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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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공기가 산뜻했다. 4월 특유의 쾌청한 바람과 조금씩 더워지는 공기가 옷 사이로 스며들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센터 복도를 가로지르는 보폭은 일정하다. 예전이라면 그를 알아본 에스퍼들 때문에 여기저기 인사를 받아 주느라 걸음이 느려졌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오늘 고은교는 국장의 호출 때문에 센터에 방문한 참이었다.
익숙한 길을 따라 그가 단숨에 국장실 앞에 도착했다. 노크를 하자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린다. 워낙 갑작스러운 호출이었기 때문에, 그가 데리고 있는 에스퍼들 때문일 것이라고 짐작했었는데…….
“어서 오게, 고은교 가이드.”
국장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정확하게는, 국장 혼자 앉아서 고은교를 맞아 주었다.
“안녕하십니까.”
고은교는 약간 의아한 듯 눈썹을 치켜세운 채 국장실 안을 쓱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국장이 시키는 대로 그의 앞 의자에 조심히 앉았다.
국장은 약간 웃는 낯이었는데, 과거의 경험을 살려 보더라도 무슨 말을 할지 알 수 없는 아리송한 표정이었다.
“현장 업무는 할 만한가?”
“네. 국장님도 잘 지내셨습니까?”
체면치레에 불과한 안부 인사가 오갔다.
“나야 뭐 똑같지.”
평범한 인사 이후에 국장은 상당히 낯선 것을 보는 느낌으로 고은교를 바라보았다. 고은교가 된 이후로 세 번째로 보는 만남이었지만, 고은교의 사무적인 태도에는 영 익숙해지지가 않는 듯했다.
‘……고은교는 고은교니까.’
고작 몇 달 동안 성실히 산 것으로는 한번 형성된 이미지를 바꾸는 건 불가능할 터였다. 고은교는 괜스레 국장실을 둘러보았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국장이 불쑥 말했다.
“긴말은 필요 없겠지. 자네, 한 번 더 한국대 강의를 맡아 줄 수 있겠나?”
“……예?”
너무 갑작스러운 말이었다. 국장의 입에서 들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말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국장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국장이 덧붙여 설명했다.
“올해 한국 대학 위탁 강의를 맡았던 가이드가 영국으로 발령이 났어. 너무 좋은 기회라서 놓치고 싶지 않다고 하더군.”
“……아하.”
그는 약간은 흥미롭다는 듯, 동시에 그게 자신과 무슨 상관이냐는 듯 국장을 쳐다보았다.
“자네 강의가 좋았다면서? 열의 있게 가르쳤다는 소문이 자자해. 그러니, 그쪽에 관심이 있으면 이번에도 해 보는 건 어떤가 싶은데.”
솔직히 그 말에는 코웃음을 치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강의를 다시 하라고? 자신이 어떻게 강의를 했는지 안다면 누구도 감히 자신에게 ‘다시 강의를 하라’고 말할 수 없을 터였다.
정말이지 수난뿐인 강의였다.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말을 듣지 않았고, 졸지에 악연만 고스란히 얻었다. 물론, 지금 와서는 그 악연이 새로운 가능성으로 변모했으나 당시에는 그랬다는 이야기다.
“죄송하지만 시간이 안 될 것 같습니다.”
아주 냉담한 목소리에, 국장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새로운 제안을 꺼냈다.
“커리큘럼 끝에 우수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실습이 있네.”
실습? 이 뜻밖의 말에 고은교가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실습이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인턴끼리는 게이트에 들어갈 수가…….”
“자네도 알다시피 그럴 수 없지. 그러니까 센터에서 상급 에스퍼가 지원 나갈 거네. 그리고 자네가 팀장 가이드로 참여해 주면 좋겠어.”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게이트라면 그렇게 좋은 품질의 게이트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실습이라는 말에 마음이 조금 동한 것은 사실이다. 국장의 제안을 칼같이 거절하고 나가려던 걸음을 일단 멈추는 데 성공했다는 뜻이었다.
국장은 여전히 긴가민가하다는 표정이었지만,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바로 게이트 설명을 했다.
“혹시 반물질 게이트라고 들어봤나?”
“……반물질, 이라니요?”
“게이트는 물질 게이트와 비물질 게이트로 나뉘어 있네.”
“…….”
물론 이건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물질 게이트는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것으로만 구성된 게이트네. 비물질 게이트는 다르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아. 대신 대부분 안전하고, 환상적이지. 그래서 몇몇 비물질 게이트는 휴양지로도 개발되어 있어.”
