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이승우와 우시현이 닦아 놓은 지름길을 통해 이능력자들은 아주 빠르게 터닝 포인트에 도달할 수 있었다. 쉬어 갈 필요 없이, 그들은 바로 보스 방에 진입했다.
“어, 우리 신입! 여기야, 여기.”
“아, 넵!”
마침 김 팀장이 근처에 있었다. 게이트 밖에서 합류하기로 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것 바로 본래 팀으로 합류하면 될 듯했다. 남선재는 조금 아쉬운 표정으로 고은교에게 꾸벅 목례한 뒤 김 팀장을 따라갔다.
“확실히 200배로 확대해서 보니까 크기가 장난 아니네요.”
근처에서 보스 몬스터를 보며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랬다.
보스 몬스터는 거대 슬라임이었다…….
보스 몬스터의 크기가 너무 커서, 이능력자들이 사방으로 퍼져 보스 몬스터가 죽을 때까지 능력을 사용해 슬라임의 육체를 파괴하는 것이 공략법이었다. 200:1로 줄였을 때는 1시간 정도 소요되었지만, 지금 상태로는…….
‘거의 산을 들어서 옮겨야 하는 수준인가.’
지름길을 통해서 온 보람이 없을지도 모른다. 밤새도록 보스 몹을 두들겨 패야 게이트 클리어가 가능할지도……. 고은교가 막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야.”
우시현이 슬쩍 뒤를 돌아봤다.
“이따 가이딩해 줄 거냐?”
그 말을 듣자, 무표정한 얼굴로 전방을 응시하던 고은교의 표정에 살짝 금이 갔다. 지금 우시현이 말하는 가이딩은…… 일반적인 가이딩이 아니었다.
우시현이 능력을 많이 소모했을 때 그를 즉각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은 고은교가 하는 점막 가이딩뿐이었다. 따라서 되도록이면 고은교는 그가 게이트에 들어오기 48시간 전에 가이딩을 해 주는 방법으로만 가이딩을 하려 했다. 일반적인 가이딩, 즉 손으로 접촉하는 가이딩은 48시간 뒤에 효과가 나타나기 때문이었다.
“……우시현 에스퍼, 충동적으로 힘을 쓰는 버릇은 고치라고 했을 텐데요.”
점막 가이딩을 전제로 깔고 힘을 써서는 안 된다. 그동안 우시현은 몸 상태가 안 좋은 지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에, 나쁜 컨디션에 익숙해져 있었다. 어차피 능력을 쓰든 안 쓰든 몸 상태는 똑같이 나빴을 테고, 체내 위험률 수치는 좋지 않을수록 둔감하게 느껴지는 경향이 있었다. 한마디로 여차 하면 능력을 쓰는 게 습관화 되어 있다는 이야기였다.
지금과 예전의 처지가 달라졌지만 몸에 남은 습관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고은교의 단호한 말에 우시현이 뚱하게 내뱉었다.
“귀찮잖아.”
“…….”
도대체 뭐가 귀찮다는 건지…….
“그래도 이제 팀으로 움직일 텐데, 협력하는 척이라도 해야지 시현아.”
여전히 고은교를 안고 있던 이승우가 부드럽게 말했다. 국장과 우시현을 제외하고, 고은교와 우시현의 점막 가이딩 효율이 높다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 그건 이승우도 마찬가지일 텐데, 이럴 때마다 뭔가 눈치라도 챈 것처럼 가시 박힌 소리를 곧잘 내뱉었다.
그 말에 우시현이 발끈했다.
“누구는 팀으로 움직인 적 없는 줄 아냐? 그냥 쉽게 갈 수 있는 길이 있는데 참아야 되는 게 짜증 난다고.”
“교수님이 참으라고 하신 건 아니잖아. 몸에 무리가 가는 행위는 지양하라고 하신 거지.”
“그거나, 그거나.”
우시현의 표정은 여전히 뚱했다. 그때, 고은교는 뭔가 허전함을 느꼈다.
‘……이승우, 우시현. 둘, 맞는데…….’
왜 하나가 없는 것 같지? 남선재의 존재감이 이렇게 컸나? 고개를 천천히 기울이던 고은교가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잠깐, 박경호 학생은 어디 갔지요?”
“아.”
“…….”
이승우가 약간…… 안타깝다는 듯한 소리를 냈다. 우시현은 아예 이쪽에서 고개를 돌려 버린다.
……이 녀석들이.
