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그들은 다리 사이에 둥근 테이블을 둔 채 앉아 있었다. 센터의 가이딩실에서 하는 첫 가이딩이었기 때문에 남선재는 단단히 긴장했는지 등을 꼿꼿이 세우고 몇 번이나 손수건에 손을 닦았다.
손을 잡기 전까지 그들은 사소한 잡담을 나누었다. 고은교도, 남선재도 약속한 시각보다 십 분이나 일찍 도착했기 때문이다. 가이딩을 하기 전까지 그들은 가벼운 대화를 나누었다. 이승우나 우시현은 마음껏 가이딩 시간을 고무줄처럼 늘렸다 줄였다 했지만, 기본적으로 고은교는 시간을 칼같이 지키려는 면이 있었다.
많이 피곤하시냐는 남선재의 물음에 고은교의 손이 멈칫했다.
“그렇게 보입니까?”
“조금이요.”
그렇게 대답하며 남선재가 고은교의 손을 잡았다.
금요일 오후, 함께 저녁을 먹고 퇴근하면서 고은교는 지나가는 말로 남선재에게 하고 싶은 대로 염색을 해도 괜찮다고 했다. 실제로도 센터 내 이능력자들의 복장에는 딱히 기준이랄 게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팀장들이 팀원들을 관리했지만, 대부분이 엄격하지 않고 자유로웠다.
그래서인지 월요일에 나타난 남선재는 예전처럼 밝은 갈색으로 머리를 염색하고 왔다. 순진해 보이는 얼굴 위에 얹어진 갈색 곱슬머리가 어찌나 잘 어울렸는지 모른다. 그는 쑥스러운 얼굴로 제 머리털을 한번 매만지더니 고은교에게 슬쩍 고개를 숙여 보였다.
“사실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으며, 고은교가 가이딩을 했다.
그에 맞춰 남선재의 몸이 살짝 움찔거린다.
남선재와는 이미 신 게이트 안에서 가이딩을 해 본 적이 있었다. 파장도 그럭저럭 잘 맞는 수치였고, 애초에 남선재는 까다로운 에스퍼가 아니었다. 체내 위험률 수치가 바닥인 적도 없었기에 말 그대로 자신이 원하는 가이드, 고은교를 고른 것이지 고은교여야만 해서 그에게 온 것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교수님도 모르는 것이 있으세요?”
남선재가 눈가를 붉히며 미소 지었다. 가이딩으로 인해 전신에 피가 도는 남선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고은교는 방금 한 말을 어디에선가 들어본 적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것도 아세요, 였던가?’
남선재와는 완전히 정반대의 의미였다. 시건방진 내용이었지만 어투가 워낙 부드럽고 다정해서 뭐라고 하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부끄럽지만 인간관계에 서툴러서, 싸움을 중재하는 방법은 잘 모릅니다.”
그 말에 남선재는 고은교가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지 바로 알아차린 눈치였다.
“아, 시현이랑 승우 말씀 하시는 거죠…….”
“…….”
“저도 걔들 사이가 그렇게 나빠진 건 처음 봤어요. 시현이가 좀 못되게 굴었나?”
글쎄, 고은교는 딱히 그런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우시현이 거칠게 나오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승우의 어투는 사람을 긁는 데 최적화되어 있었다. 우시현은 몹시 눈치가 빨랐고, 자신을 긁는 이승우의 말을 몰라 볼 리 없었다. 따라서 두 사람은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서로의 심기를 상하게 할 수 있는 인간들이었다.
고은교의 에스퍼는 단 세 명뿐이었다. 그중 둘이 다투면 신경이 쓰이는 게 당연했다. 게다가, 이승우의 마음이 어째서 그렇게까지 쉽게 날이 서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에…….
“그래도 친구 사이니까, 금세 다시 좋아지지 않을까요?”
남선재는 아주 낙관적인 편이었다. 고은교는 문득 남선재의 눈을 바라보았다. 상냥하게 웃고 있는 눈이었다.
“선재 군 말대로 그랬으면 좋겠군요.”
