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콜 가이드-103화 (103/132)

#103

남선재는 고은교를 다시 만난 순간부터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가능하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조용히 말하고 싶었다고. 그리고 부담은 가지지 말아 달라고. 자신의 말이 갑작스럽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그건 몇 달 전부터 조금씩 키워온 마음이라고…… 말했다.

“……하.”

이 모든 말을 들은 고은교의 입술 사이로 가벼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나지막한 한숨 소리에 남선재의 얼굴이 슬퍼졌다.

“그래요. 남선재 에스퍼가 무슨 마음을 가지고 있든 그건 남선재 에스퍼의 자유입니다.”

“……네.”

남선재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직 안 된다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남선재는 이미 거절을 예감한 것 같았다. 눈물 자국이 있는 얼굴로 저런 표정을 지으니 마치 강아지가 시무룩해져 있는 것만 같다. 무해한 존재를 괴롭히는 것만 같은 찝찝한 뒷맛이 느껴졌다.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하지 못한 것은 그 이유 때문이었다. 어차피 지금은 게이트 작전을 진행 중이니, 굳이 에스퍼의 사기를 꺾어 놓을 필요는 없겠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아니요.”

사무적인 어조로 대화를 마무리하려 하던 고은교의 눈에 남선재의 하얀 얼굴이 또렷이 들어왔다. 살짝 젖어 있는 속눈썹과 상기되어 있는 뺨은 물론 귀여웠다. 하지만 고은교의 시선을 끝까지 붙들어 놓는 것은 남선재의 눈동자였다. 거절당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래서 슬프고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떨리는 눈동자.

어떤 말을 들어도 의연히 받아들이려는 모습이었다. 단순히 말하기 꺼려진다는 이유로 대답을 미루는 건 못 할 짓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이 ‘좋아한다’는 말은……. 예전이라면 남선재가 신입 에스퍼이기도 하니 가이드에게 가지는 감정을 혼동했을 거라고 치부하거나, 자신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일부러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한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승우의 케이스가 있고 나니, 남선재의 절절한 말이 몹시 새롭게 들렸다.

‘내가 만났던 에스퍼들은 대부분 비지니스 관계였는데…….’

역시, 어려서 그런 걸까? 그래서 마음이 쉽게 생겼다가 사라지고는 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지금까지 착각을 한 건 그쪽이 아니라 자신일지도.

‘설마.’

순간적으로, 정신이 들자마자 ‘장 팀장님?’하고 자신을 부르던 차영헌의 얼굴이 떠올랐다…….

“교수님.”

갈등하고 있는 것을 눈치챘는지, 남선재가 금세 미안한 표정이 되어 다가왔다. 그러고는 한 번도 만져 본 적 없는 고양이를 쓰다듬어 보는 어린아이처럼 놀랍도록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왔다.

그리고 잡았다, 손도 아닌 손가락 끝을.

문득 미움받기 싫었다고 말하던 얼굴이 그 위로 겹쳐져 보였다. 남선재는 아주 뻔뻔한 부류는 아니었지만, 당당한 자신감이 보기 좋은 녀석이었다. 단체를 대표하고, 어떤 모임이든 리더십 있게 주도하는 것이 익숙한 사람 특유의 에너지가 매력적인 학생이었는데.

“잘못했어요. 제가…….”

뜻하지 않았지만, 눈치를 보게 만든 것이 미안했고 안쓰러웠다. 천연덕스럽게 구는 법을 아예 모르지는 않을 텐데도, 굳이 솔직한 얼굴을 고집하는 태도는 남선재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 주는 듯했다. 무엇을 사과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남선재는 오래 고민하는 것 같았다.

확실히 남선재는 의뭉을 떠는 놈이 아니었다. 거친 얼굴로 제 마음을 숨기는 놈도 아니었다. 겉과 속이 똑같고, 자신의 속내를 숨기는 법을 알지라도 일부러 제 얼굴을 감추지 않는 정직한 녀석이었다.

“선재 군, 잘못한 게 없을 때는 잘못을 빌면 안 됩니다.”

“…….”

이 말에 남선재는 어쩐지 울컥한 표정이 되었고 어딘가 간절함을 품은 얼굴로 고은교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래, 어떻게 모르겠는가? 고은교는 자신이 한 말이 남선재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호의적인 답은 기대를 심어 주고 만다. 차갑고 딱딱하게, 끊어내듯 말해야 에스퍼가 단념하리라는 것을 아는데도 이토록 절실하게 손을 뻗어오면 거절하기가 힘들다. 그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금 거절해야, 다른 에스퍼들에게도 쓸데없는 요청을 받지 않을 수가 있었다.

‘……아니지.’

그때와 지금의 처지가 달라졌다는 걸 깜빡 잊고 있었다.

