않는 얼굴로 이승우가 고은교를 바라보았지만, 그 역시 고은교의 안위를 우선으로 생각하는 에스퍼였다. 게다가 고은교의 지시를 강박적으로 따르는 처지이기도 했으니, 그의 끄덕임에 어쩔 수 없이 몸을 돌렸다.

김 팀장이 붙여 준 팀의 막내는…….

“저, 교수님. 김 팀장님 지시로 왔는데……. 제가 신입이라 불편하실 수 있어서, 다른 분을 원하시면 바로 교체해 드릴게요.”

놀랍게도, 남선재였다.

“아니에요. 잘 부탁해요, 남선재 에스퍼.”

남선재는 약간 딱딱한 표정이었지만, 본래도 옆에 잘 붙어 있지 않는 박경호가 지름길을 발견한 거라면 오늘 게이트가 끝나는 것 아니냐며 슬쩍 사라지고 나자 훨씬 더 굳은 표정이 되어 고은교를 바라보았다.

‘……단둘이 남았다고 긴장한 건가?’

이왕 일이 이렇게 된 거, 고은교는 남선재가 자신에게 가이딩을 부탁할 거라고 생각했다.

“자, 말해 보세요.”

“……네?”

어쩔 수 없이 약간 웃는 낯으로 고은교가 남선재를 바라보았다.

“내게 하고 싶다던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 말을 듣자, 남선재의 얼굴이 대번에 신중해졌다. 물론, 그는 고은교의 말이 옳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으니까.

그는 몇 번이고 입 속으로 말을 고르는 듯했다.

“……교수님께 등급을 속이려던 건 아니었어요.”

뜻밖의 말에 고은교의 얼굴이 묘해졌다.

가이딩을 부탁하려는 게 아니었나?

남선재는 절대 피할 수 없는 장애물을 맞이한 사람처럼 여전히 결연해 보였다. 힘들게 말하는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절대 고은교를 피하지 않았다. 주저하면서도, 결국에는 고개를 살짝 들어 고은교와 눈을 마주했다.

“학교에서 등급을 숨긴 건 말씀드린 대로지만, 교수님과 만난 이후로 말을 하지 않은 건 일부러였어요. 그냥…… 멋진 모습을 보여 드리고 싶었거든요. 그러고 나서 부탁을 드리고 싶었어요.”

고은교가 잘못 보지 않았다면…… 그 순간 남선재의 눈시울이 살짝 붉어졌다.

“제가 조금이라도 괜찮으시다면…… 나쁘지 않다면, 부디 제 가이드가 되어 주셨으면 좋겠다고요.”

그냥 단순히…… 가이딩해 달라는 게 아니었다. 처음부터 진지한 계획이 이 소년의 머리 안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 뜻밖의 전개에 고은교는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선재 군, 나 말고도 좋은 가이드는 많아요.”

그의 부드러운 거절에 약간 거칠었던 남선재의 숨소리가 조금씩 이완되었다. 남선재는 여전히 눈시울을 붉힌 채로 고은교를 바라보았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지금뿐인 것 같아 말씀드려요.”

마치 고백이라도 할 것 같은 표정이었다.

“제가 처음에 에스퍼로 발현하고, 이능력자 의무 교육을 들었을 때…… 에스퍼는 하나뿐인 순정을 자신의 가이드에게 바쳐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

순, 뭐?

“두 달 전에 저는 학교를 완전히 졸업했고, 이제 어엿한 에스퍼가 되었으니까 제 마음을 바칠 수 있는 가이드를 선택할 수 있고요.”

“…….”

“저도 제가 부족한 걸 알아요. 하지만…… 교수님만 괜찮으시다면…….”

목소리 끝이 살짝 떨렸다.

“저를 교수님의 에스퍼로 받아 주세요!”

조용조용한 목소리에 익숙해져 있던 고은교가 깜짝 놀라 남선재를 바라보았다. 천천히 이야기하던 남선재는 이제는 감정에 북받친 얼굴로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만약 여기에서 안 된다고 하면 남선재는 고은교의 거절을 받아들이고 물러날 게 분명했다. 남선재는 누구와 달리 강제하는 법을 모르는 순진한 에스퍼였으니까. 고은교는 버릇처럼 에스퍼의 제안을 거절하려 했지만, 새빨간 남선재의 얼굴을 보고 그만 입을 다물어 버렸다.

“음…….”

고은교의 입장에서는 남선재를 굳이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장이주였을 때처럼 에스퍼가 차고 넘쳐 처치 곤란 수준까지는 아니었지만, 고은교에게는 두 명의 최상급 에스퍼들이 있었다. 다만 그들과 남선재의 차별점이란, 남선재가 고은교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그를 잘 따랐던 에스퍼라는 것이었다.

‘남선재의 말만 들으면, 이게 엘리트 에스퍼가 밟는 정석 코스긴 하지.’

좋은 대학의 특수과를 졸업해서, 센터에 입사하여 몇 년 동안 경력을 쌓은 뒤 고액의 연봉을 주는 회사로 이직하는 것. 그 과정에서 자신이 원하는 가이드를 찾아 페어를 맺는 것……. 현장 이능력자로 활동하는 것 말이다.

