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가이딩실 문을 열고 나오자, 남선재와 이승우가 벽에 기대어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 교수님. 끝나셨어요?”
고은교가 나온 것을 귀신같이 알고 고개를 돌린 이승우가 눈웃음을 치며 그를 불렀다. 저 웃는 얼굴이 어느새 익숙해졌다. 이승우에게 가야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아주 자연스럽게 걸음이 그쪽을 향하게 되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이승우의 시선이 아주 은밀하고 빠르게 고은교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스캔한다.
“남선재 에스퍼와 같이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네.”
“네, 교수님. 이제 퇴근하시는 건가요?”
남선재가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재잘재잘 떠드는 것을 들으며, 고은교가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박경호 학생은?”
“무사히 퇴근시키고 오는 길이에요.”
“그래요?”
의외였다. 이승우라면 박경호가 죽기 직전까지 도망 다니는 꼴을 구경하다가, 정체절명의 위기 순간에야 구해 주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만하면 무사히 나온 셈이죠.”
어쨌거나, 이승우가 싱긋 웃으며 대꾸했다.
고은교의 옷차림은 게이트 안에서 본 것과 똑같았다. 옷이 바뀌지 않았으니 씻지는 않은 셈이다. 셔츠도 단추 하나 풀려 있지 않았다. 평소처럼 흐트러짐 하나 없는 옷차림을 샅샅이 확인하던 이승우의 시선이 멈춘 곳은 고은교의 흰 목이었다.
붉은 잇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것을 발견한 이승우의 눈웃음이 약간 더 깊어졌다. 좋아서가 아니었다. 몹시 불쾌한 것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시현이가 선을 넘었나 봐요?”
이승우가 아무것도 아니란 듯 슬며시 물었다. 그러나 부드러운 목소리 너머 바짝 세운 가시가 올올이 느껴졌다. 고은교의 곁에서 들뜬 얼굴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던 남선재가 당황해서 입을 다물었다. 고은교 역시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이승우를 바라보았고, 그가 보고 있는 것이 제 목이란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가볍게 손으로 잇자국을 덮어 눌렀다.
“아니, 뭐…….”
여상한 반응이었다. 그 속에 숨겨진 실마리를 찾기 위해 이승우가 눈을 가늘게 뜨고 고은교를 살폈다.
때마침 고은교의 뒤로 우시현이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왔다. 평소보다 느린 걸음이었다.
“넘었으면 어쩌게?”
이승우의 시선이 만족스러워 보이는 우시현의 얼굴 위로 꽂힌다.
가이딩실의 방음은 완벽하기 때문에 두 사람이 말해 주지 않는 한 가이딩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게다가, 우시현은 늘 가이딩을 하기 전에 이중으로 보호막을 펼쳐 두고 가이딩을 했다.
그렇기에, 그 안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추측하려면 팔자에도 없는 추리를 펼쳐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듯 모든 말 한마디에 신경을 곤두세우다 보니, 평소라면 그냥 지나칠 말 한마디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음…….”
이승우가 살짝 웃었다. 몇 개월간의 경험을 통해 고은교는 이승우가 상당히 열받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우시현, 파렴치하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이승우가 목을 움켜쥐고 있던 손을 부드럽게 치웠다. 고은교는 약간 얼떨떨한 심경으로 이승우를 비껴 보았다. 단정한 손끝이 목의 순흔을 가볍게 더듬는다.
“아프지는 않으세요?”
“전혀…….”
반사적으로 대꾸하자, 이승우가 만지는 것을 멈췄다.
딱히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불만의 표시로 우시현이 목을 좀 씹어 놓긴 했지만, 피가 비치지도 않았고 특별히 아프지도 않았다. 애초에 친근감을 이기지 못해 해 놓은 짓에 가까웠다. 본인이 개도 아니면서 영역 표시를 이런 식으로 한 건 우스운 일이었지만…… 그래, 예전이라면 조금도 허락하지 않았을 일을 우시현이 너무 쉽게 넘어온 감이 없지는 않았다.
“웃긴 새끼네. 내가 무슨 짓을 했을 줄 알고?”
“그건 네가 더 잘 알겠지.”
그걸 우시현도 모르지 않았다. 물론 일련의 사고를 겪은 뒤 우시현은 아주 기세등등해졌다. 본래의 자신만만한 태도를 되찾은 거만한 남자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이승우를 깔아본다.
“너야말로 평소에 무슨 짓을 하겠지. 그러니까 고작 이딴 자국으로도 존나 찔리는 거 아니냐? 남도 너랑 똑같은 짓을 했을 줄 알고.”
“…….”
물끄러미 우시현을 바라보던 이승우가 그 순간엔 입을 딱 닫았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시현의 말이 맞다는 은근한 방증이었다. 그러자 사정없이 빈정거리던 우시현의 눈초리가 확 사나워진다.
“이 새끼 봐라.”
우시현은 은근히 떠보는 짓 따위는 하지 못하는 성미였으니 방금 한 말은 순도 백 퍼센트의 빈정거림이었으나…… 놀랍게도 맞혔다. 소 발에 쥐잡기였다. 이승우 역시 가이딩실 문이 닫히면 온갖 핑계를 대며 고은교와 더 접촉하려고 애쓰는 놈이다. 우시현과 다를 것 없었다.
“나처럼 하고 싶었으면 처음부터 교수님께 잘했어야지, 시현아.”