장이주였을 때는 말 그대로 에스퍼들이 줄을 섰다. 가이딩을 잘하는 가이드로, 실력이 대단한 팀장으로 소문이 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고은교는…….

‘오히려 안 좋은 쪽으로 소문이 안 났으면 다행이니까.’

“좋습니다.”

그렇게 판단하자마자, 길게 생각할 것 없이 대답했다.

“그렇게 합시다. 남선재 에스퍼가 나를 가이드로 받고 싶다면요.”

남선재가 눈을 휘둥그렇게 뜬 건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그는 허락의 말이 떨어질 거라고 생각지 못했는지 몹시 놀라 고은교를 얼떨떨하게 쳐다보았고, 자신이 방금 들은 말이 정말인지 확인하고 싶어 했다.

“정말……이요?”

그렇게 물은 뒤, 재빨리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마치 누군가 금방이라도 들이닥쳐서 방금 고은교가 한 말을 취소시킬 것 같다는 표정으로.

그 모습을 보자, 새삼 남선재가 고은교를 잘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은 뭔가 하나를 정하면 쉽사리 돌이키는 사람이 아닌데.

‘……진짜 고은교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자신은 그랬다.

남선재를 받아들이기로 한 건 지금 목록에서 남선재 하나쯤 더 추가된다고 해서 특별하게 무리가 될 것 같지 않아서였다. 고은교의 몸은 가이딩 기운이 정순하지만, 총량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예전처럼 수십 명의 에스퍼들에게 가이딩을 해 줄 수는 없어도 소수의 에스퍼를 팀으로 꾸릴 정도는 된다는 뜻이다.

‘그래도 팀원 전원이 가이딩을 꽤 많이 요구하는 상급 에스퍼들이니……. 선재를 마지막으로 할까.’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리면서 고은교가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고은교의 몸으로 만난 에스퍼들은 고은교의 승낙을 들었을 때 의심을 하는 특이한 공통점이 있었다.

물론 남선재는 이승우나 우시현과 전혀 다른 종류이기는 했지만.

“그래요, 정말입니다.”

너무 좋아서 자신이 잘못 들은 게 틀림없다는 남선재를 향해 고은교가 확답해 주었다. 그러자 남선재의 얼굴이 전에 없이 환해진다. 둥근 눈이 부드럽게 휘어지고, 입술 선이 시원스럽게 솟았다.

“너무 좋아요.”

손끝을 붙들고 있던 손이, 자연스럽게 겹쳐져 손바닥을 대고 잡는다. 그대로 끌어당긴다.

잠깐 순간 고은교는 남선재의 품에 파묻혔다.

“아, 정말 좋아요. 너무 좋아요. 어떡하죠. 교수님, 제가 진짜……. 진짜 잘해 드릴게요. 저 받아 주신 거, 절대 후회하지 않게…….”

고은교는 새삼 자신의 체구가 작다는 것을 재확인했다. 이 몸은 남선재의 품에 쏙 들어가 안길 정도로 키가 작았다. 이승우나 우시현 옆에 나란히 서 있으면 오히려 남선재의 키가 조금 모자라구나, 뭐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이제 보니 전혀 아니다. 두 사람과 비교해 봐도 엇비슷한 듯했다.

‘귀여운 인상이라 그렇게 느껴졌던 건가.’

그럼 그들 사이에 있는 고은교는 상대적으로 얼마나 작아 보일까. 본래 자신은 이렇게까지 키가 작지 않았다. 에스퍼들을 올려다보는 일이 익숙하지 않다는 뜻이다. 그래서 에스퍼들이 예전만큼 그를 어려워하지 않는 것일까…….

남선재가 어찌나 좋아했던지, 고은교는 떨떠름한 기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손을 들어 올려 남선재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있는 힘껏 끌어안긴 탓에 그 간단한 동작 하나 하기가 꽤 힘겨웠다.

“감사해요. 정말로…….”

“뭐가 감사해?”

연신 감사를 표하는 남선재의 뒤편으로, 대뜸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고은교를 껴안고 있던 커다란 몸이 경직되었다.

“뭐가 그렇게 감사하길래 그렇게까지…… 가까운 자세야?”

고은교는 남선재의 가슴팍에 얼굴을 박고 있었기 때문에 누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지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잘 알았다.

그는 그 상태로 탄식하며 얼굴을 가린 채 서 있었다. 심상치 않은 시선이 남선재의 몸을 뚫고 느껴지는 듯했지만, 이대로 나갔다가는 낭패스러운 표정이 고스란히 읽힐 것이 분명했다. 이승우의 남다른 집착욕을 그만 깜빡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와 하기로 한 결정을 무를 수는 없었다.

남선재가 이승우와 우시현 사이에서 무사할 수 있을까?