애써서 누군가의 사이를 중재하는 일은 예전에도 잘 없던 일이다. 정확히는 중재할 필요가 없었다. 자신의 팀으로 남아있지 못할 정도로 심기가 상하면 그의 목록을 떠나면 될 일이었다. 가이드에 대한 소유욕이 너무 넘쳐나서, 팀원으로서의 본질을 잊어버리고 가이딩만 탐하는 녀석들은 스스로의 손으로 잘라냈다.
하지만 이승우는 가이딩과는 상관없이 단순하게 고은교의 내력이 신경 쓰이는 것이다. 과거, ‘고은교’는 이승우는 물론이고 우시현에게도 가이딩을 해 주지 않았다. 능력이 없어서 해 줄 수 없었던 건지, 아니면 일부러 가이딩을 해 주지 않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승우의 말에 따르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야.’
진짜 ‘고은교’가 우시현을 사랑했다면, 그 마음을 그 어떤 것으로도 가리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직 고은교의 침실에는 우시현의 사진이 빼곡히 걸려 있었다. 장이주가 아니던 시절의 고은교가 한 장 한 장 정성껏 붙인 사진이었다.
“걱정 마세요.”
남선재가 위로했다.
“제가 보기에는 뭔가…… 그래도 서로 익숙해지고 있는 것 같던걸요.”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좋겠다. 그들을 세심하게 신경 쓸 여력이 없어서 이렇게 고민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데리고 있는 에스퍼의 수가 적으니, 그만큼 여력이 남아돌았다. 그렇다 보니 생각이 깊어졌고, 이승우의 마음이 보다 궁금해졌다. 그에게 자신의 마음을 정확히 말한 것은 이승우가 최초였다. ‘고은교’의 마음이 누군가에게 갔던 적이 없었다면, 이승우는 그렇게까지 날카롭게 반응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또 갑자기 떠나 버리면…….’
그는 자신을 떠나는 에스퍼를 한 번도 잡지 않았다. 그럴 이유도, 필요도, 시간도 없었다. 실적을 내고, 육체의 아픔으로부터 달아나는 것만이 그의 인생에 있었던 유일한 목표였다.
그러나 지금은 과거와 달라졌다.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몸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건강한 몸에 감사했다. 몸의 주인이 돌아오기 전까지, 살아왔던 삶의 공식대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지만 사실 지금의 삶은 장이주의 삶과 명백히 달랐다. 그때 자신은 궁지에 몰린 쥐처럼 발악하듯 살았다.
여유가 생기니 오히려 마음이 느슨해졌다. 그러자 삶의 유속도 느려졌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줄 여유가 없었던 예전과는 달랐다. 가장 큰 변화는 바로 이것이었다.
안타까운 사람에게 마음이 쓰였다. 곁을 맴도는 이에게는 정을 주게 되었다. 사실, 그건 예전부터 그가 가지고 있는 기질 중 하나였다. 가이드라면 누구나 도움을 주고 싶어 하니까.
이승우가 고은교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팀원 중 누군가와 심하게 다투었다는 이유로 떠나지 않았으면 했다.
떠나고 나면 어떻게 붙잡아야 할지 몰랐으므로.
그런 생각이 들자, 그는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그때였다.
“그런데 교수님……. 그냥 ‘선재야’라고 불러 주시면 안 돼요?”
땀이 날 정도로 고은교의 손을 꼭 쥐고 있던 남선재가 물었다. 가이딩을 시작하고, 대화를 나눈 지 사십 분쯤 지났을 때였다.
“아…….”
남선재를 ‘남선재 에스퍼’ 혹은 ‘선재 군’이라고 불렀던 것은 교수로서 그를 처음 보았기 때문이었다. ‘남선재 에스퍼’라고 그를 불러야 정확한 호칭이겠지만, 그는 남선재가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그와 관계를 맺었다. 따라서 ‘선재 학생’ 혹은 ‘선재 군’이라고 그를 불러도 괜찮은 것이다.