“……설마, 버리고 온 겁니까?”
“깜빡했어요.”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면서 이승우가 대꾸했다. 누가 봐도 일부러 버리고 온 거였지만, 모르는 척하는 폼이 예술이었다. 우시현은 아예 대답조차 하지 않고 딴청이다.
그래, 물론…… 그동안 박경호의 작태가 못 봐 줄 수준이기는 했다. 시키는 일 하나 똑바로 하지 않았고, 게이트를 클리어하는 내내 싫은 티를 냈으니까. 원래도 성실하지 않은 녀석 같았지만 그는 고은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모습을 보란 듯 티 내고는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학생을 버리고 오면 됩니까.”
이대로 보스 몬스터를 잡아 버리면 여기에 탈출 포털이 생성된다. 박경호 혼자 7구역, 8구역을 하루 만에 뚫고 올 수 있을 리는 없고……. 눈치껏 따라왔으면 좋았겠지만, 박경호는 혼자 낙오된 듯했다. 문제는 팀원 전원이 김 팀장이 발견한 샛길로 보스 방까지 진입한 상태였다는 것에 있었다. 남은 사람들은 즉시 탈출 포털을 이용하여 밖으로 나갈 테니, 한 번 사용된 탈출 포털이 사라지지는 않겠으나 B급 에스퍼 혼자서 여기까지 뚫고 오는 건 굉장히 힘겨운 사투가 될 터였다.
“데리고 오세요.”
바람 에스퍼인 이승우가 움직이는 것이 가장 빠를 터였다. 보스 방까지 이동하는 내내 우시현도 입을 다물고 있었고, 남선재도 감쪽같이 모르는 척하며 자리를 떠나 버린 걸 보니 고은교가 모르는 사이 에스퍼 셋이 합의를 본 내용일 확률이 높았다.
남선재가 그저 착하기만 한 건 아닌 모양이지.
고은교는 에스퍼 셋이 작당하여 박경호를 버리고 온 이 일을 기억해 두기로 했다. 엄중한 얼굴로 이승우를 바라보자, 이승우가 입술을 살짝 내밀며 고은교를 땅으로 내려놓았다.
“교수님은 박경호가 안 미우세요?”
그가 좋고 싫은 것과는 상관없이, 게이트에 남은 슬라임들이 마지막 생존자를 향해 몰려들면 큰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었다. 고은교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박경호가 함부로 경로를 이탈한 일은 게이트 밖에서 문책하면 됩니다. 신 게이트는 이승우 에스퍼나 우시현 에스퍼에게는 별것 아닌 게이트일 수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요. 박경호 학생이 죽기라도 하면 그 일을 어떻게 감당할 겁니까?”
“네에.”
이승우가 말꼬리를 질질 끌며 대답했다.
“그러니까 죽지만 않으면 된다는 말씀이시죠?”
“……이승우 에스퍼.”
“알겠어요. 얼른 데리고 올게요.”
이승우가 나긋나긋한 말씨로 대답했다. 고은교는 그런 이승우를 바라보다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크게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이승우가 떠나자 우시현이 고은교를 힐끔 보더니 눈썹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간격을 좁히는 듯싶다가…….
“오, 우시현 에스퍼……!”
보스 몬스터에게 훌쩍 뛰어든다.
산처럼 거대했던 거대 슬라임이 단숨에 쪼그라든다. 우시현이 능력을 펼쳐 보스 몬스터의 몸체 안의 수분을 죄다 빼앗아 버린 것이다. 남은 이능력자들은 곳곳에 툭 툭 떨어진 보스 몬스터의 핵을 파괴하기만 하면 됐다.
오 분도 안 되어, 탈출 포털이 열렸다.
“역시 상성 좋은 에스퍼가 있으면 공략이 너무 쉬워진다니까. 수고했어, 우시현 에스퍼! 다음에도 같이 일하자고. 응?”
팀원들의 격려와 칭찬이 우시현에게 쏟아졌다. 보스 몬스터를 제거한 우시현이 고은교를 슬쩍 뒤돌아본다. 하필 쓰레기장 게이트, 보스 방에서 사고가 일어났기 때문에 이번에는 그럴 여지를 주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승우가 박경호를 데리러 가기 위해 자리를 비웠기 때문에, 불안해진 우시현은 고은교를 지킬지 아니면 보스 몬스터를 죽일지 갈팡질팡하다 후자를 선택한 것처럼 보였다.
“……하.”