그것 역시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는 입을 꾹 닫고 국장의 말에 집중하며 들었다. 지금 고은교의 흥미를 끌고 있는 것은 게이트의 설명 따위가 아니었다. 새롭게 나타난 게이트 형태, 그 자체였다.
“그런데 최근, 환상 게이트[幻想 Gate]라는 이름의 신 게이트가 생겨났다네. 기존의 도플갱어 게이트와 별로 다르지 않지만, 보스 몬스터가 게이트마다 달라진다는 점이 특이점이지.”
“…….”
“게이트 등급은 A-야. 고등급 게이트를 학생들에게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건 이 게이트가 안전하기 때문이네. 게이트 클리어에 실패하더라도,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게이트가 사람들을 내보내고 스스로 사라지거든. 한마디로 피해가 전혀 없는 셈이지.”
그래서 반물질인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물질 게이트의 형태로 나타나지만, 완전히 사라짐으로써 비물질이 되니까.
“……그렇습니까? 굉장히 희귀한 형태인데요.”
결국, 고은교는 참지 못하고 국장의 말을 거들었다. 국장은 반짝거리는 눈빛의 고은교를 가만히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네. 다시 말해…… 그 게이트에서 얻을 수 있는 시료는 전무하다고 할 수 있어.”
어째서 학생들에게 이렇게 높은 등급의 게이트가 실습용 따위로 내려왔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 등급이었다. 센터에서 최상급 에스퍼를 보호 목적으로 내려 보낸다 하더라도, 상식적으로 외부에 주어도 될 게이트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의문 서린 눈빛을 읽어내며 국장은 짧게 웃었다.
“사실 한국대에 배정된 실습용 게이트는 환상 게이트가 아니었다네. C급 게이트 중 하나가 될 예정이었지.”
“…….”
“그런데 자네, 요즈음 게이트 실적을 올리는 데 열심이라지?”
국장이 컵 홀더를 쥐며 조용히 말했다.
“누구나 한 번쯤 게이트에 흥미를 가지게 되면 그렇게 되는 법이거든. 게이트가 주는 매력에 빠졌을 테고……. 새로운 게이트라면 사족을 못 쓰게 되지. 나는 자네도 그렇게 변했을 거라 생각하네.”
“…….”
“환상 게이트가 생겼을 때 제일 먼저 권해 주고 싶었던 사람이 있었어.”
“…….”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뭣 하지만……. 자네의 열정을 보니 떠오르는 사람이 있더라고.”
예전이라면 고은교라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았을 것이다. 과거, 고은교가 했던 악행들은 그에게 편견을 심어 주기 충분했다. 하지만 국장은 때때로 게이트의 매력에 심취한 사람들이 얼마나 성실히 일에 몰두하는지 잘 알았다. 희귀병에 걸려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존경받는 팀장으로서 활동했던 가이드가 그 대표적인 예였다.
국장은 고은교의 눈에서 그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한번 믿어보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오직 그것 하나뿐이었음에도, 그는 왜인지 고은교가 자신의 제안을 수락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국장 권한으로 환상 게이트를 제안해 보겠네. 어떤가? 해 보겠나?”
고은교는 고민하듯 입을 닫았다. 하지만 이미 그 시점에서 답은 나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예.”
국장은 말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마치 그 안에 누군가가 있는 걸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니, 찾기라도 하는 것처럼.
*
그날 고은교는 피트니스 센터도 들리지 않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당분간 있을 외출 일정도 모두 취소했다. 일주일에 고작 한 번 있는 강의였지만, 강의 준비가 만만치 않았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었다.
우선 원래 강의 커리큘럼이 어땠는지 확인해 봐야 했다. 벌써 조금 있으면 중간고사였다. 중간고사 문제는 이미 본래 강의를 맡았던 가이드가 냈다고 들었다.
지난번에는 커리큘럼이랄 것이 없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커리큘럼을 작성하여 수업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아찔했었는데, 이번에는 커리큘럼대로 강의가 이미 진행되고 있는 상태였다. 대타로 맡아서 수업을 계속하는 만큼 본래의 커리큘럼을 숙지할 필요가 있었다.
그때, 옆에 둔 휴대 전화가 반짝거렸다. 휴대 전화 화면을 힐끗 내려다본 고은교가 무심한 손길로 전화를 받았다.
“전화 받았습니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교수님, 이승우입니다.]
그건 이미 알고 있다.
“무슨 일입니까?”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했어요.]
그래, 당연히 마땅한 용무가 있을 리 없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부드럽게 속삭이는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딱딱하게 굳어 있던 입술이 약간 부드러워진다.
