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생각보다 통화는 길게 이어졌다. 말이 없어질라치면 저쪽에서 시시껄렁한 화제를 꺼냈다. 학생이었을 때 피드백을 안 해 주셨으니까 지금 해 주시면 안 되느냐고 묻길래 다음 시뮬레이션에서는 해 주겠다고 약속하거나, 은근한 말투로 누가 무시했냐고 묻길래 얼떨결에 학생은 아니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도강해도 돼요?]
“안 됩니다. 졸업생이 무슨 도강입니까?”
시계를 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훨씬 많이 지나있었다. 그 말을 끝으로, 고은교는 전화를 끊었다. 끊기 전, 이승우가 조금만 더 전화를 하면 안 되냐고 졸라대어 약간의 실랑이가 있었다. 전화를 끊었을 때즈음에는 저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이상하게 기분이 개운했다. 늦은 밤까지 이승우의 전화를 받으며 강의 계획서나 학생들의 과제 따위를 확인했는데도 불구하고 푹 쉰 것처럼 정신이 맑았다. 이건 어떤 징조일까. 강의가 잘될 것이라는 뜻일까?
그의 시선이 단 두 시간뿐인 강의 시간표에 머무른다.
그는 생각했다.
이번에는 학생들에게 휘둘리지 말자고.
Last order
가벼운 종소리와 함께 술집 문이 열렸다. 누군가 주저 없이 술집 안으로 달려들어 왔다. 길다란 테이블 하나를 두고, 빙 둘러앉은 동기들 옆자리에 걸터앉은 청년의 옷깃에는 바깥바람 특유의 비린내가 묻어 있었다.
“너네 들었냐?”
왁자하게 떠들며 웃던 친구들의 시선이 단번에 그를 향한다. 지금 막 술집으로 들어온 학생이 자연스럽게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능력자의 이해’ 수업, 교수 바뀐대.”
“갑자기?”
어처구니없다는 투의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강의 첫날에 교수가 바뀌었던 적은 있었어도 강의가 시작한 지 한 달이나 지나고 난 다음 교수가 바뀌는 일은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사월인데?”
“그러니까 내 말이.”
“야, 확실한 거야?”
술을 마시던 친구들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시큰둥한 반응이 반, 놀랍다는 반응이 반이었다. 사실 학생들 입장에서야 교수가 바뀌든 바뀌지 않든 별생각 없었다……. 그게 아무렇게나 공부해도 점수가 나오는 교양 수업이라면 더더욱.
“확실해. 영국 지부로 떠나는 가이드 명단에 교수 이름 있는 거 재영이 사촌 형이 확인했다더라. 알지? 재영이 사촌 형, 센터에서 일하는 거. 아무튼 그게 문제가 아니라…… 그 교수가 온대.”
“무슨 교수?”
“이 답답아……. 지금 교수가 가면, 이 수업은 누가 맡겠냐?”
“뭐, 모르지. 이능이해는 센터에서 나오는 가이드가 맡는 거니까……. 아, 전임자가 하려나?”
“그래!”
“그게 왜?”
멀뚱한 얼굴로 동기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 동기는 직전 학기까지 휴학을 하고 온 참이었다.
“이런 씨발……. 고은교 교수?”
“그래!”
하지만 그 동기를 제외하고, 나머지 학생들의 표정은 싹 굳었다. 몇몇은 욕설을 지껄이며 술집 탁자에 이마를 쿵쿵 박기도 했다.
이 일변한 분위기에 쫄아든 동기가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뭐야, 니들. 왜 이래? 나 일부러 겁주려고 이러지?”
“지랄…….”
우리도 그랬으면 좋겠다. 쓴 술을 입 안에 탁 털어 넣으며 동기 중 하나가 중얼거렸다.
“그 교수는 악마야…….”
분위기 파악 못 한 동기가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다.
“아, 빡빡한 타입?”
“빡빡…….”
테이블 여기저기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걸 단순히 ‘빡빡하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미친 일정으로 도저히 소화해낼 수 없는 과제를 던져 주기에 대충 하는 시늉만 하면 되는 줄 알았더니, 그야말로 미친 듯이 몰아붙여졌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을 닦아 세우는 화술이 거의 예술이었다. 대학생 수준의 공부에 익숙해져 있던 그들은, 현장 이능력자가 얼마나 빡센지 강제로 간접 경험 해야 했다. 실력도 없는 놈이 교수인 척 젠체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원래는 쓰레기 같은 놈이라고 들었는데……. 이쯤 되면 우시현이 잘못 안 거지. 씨발, 그 교수한테서 학점을 도대체 어떻게 따냐?”