말 안 듣는 망나니가 또 힘을 왕창 써 버린 것이다.
3월 18일, 오후 3시 23분.
신 게이트 종료.
어차피 이승우와 박경호를 기다려야 했으므로 그들은 센터에 잠깐 남기로 했다. 본래대로라면 최소 5일이 걸리는 장기 작전이었지만, 여러 사람의 활약으로 3일 만에 끝났다. 김 팀장이 샛길을 찾아낸 공로도 만만찮았다.
“다들 퇴근 전이라 서류 처리가 빠르네요. 수고했습니다, 남선재 에스퍼.”
“아, 교수님께서 더 고생하셨어요!”
남선재가 허리를 푹 숙이며 인사했다. 오 분 전, 그들의 ‘my’ 목록 서류 처리가 끝났다.
아까부터 우시현은 말없이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그들의 뒤를 따라다니는 중이었다. 남선재는 그게 못내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지만, 고은교는 우시현이 갑자기 왜 저기압이 된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게이트 일정 정리는 유선상으로 하도록 해요. 아, 내 전화번호는……. 혹시 지웠습니까?”
“아, 아니요.”
그렇게 대답하자마자 남선재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과거, 그들은 수업 첫날 강의실에서 전화번호를 교환한 적이 있었다.
‘……일부러 안 지웠다는 뜻인가 보군.’
이렇게까지 생각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사람도 참 오래간만이다. 고은교는 짐짓 모르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편한 시간에 전화 주세요.”
“네, 넵.”
어깨에 빳빳하게 힘이 들어가 있다. 남선재는 쭈뼛쭈뼛 인사를 하더니, 고은교를 흘끔 바라보았다.
“그, 지금 돌아가시는 거면……. 데려다 드리고 싶은데요.”
“음, 보통이라면 그랬겠지만.”
고은교가 난처한 듯 한 번 웃고는 우시현을 살짝 돌아보았다. 이 불량배 같은 에스퍼는 이제 무게 중심을 한쪽 다리에 둔 채 삐딱하게 서서 멍하니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고은교의 시선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듯 무감한 표정이다.
“일정이 있습니다.”
“아, 네…….”
남선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남선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고은교가 덧붙여 말했다.
“참, 다음 가이딩 일정은 지금 이 자리에서 정합시다.”
“……넵?”
바로 자리를 떠나지 않고 아쉬운 듯 머뭇거리던 남선재가 토끼처럼 눈이 커져서 고은교를 바라본다.
“게이트를 클리어하느라 능력을 많이 썼으니 가이딩을 받아야죠. 남선재 에스퍼가 시간이 되면요. 음, 다음 주 월요일 어때요?”
그렇게 가까이 있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남선재의 터질 듯한 심장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고은교는 타는 듯 붉어진 귀를 슬쩍 보고는 휴대 전화로 시선을 돌렸다. 가이딩 일정을 픽스하기 위해서였다.
“조, 좋습니다.”
남선재가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꼭 하고 싶어요.”
“게이트에서 한 번 해 봤잖아요?”
“네…… 그래도.”
고은교의 웃음소리에 남선재의 얼굴이 더더욱 붉어진다. 새빨갛게 된 얼굴을 보면 놀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건가. 남선재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종종 자신답지 않은 생각이 불쑥 들었다.
“그러면 월요일…… 네 시?”
“네, 네.”
새벽 네 시에 오라고 해도 반드시 오고야 말겠다는, 결의에 가득 찬 태도였다.
“그럼 그때 봅시다.”
“……네.”
미소 짓는 남선재의 얼굴은 한여름처럼 청량했다.
남은 일정을 처리하기 위해 고은교가 몸을 돌리려는 순간, 남선재가 그의 소매를 살짝 잡았다.
“저, 혹시 오늘…… 기다려도 괜찮을까요?”
“……나를요?”
“네.”
‘네’라고밖에 말 못 하는 줄 알았더니……. 고은교가 픽 웃었다.
“할 말이 남았습니까?”
“아, 그건 아니고…….”
그도 그럴 만했다. 남선재는 게이트 안에서 고은교에게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다 했던 것이다. 그때의 상황이 떠올랐는지, 남선재의 얼굴 위로 쑥스러워하는 기색이 어렸다.
“그냥…… 기다리고 싶어서요.”
“그래요?”
고은교의 평이한 대꾸에 용기를 얻었는지, 남선재가 활짝 웃었다.
“네.”
그러고는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몇 초라도 괜찮으니까,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