누군가의 인생 계획에 자신이 포함되었다는 것은 꽤 보람찬 일이었다. 고은교 역시 어쩔 수 없는 가이드였고, 누군가의 필요가 되었을 때 깊은 만족감을 느꼈다.

남선재의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고은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면 하나 물어보겠습니다, 남선재 에스퍼.”

“……넵.”

대답하는 목소리에 바짝 힘이 실려 있었다.

“한국대에 있을 때, 남선재 에스퍼가 나를 한 번 구해 준 적이 있었습니다. 머리 위로 축제 물품들이 쏟아졌고, 남선재 에스퍼는 나를 구하기 위해 그 자리에 있었지요.”

“……네.”

“그런데 선재 군은 끝까지 누가 그랬는지 내게 말하지 않았어요. 물론 이제 와서 그 학생을 탓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에요.”

“…….”

“다만 왜 그랬냐는 겁니다. 내가 기억하기로, 남선재 에스퍼는 승우와 시현이를 감쌌으니까. 이유가 있지 않겠어요?”

“그건…….”

남선재의 눈꼬리가 천천히 아래로 처졌다. 그 모습을 보며 고은교는 말을 이어 나갔다.

“말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요. 하지만 나는 내게 무언가를 숨기는 에스퍼와 페어 관계를 맺을 수는 없습니다.”

단호한 말이었다. 남선재를 시험해 보는 어투이기도 했다. 머뭇거리던 끝에 남선재가 입을 열었다.

“정말로 그 친구들이 아니었어요. 그때, 축제 전단지를 나눠 주는데 인쇄물이 너무 부족하더라고요. 그래서 급하게 과실로 돌아가서 남은 전단지가 있는지 보려는데, 문밖에서 박경호가 전화하는 걸 들었어요.”

“……박경호?”

“……네. 동기를 협박하고 있었어요. 그때, 연구실 건물 3층에 동기가 조교로 근무하고 있었고…… 교수님이 나오실 때쯤 물건을 쏟으라고 윽박지르는 걸 들었어요. 동기가 D급 에스퍼인데, 경호한테 몇 번 괴롭힘을 당하는 걸 봤거든요. 그 친구도 육체 강화형 에스퍼라 경호랑 같이 다닐 일이 많았는데,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취업할 회사에 나쁜 소문을 내겠다는 둥…….”

“…….”

“그래서 바로 교수님께 갔던 거예요. 연구실과 과실 건물은 거리가 좀 있으니까 혹시라도 늦으면 교수님이 다칠까 봐 걱정되어서요. ……누가 그랬는지 숨겨서 죄송해요. 물건을 떨어트린 그 친구가 잘못한 건 맞아요. 그런데 차마…… 말씀을 못 드리겠더라고요.”

“……그래요, 그런 거라면 이해가 됩니다.”

착한 남선재가 그 불쌍한 친구를 감싸려 한 것이 충분히 이해된다. 고은교가 고개를 끄덕인 순간, 남선재가 아래를 보던 시선을 똑바로 들었다.

“그 친구가 걱정된 것도 물론 맞지만, 그 친구는 제 동기고…….”

바로 이것이 자신의 본심이라는 듯이.

“교수님이 보시기에 저나 그 친구나 비슷해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 말은 정말이지 상상도 하지 못한 내용이었다.

“아니에요, 선재 군. 나는…….”

고은교는 저도 모르게 선재의 말을 부정하려 했다. 하지만 남선재가 조금 더 빨랐다.

“교수님께 조금이라도 미움받기 싫었어요.”

그가 당황한 눈으로 남선재를 바라보았다. 남선재는 거의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때부터 저는 이미…… 교수님이 좋았던 것 같아요.”

고은교의 시선이 남선재의 눈에 머물러 있었다. 정확히는, 그의 눈가에 글썽거리는 눈물을.

남선재의 눈물을 보는 순간 고은교는 아까보다 훨씬 더 당황했고, 자연스럽게 남선재를 달래 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에 축축한 눈물이 닿았다. 고은교의 손길을 받으며 남선재가 눈물 고인 눈으로 웃었다.

“아니, 맞아요. 교수님이 좋아요.”

“……선재 군.”

“정말이에요. 강의실에서 처음 뵀던 순간부터 좋았어요. 그 순간을 어제 일처럼 또렷이 기억해요.”

“…….”

“제가 부족해서 거절하시는 건 이해할 수 있어요. 교수님 마음에 차지 않아서, 제가 승우나 시현이처럼 대단하지는 않으니까…… 제가 필요하지 않으실 거라는 것, 잘 알아요.”

그래도, 남선재가 낮게 중얼거렸다.

“……좋아한다고 말할 수는 있는 거잖아요. 그렇죠?”

“…….”

“교수님께 제가 드릴 수 있는 마음을 다 드리고 싶었어요. 교수님이 받지 않으셔도…… 그건 여전히 제 마음일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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