“모르지. 일단 중간고사 잘 치고, 기말고사만 잘 방어하면 뭐. 졸업은 할 수 있을걸.”
자포자기한 채 대화를 주고받던 학생 중 하나가 크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씨이벌. 제품이 불량이라 리콜이라도 당했나…….”
*
“앞으로 ‘이능력자의 이해’를 담당하게 될 고은교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 자리에 서면 오른쪽 발목이 뻐근해지는 것 같다.
“시험을 치기 전에 몇 가지 공지사항이 있습니다.”
교단에 서서 등을 꼿꼿이 세운 채 고은교는 강의실을 돌아보았다. 반은 아는 얼굴이고, 반은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중에 이승우, 우시현, 남선재는 없었다. 그들은 올해 2월, 무사히 졸업했다.
“우선, 강의 커리큘럼에는 변동 없습니다. 안내된 일정대로 오늘 중간고사를 치시면 됩니다.”
냉랭하게 들리기까지 하는 사무적인 어투에, 학생들이 불안한 얼굴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아직 과제를 제출하지 못한 분들은 다음 주 월요일까지 바뀐 이메일로 과제를 제출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제, 영국에서 메일이 왔다. 오늘까지 과제를 제출하지 못한 녀석들은 기한을 늘려 받아 주면 감사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이 물렁한 과제조차 똑바로 기한 내에 내지 못하는 게 말이 되나 싶었다. 하지만 이 강의는 온전한 자신의 강의라고 보기엔 어려웠고, 이미 그만둔 강의를 왜 신경 쓰나 싶은 생각이 드는 건 사실이었지만 본인이 그러고 싶다니 굳이 안 된다고 말할 것도 없었다.
너그러워진 게 아니다. 학생들의 태도가 어떻든, 기본만 하자는 생각으로 강단에 섰다. 쪽팔림을 무릅쓰고 교수로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학교에 전화해서 자세히 물어보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그가 부임하기 며칠 전 학과장이 갑자기 바뀌었다는 걸 알게 되어 어리둥절했던 기억이 난다.
“마찬가지로 성적 정정 요청도 바뀐 이메일로 보내 주셔야 제가 확인을 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 말하자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왔다.
예전에는 학생들에게 기대를 품고 있었지만, 지금은 전혀 아니었다. 어려 보이는 얼굴들은 귀엽지 않은 생각들만 하고 있을 것이고 과제는 어떻게든 대충 하려 할 것이며 모든 일을 내팽개친 채 술을 마시고 노는 일에만 열성적일 것이다.
예전에는 그들의 악의를 가소롭게 생각했다. 선을 넘었을 때는 차갑게 분노했지만, 자신은 떠날 사람이었으니 금세 잊을 수 있었다. 이렇게 돌아올 줄 알았다면 그때 더 기강을 잡아 두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학점을 무기로 학생들을 괴롭히고 싶은 건 아니었다. 언제나 그렇듯 최선을 다해 수업하고, 성적대로 학점을 줄 생각이었다. 강의실, 고은교의 기준으로 가장 왼쪽 자리에 앉은 박경호가 토할 것 같다는 얼굴로 다리를 덜덜 떨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끝으로, 미리 말해 두겠는데.”
태연히 시험지를 배부한 뒤, 고은교가 짤막하게 말했다.
“내 수업에 한 번이라도 결석하면 이유 불문하고 F입니다.”
강의실은 시험장답게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나지 않고 조용했다. 놀랍게도, 학생들 중 몇몇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네, 넵.’ 하고 대답했다. 학생들에게 전혀 기대가 없던 그는 그 대답에 의아함을 느꼈다. 학생들이란 교수의 말은 전부 무시하는 어린애들이 아니었던가?
물론, 고은교는 자신의 수업이 전설로 회자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럼 시험 잘 치세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지만, 이번 수업은 낙제자들이 걱정한 대로 극악한 난이도를 자랑했던 지난 학기 수준은 아니었다.
그것은 첫째로, 커리큘럼이 이미 짜인 수업을 중간부터 맡았기 때문이고, 둘째로, 지난 경험으로 인해 고은교가 학생들의 수준을 대략적으로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교수로서의 포부도, 학생들에게 가진 기대도 없다는 것은 놀랍게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꼭 마음가짐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지.’