위기감을 느낀 건 남선재도 마찬가지였는지, 가슴 근육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얼굴로 생생히 느껴진다…….

“씨발, 환장하겠네. 너네 뭐 하냐?”

그사이 한 명이 더 왔다.

당연했다. 공식적으로 고은교가 데리고 있는 에스퍼는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으니까.

남선재는 고은교를 빼앗기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상급 에스퍼 두 명의 힘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아주 냉정하게도 이승우는 둘 사이를 갈라놓고 봤다. 남선재에게는 조금 미안한 말이지만, 언제까지고 숨 막히게 안겨 있을 수는 없는 일이라서…… 고은교는 못 이기는 척 이승우의 손을 따랐다.

습관적으로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는 손길을 받으며 고은교가 이승우의 얼굴을 슬쩍 살폈다. 고은교의 머리칼을 매만지는 와중에도 이승우는 남선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네가 교수님 목록에는 처음 들어와서,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이승우는 딱 한 번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대충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차린 것 같았다. 하지만 생각 외로 충격을 받았다거나, 결사반대를 외치지는 않았다. 오히려, 남선재와 고은교를 떨어트린 다음에는 제법 침착하고 이성적인 태도를 되찾고 빙긋 웃기까지 했다.

“규칙을 알려 줄게.”

규칙?

무슨 규칙?

“일단 교수님은 이렇게 함부로 접촉하는 거 싫어하셔.”

“…….”

그걸 아는 놈이 여태 그랬단 말인가?

고은교가 황당하게 쳐다보고 있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도, 이승우는 이 말도 안 되는 ‘규칙 설명’을 계속해서 이어 갔다.

“이렇게 함부로 포옹하는 건 삼갔으면 하고……. 아, 손잡는 건 당연히 안 돼. 가이딩할 때만 하는 거거든.”

“어, 응……. 죄송해요, 교수님. 저도 모르게 그만…….”

모범생답게 남선재는 고은교에게 우선 사과했다. 이승우의 말을 다 믿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어느 정도는 믿는 눈치였다. 이승우가 먼저 고은교의 목록에 올라 있었기 때문에 완전히 무시할 수 없다는 게 정확할 것이다. 게다가 이승우는 용의주도하게 남선재의 주의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남선재의 행동에 제약을 거는 와중에도, 그 이유를 명확히 밝힌 것이다.

남선재는 이승우의 ‘가이딩’이라는 말에 뺨이 발그레해졌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투명하게 보인다…….

“흠.”

금방이라도 남선재를 어디론가 끌고 갈 것 같았던 우시현마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입을 꾹 다물고 팔짱을 낀 채 자리를 지켰다. 남선재를 위압적으로 쳐다보는 것은 덤이었다. 이승우의 말에 부정하지 않음으로써, 그의 말에 신빙성을 더해 주려는 모습이었다.

“……샛길은 잘 찾았습니까?”

아주…… 텃세를 부리고 앉아 있다. 자신의 결정을 무르라고 팔팔 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어서 놀라느라 말릴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고은교의 물음에 남선재를 빤히 응시하던 이승우가 자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약간의 원망이 묻어나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네. 그 길을 통하면 바로 터닝 포인트에 도착할 수 있어요.”

“그렇습니까?”

과연 김 팀장이 그렇게 흥분한 이유가 있었다. 8구역과 9구역을 피하고, 다이렉트로 터닝 포인트에 도달할 수 있다라…….

다만 지름길에는 보통 출몰하는 슬라임과 달리 새빨간 색의 슬라임들이 나오는데, 강력함이 두 배 정도 된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오늘 안으로 이동 가능할 거예요.”

물론 이승우는 슬라임들이 얼마나 강하든, 슬라임은 슬라임일 뿐이라는 표정이었다. 우시현 역시 별다른 반응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들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 몬스터인 모양이었다.

“다른 팀들은 다 출발했고, 저희만 출발하면 돼요. 선재는 저희 팀에 있다가 게이트 밖으로 나가면 그때 본래 팀과 합류하면 된다고 하네요.”

“알겠습니다.”

고은교가 팔을 뻗자 이승우가 자연스럽게 그를 안아 들었다. 미리 출발한 팀을 따라잡아야 하니, 그들은 당분간 아주 빨리 이동할 예정이었다. 우시현은 거의 출발하려고 했다.

출발 직전, 고은교가 그들과 약간 떨어져 있는 남선재를 향해 지시했다.

“남선재 에스퍼, 나중에 게이트 끝나면 센터 좀 들렀다 가죠.”

어쩐지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그들을 멍하니 쳐다보던 남선재가 눈을 크게 뜬다.

“아, 네, 네!”

그는 아주 재빠르게 옆으로 따라붙었다. 그것을 확인한 고은교가 다시 정면을 보고 지시를 내렸다.

“그럼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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