물론, 우시현처럼 막무가내로 굴지 않는다는 점에서 조금 더 사정이 낫기는 했다.
“니가 뭘 잘했는데?”
뻔뻔하게 웃는 이승우를 향해 우시현이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너만큼 거칠게 굴지는 않잖아.”
두 사람은 언제 사이가 좋았냐는 듯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었다. 한쪽은 사뭇 부드러운 어투여서 이렇게 보면 다른 한쪽이 일방적으로 화내는 것 같지만, 이승우를 아는 사람들 눈에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기세가 읽혔다.
“교수님, 정말 괴롭힘당하는 거 아니세요?”
이승우와 우시현이 기 싸움을 하는 내내 떨떠름한 기색으로 한 걸음 떨어져 있던 남선재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습니다.”
이쯤 되면 자신도 헷갈릴 지경이다. 황당한 얼굴로 중간에 낀 채 이승우와 우시현을 번갈아 바라보던 고은교가 비교적 부드러운 태도를 고수하는 이승우의 팔을 잡았다.
“승우 군.”
“……네.”
그만하라는 말을 하기 위해 입을 벌리려다 고은교는 자신이 이승우를 ‘이승우 에스퍼’가 아닌 ‘승우 군’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잠깐.’
예전에도 몇 번 그랬던 것 같다. 딱히 호칭은 중요하지 않아서, 그냥 내키는 대로 불렀던 것 같은데…….
‘지나치게 친밀하게 느껴지나.’
안 그래도 소유욕 때문에 부딪치고 있는 상황이었다. 지금 이런 식으로 두 사람 중 하나를 부르는 건 옳지 못할지도 몰랐다.
고은교가 이름만 부르고 입을 다물자, 이승우와 우시현이 동시에 고은교의 얼굴을 살폈다. 고은교의 기분에 훨씬 민감한 이승우가 난처한 듯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우시현이 가이딩 중에 고은교에게 손이 아니라 입을 댄 것 같아 기분이 박살 났지만, 사실 자신에게 그러지 말라고 할 권한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매사에 무신경해 보이는 이 남자를 조금 더 흔들어 보기 위해 자신 역시 그를 만날 때마다 수위를 높이며 과감한 접촉을 하지 않았던가.
“저녁 먹으러 갈까요?”
굳이 고은교를 곤란하게 만들어서 그의 심기를 거스르는 건 장기적으로 봤을 때 현명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기왕 고은교가 먼저 자신의 팔을 붙들어 준 김에, 이승우는 고은교의 손을 다정하게 덮어 쥐며 말을 이어 갔다.
“저번에 먹었던 백반집 어떠세요? 밑반찬이 깔끔하다고 잘 드셨던 것 같은데.”
언제 냉랭하게 굴었냐는 듯 이승우가 봄날처럼 사르륵 녹는 목소리로 물었다.
“하여간 여우 같은 새끼.”
우시현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휴대 전화를 꺼냈다.
이승우가 전의를 상실한 덕분인지, 두 사람의 기 싸움은 금세 사그라졌다.
문제가 있다면, 그날처럼 고은교를 중간에 두고 밀고 당기는 태도가 걸핏하면 튀어나온다는 것이었다.
이승우와 우시현은 본래 친구 사이로, 대학 동기였다. 장이주가 고은교의 몸에서 깨어나기 직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고은교’를 적대하며 친밀하게 지냈다. 말하자면 공공의 적이 있어 전략적인 친분을 갖게 되었다는 의미인데, 그 과정을 거치며 꽤나 서로를 각별하게 여기는 친애의 정이 생기기도 했던 것 같다.
따라서 이승우는 뜻하지 않게 ‘고은교’가 우시현에게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그래서 무슨 짓까지 불사했는지, 우시현을 사랑하는 것을 넘어 숭배하고 있다는 것을 모두 보게 되었다.
우시현은 물 에스퍼였지만 성격이 몹시 거칠었다. 기꺼이 자신의 것을 남들과 공유하며 성질머리를 참아 누르는 인간이 아니라는 뜻이다. 반면에 이승우는 부드러운 기질을 갖고 있었지만, 고은교의 내력으로 인해 우시현에게 어쩔 수 없는 열패감을 품게 되었다.
뭐, 비단 우시현이 아니더라도 짝사랑하는 가이드의 목에 잇자국을 발견하면 눈이 돌아갔을 테지만…….
한번 물꼬가 트이자, 이승우와 우시현은 사사건건 갈등을 빚었다.
‘……하아.’
고은교의 입장에서는 퍽 피곤한 일이었다. 일전에 이승우는 우시현을 질투하여 고은교의 목록에서 스스로 떠난 적 있었다. 물론 그 일은 우발적인 심경 변화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고심 끝에 이승우 자신을 에스퍼 이승우가 아닌, 온전한 연애 대상자로 인식시키기 위해서였지만…… 그리고 그것이 고은교에게 제대로 먹혀들어 가기도 했지만…….
‘그래서 더 신경 쓰여.’
이런 감정 노동에는 쥐약이다.
“교수님, 혹시 피곤하세요?”
걱정스러운 눈길로 고은교를 들여다보며 남선재가 묻는다. 그들은 현재, 가이딩실 안에 단둘이 앉아 있었다.
오늘은 월요일.
남선재에게 약속한 가이딩을 진행하기로 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