어쩌면 이렇게 수업하는 방식이 학생들에게 더 유익하고 익숙한 방식일 수도 있었다.
그래, 그럴지도 모른다. 그는 일정한 시간만 학생들에게 할애하면서, 아주 냉정히 수업을 하는 교수의 양상을 띠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수업이 원활히 이루어진다는 것에 놀랐다. 학생들은 대부분 찍소리도 하지 않고 그의 수업을 들었다. 예전처럼 그를 무시한다거나 수업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었다. 대부분은 어떻게든 그의 수업을 따라오기 위해 노력했다.
“저, 교수님. 게이트 상성이 애매한 경우에는 그럼…….”
시험 기간에는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해 와서 이런 질문을 던지기도 했으니, 솔직히 말해 수업하는 맛이 나쁘지 않았다.
‘……수업하는 보람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맨앞자리에 앉아 열성적으로 수업을 듣는 학생의 수가 스무 명이 넘었다. 나머지는 낙제점을 면하려고 출석만 하는 녀석들이었다.
“「게이트 상성에 관한 분석 101 건」, 「내가 읽은 게이트와 이능력자 간의 상성 일지」, 「게이트, 상성을 중심으로」 이 세 가지 논문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네, 넵. 감사합니다.”
“이 밖에도 웹 강의실에 참고할 만한 학술 자료들을 올려 두었으니, 기말 리포트 제출하실 때 참고하세요. 미리 예고한 대로, 다음 달에 있을 게이트 실습에는 중간고사와 리포트 점수의 평균을 냈을 때 상위 열 명만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럼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쭈뼛쭈뼛 기어들어 가는 대답 소리를 뒤로 하고, 고은교는 곧바로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태도라도 좋아진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물론…… 객관적으로 봤을 때, 학교를 졸업한 뒤 냉혹한 취업 시장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나 걱정스러운 수준은 여전했지만.
두 달은 금세 지나갔다. 그동안 그는 일주일의 반은 수업 준비를, 나머지 일주일의 반은 자신의 에스퍼들을 관리하는 데 힘썼다.
오늘, 수업을 마친 그는 센터로 향했다. 다음 달 초에 있을 게이트 실습에 함께 들어갈 상급 에스퍼와 만나 두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일단 상급 에스퍼들끼리 아는 사이인지 체크해 두고…….’
그중에서도 반물질 게이트는 처음인 녀석들을 추려 놓으면 좋을 듯했다. 시뮬레이션도 몇 번 돌려야겠다. 원래는 이승우만 데리고 들어갈 생각이었지만, 당연하게도…… 그가 게이트 일정을 잡아 두자마자 우시현과 남선재도 꼬리처럼 따라붙었다.
해서, 오늘 만날 상급 에스퍼는 총 넷.
‘이승우, 우시현, 남선재. 그리고…….’
미지의 상급 에스퍼 하나. 국장이 최상급 에스퍼를 지원해 주겠다고 말했으니, 분명 그가 알고 있는 에스퍼일 것이다. 최근 신인 S급 에스퍼가 나타났다는 소문은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 만약 그런 에스퍼가 나타났다면, 대한민국이 또 한 번 들썩였을 터였다.
‘누굴까. 박소연은 지금 한국에 없을 테고……. 정창선? 아니면, 김승주?’
“여어.”
문을 열어젖히자, 방만한 자세로 드러눕다시피 앉아 있는 에스퍼가 그를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새카만 먹색 머리카락, 그리고 그와 똑같은 빛깔의 눈. 먼지라도 붙은 듯 흐릿해 보이는 색이 반들거리며 그를 향한다. 거울처럼 빛나는 눈동자에 고은교가 또렷이 비친다.
그래, 왜 몰랐을까. 순순히 학생들이 들어갈 게이트에 몸소 가겠다 자청할 만한 사람은 한 사람뿐이지.
그가 헛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에스퍼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래간만입니다, 차영헌 에스퍼.”
어쩐지 센터에서 순순히 고등급 이능력자를 내준다고 했다. 차영헌은 아마 틀림없이 자신의 이름을 듣자마자 이 자리에 자원했을 터였다. 그러고 보니, 그때 센터 1층 카페에서 만나고 처음이다.
“기다리다 목 빠지는 줄 알았다고.”
차영헌이 시원스럽게 입꼬리를 올려 웃자, 왼쪽 뺨에 볼우물이 패였다. 예전과 조금도 변하지 않은 보조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