다만, 남선재가 요청한 것은 보다 더 막역한 사이가 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물론 예전에도 몇 번이고 받았던 요청이었다. 단 한 번 가이딩을 받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편하게 대해 달라고 말하는 에스퍼들이 있었다. 대부분 고은교는 에스퍼들과의 관계를 비지니스적으로 받아들여 그럴 수 없다고 선을 긋고는 했지만, 아주 자주 보게 되는 자신의 에스퍼에게까지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도 사람이었기 때문에 마음이 물러지는 순간이 찾아오고는 했다.
“불편하시면 안 하셔도 돼요. 그냥, 편하게 대해 주셨으면…… 하구요.”
남선재의 귀여운 말투에 설핏 미소가 지어졌다. 그는 고민 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놀랍게도, 남선재의 말은 적중했다.
“……임시 동맹이다.”
“바라던 바야.”
이승우와 우시현은 서로를 냉철하게 훑어보았다.
그들 사이에 골은 굉장히 깊어진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만은 않았다. 이유가 있다면 우시현이 생각보다 잔정이 많은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그가 고은교의 목록에 들어가리라 마음먹은 것도, 이승우가 고은교에게 약점을 잡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승우는 보이는 것만큼 다정하거나 선량한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선의는 선의로, 악의를 악의로 갚을 줄은 알았다. 게다가 그는 우시현이 느끼는 불안함을 넘어, 자신만이 추측하고 있는 어떠한 사실로 인한 초조함을 함께 안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그들은 고은교가 남선재를 편애하고 있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지금은 고작 남선재지만, 이미 고은교의 등장은 알음알음 퍼져나가고 있었다. 가이딩하는 에스퍼와 파장이 맞지 않으면 파장을 스스로 맞추어서 가이딩을 해 버리는 베테랑 가이드는 아주 드물었다. 에스퍼들이 고은교에게 이끌리는 건 당연한 일이란 소리다.
남선재까지는 어쩔 수 없다지만, 이 이상 다른 에스퍼들과 고은교를 나누고 싶지 않다. 하지만 게이트 일정을 빡빡하게 짜는 고은교를 완벽하게 지키기 위해서는 최소한 자신만큼 강한 에스퍼가 하나는 더 필요했다…….
편애받는 남선재를 대적할 만한 녀석이면 더 좋겠지.
이 위기감은 신 게이트 안에서처럼 그들을 한 편으로 묶어 놓았다. 실제로, 편애는 눈에 드러났다. 자신들은 몇 날 며칠을 고생해 가며 고은교의 목록에 올랐는데, 남선재는 말 몇 마디로 냉큼 고은교를 차지해 버린 것이다…….
“나는 씨발, 그 지랄을 했는데…….”
우시현이 이를 부득 갈았다.
“나는 그 정도는 아닌데, 안타깝네.”
이승우가 웃는 낯으로 말했다. 우시현은 암묵적 동맹을 맺기로 한 친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깎은 듯 아름다운 이마에 시퍼런 힘줄이 돋아난다.
“이 새끼가 근데, 저번부터 자꾸 좆같이 구네?”
동맹은 동맹이고, 열받는 건 열받는 거였다. 물론 우시현의 거친 기세를 이승우는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받아쳤다. 우시현과 이승우의 기세가 맞붙는 순간 센터 벽이 부르르 떨렸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그 순간 가이딩실 문이 열렸다.
우시현과 이승우 사이에 흐르는 심상치 않은 기류를 눈치챈 고은교가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농담이 아니라, 일 초라도 늦게 나왔으면 센터 건물이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이 녀석들이.’
질투고 나발이고, 강경책을 쓸 때였다.
“두 사람, 화해하고 오세요.”
“……네?”
“그전까지는 일정이 없는 걸로 하죠.”
웃는 낯이던 이승우의 표정에 금이 갔다. 고은교는 ‘일정’이 아니면 만나 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 말인즉슨, 화해하기 전까지 이승우와 우시현은 접근 금지를 당한 셈이다.
“가자, 선재야.”
“네!”
전에 없이 친근한 어투로 남선재를 부르는 태도에 두 에스퍼는 할 말을 잃었다. 우시현과 이승우를 똑바로 쳐다보던 고은교가 홱 몸을 돌려 걸어갔다.
바야흐로 새로운 국면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