그러고 보니, 우시현과 사이가 좋아지기 전까지는 일정이 없다고 엄포를 놓았던 게 이렇게 괜찮은 타이밍으로 돌아올 줄은 몰랐다. 역시 세상사 알 수 없는 법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휴대 전화를 가볍게 다른 쪽 어깨로 넘겨받았다.
“그렇습니까?”
[네.]
이승우가 낮은 웃음소리를 냈다.
순간 발치가 간지러워지는 느낌에 작은 벌레가 기어 다니는 건가 싶어 살짝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하지만 바닥은 말끔하고, 발에도 먼지 하나 붙은 게 없다.
[오늘 센터 오셨다면서요……. 저도 부르시지.]
가벼운 어투의 목소리였지만, 아쉬움이 진하게 묻어났다. 고은교는 가벼운 미소를 띤 채 의자에 등을 깊숙이 기댔다. 그리고 마우스 휠을 내리면서 강의 커리큘럼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리 오래 있지는 않았어요.”
[국장님 호출이셨나요?]
“맞습니다. 한국대 강의를 다시 맡아서 해 주면 안 되겠냐고 물으시더군요.”
[……강의요?]
“네.”
중간고사 문제를 미리 받아봤을 때부터 느꼈지만, 수업 내용은 아주 쉬웠다. 고은교는 그제야 자신이 진행했던 수업이 방식을 떠나 학생들에게 꽤나 어려운 수준이었음을 이해했다. 말로 풀어 설명하는 것으로는 따라잡기 벅찬, 최소 반년에서 일 년 동안 꾸준히 배워야 하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학생들은 모두 중간고사 이전에 개인 과제를 냈고, 그 개인 과제란 게이트에 관한 신문 기사를 스크랩해 감상문을 써서 제출하는 것이었다.
집중해서 강의 커리큘럼과 학생들의 과제를 쭉 훑어보던 고은교는 갑자기 전화 너머가 조용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승우야?”
[네.]
전화가 끊어진 줄 알고 무심코 확인차 부른 이름에 즉각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약간 민망한 기분이 된 고은교가 휴대 전화를 슬쩍 내려다본다.
[강의하는 걸 그렇게 좋아하시는지 몰랐어요.]
약간 불만스러운 기색으로 목소리가 말했다. 고은교는 헛웃음을 지었다. 고은교가 ‘강의’를 하던 시절을 기억하는 건 비단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그때, 고은교의 강의를 망친 주범 중 한 사람은 분명 이승우였다. 비 오는 날 그를 찾아와 우산을 건네며 협박하던 일은 오해 때문이라고 치더라도, 과제 날 축제를 핑계로 결석한 건 학생으로서 아주 불량한 태도였다.
“썩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저절로 냉담해진 목소리에 전화기 너머의 남자가 조용해진다.
[……죄송해요.]
약간의 침묵 끝에 사과가 돌아왔다. 눈치 빠르게도, 이승우는 고은교의 말에 담긴 의미를 읽어낸 듯했다.
고은교는 흠, 하는 소리를 내고는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사무적인 어조로 말을 꺼냈다.
“굳이 이승우 에스퍼 때문만은 아니에요. 시간 강사라고 무시당하는 일도 있었고……. 어쨌든, 일이 그렇게 됐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네, 말씀하세요.]
정말 많이 미안한가? 고은교의 말에 대답하는 이승우의 목소리는 어딘지 어둡게 가라앉아 있는 것 같았다. 고개를 기울인 고은교가 금세 생각을 털어내고는 말을 이어 갔다.
“6월 말쯤에 학생들이 들어갈 실습 게이트에 같이 들어가 줄 수 있어요?”
조금의 틈도 없이, 전화기 너머에서 다정한 목소리가 대꾸했다.
[물론이죠.]
“고민 정도는 하고 말해요.”
단박에 승낙하는 말을 들으니 어쩔 수 없이 웃음이 나온다. 언제라도 도울 준비가 되어 있었던 사람처럼 이승우는 재빠르고 순종적이었다. 본질은 그렇지 않은 걸 아는데도, 속기 시작하는 건 한순간이었다.
그 한 번의 충돌이 이승우에게는 꽤 강렬한 파문을 일으켰던 걸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고은교는 이승우가 자신에게 가졌다는 연애 고백을 당연한 순서처럼 뒤이어 떠올렸다.
[충분히 했어요.]
고민 말이에요, 라고 덧붙이는 말을 들으며 고은교가 마우스에서 손을 떼어 냈다. 그러고는 공연히 머리칼을 매만지며 통화를 이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