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콜 가이드-110화 (109/132)

#110

센터의 1층 카페에서 헤어졌을 때, 그들의 갈등은 극에 달해 있었다. 차영헌은 그의 에스퍼를 죽이면 자신을 받아 줄 수 있느냐 물었고 고은교는 빈정대며 포켓몬 시합을 할 거라면 트레이너를 데리고 오라고 말했다.

그때 차영헌이 뭐라고 했더라.

‘너는 그 말을 후회하지 말아야 할 거야.’

“얼굴 보니 좋네.”

“…….”

하지만 차영헌은 언제 그렇게 으르렁거렸냐는 듯 말끔한 태도를 보였다. 오히려,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고은교를 바라보며 이렇게 묻는 것이다.

“그동안 나 뭐 했는지 안 궁금해?”

그야 뻔하지. 고은교는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별로 궁금하지 않습니다.”

냉담한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차영헌은 웃었다.

“매정한 건 여전하네.”

“…….”

“그렇게 서운하게 말하는 건 습관이야?”

다섯 사람 중에 가장 먼저 도착한 건 차영헌이었다. 굳이 멀리 떨어져 앉을 필요는 없으니, 차영헌의 맞은편에 가 앉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자연스럽게 이쪽으로 상체를 당겨 앉는다.

“나 좀 봐.”

느긋하게 몸을 늘려 앉았던 아까의 자세와는 상반된 모습이었다.

“안 그래도 폭주 에스퍼로 의심받아서 고생했다고.”

‘역시.’

차영헌은 기물 파손도 했고, 실제로 폭주했다. 그걸 센터가 모를 리 없었다. 아마 그 이후로 반 감금 생활을 하며 감시당했을 터였다. 그도 그럴 게, 가이드를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상급 에스퍼들은 유독 엄격한 관리를 받는다. 폭주를 일으킬 가능성이 다른 에스퍼에 비해 높을뿐더러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여 자살할 가능성 역시 있기 때문이다.

사실 다른 에스퍼가 아무리 감정적으로 휘둘릴지언정 차영헌은 그러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있었다. 차영헌뿐만이 아니라 노골적으로 가이딩을 받아야겠다고 말하는 에스퍼들 대부분이 그랬다.

그들은 가이드보다 자신이 받을 가이딩에 집중했다. 제 이득을 꾀하는 일에 감정이 끼어들 틈은 없었다.

‘하지만…… 카페에서 보여 주었던 태도가 좀 이상했지.’

차영헌은 가이드를 구해야겠다는 생각과는 관계없이, 원래 가이드였던 장이주를 잊지 못한 것 같은 모습을 보여 주었다.

요 근래 고은교는 알고 있던 상식이 깨부수어지는 경험을 하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에스퍼가 가이드에게 온전한 마음을 품게 될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글쎄, 계기가 어떤 것일지는 잘 모르겠다.

가이딩을 받고 난 이후 굉장한 신체적 변화를 겪어서일 수도 있고, 게이트 안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마음이란 순식간에 깊어지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법이라 했으니 비즈니스였던 관계라 하더라도 언제든지 변모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다. 그 시선을 마주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궁금해지는 것이다.

차영헌은 어느 쪽일까?

“그야 실제로 폭주한 게 맞지 않습니까?”

그 말에 차영헌이 한 번 더 웃는다. 자신의 기세에도 주눅 들지 않는 고은교가 신기해 죽겠다는 시선이다. 지그시 바라보는 눈길이 녹는 듯하다.

“그래, 그리고 폭주 에스퍼를 가라앉힌 건 너고.”

“…….”

“아직도 생각 없어?”

조금이라도 빈틈이 보이면 그대로 파고들어갈 것 같은 능숙한 태도였다. 차영헌은 성깔 더럽기로 유명한 에스퍼였고, 웬만한 가이드들이 학을 떼며 기피하는 에스퍼였지만 사실 그렇기만 하면 가이딩 부족으로 진작 죽어도 백 번은 더 죽었을 터였다.

비록 싸가지는 없더라도, 차영헌은 마음에 드는 가이드를 만나면 끈질기게 대시하는 에스퍼의 성질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다. 사람에게 이를 드러내는 개새끼가 자신에게만 꼬리를 치며 좋아하는 이면적인 모습에 끌리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가이드를 몇 번 갈아치웠었지.’

차영헌 말로는, ‘리듬 게임’을 받아도 가이딩이 전혀 되지 않았다고 했다. 지금은 이승우와 우시현이라는 경우를 보고 난 상황이니 가이딩이 영 통 하지 않는 에스퍼가 있다는 걸 알지만, 예전에는 그게 헛소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더 이상 차영헌을 맡아 줄 가이드가 나타나지 않자 센터에서는 장이주에게 차영헌을 배정해 주었다. 억지로 거부하려면 거부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강제권이라는 걸 모든 에스퍼가 사용하는 건 아니었고, 심지어 그때의 차영헌은 그에게 인사를 하러 오지도 않았다.

‘가이딩을 받고 난 이후로는 고분고분해졌던가?’

그래, 그랬던 것 같다. 귀찮았음에도 차영헌에게 가이딩을 해 줬던 이유는 마침 그때 자신이 데리고 있던 에스퍼 중 하나가 외국 기업으로 이직하게 되어서였다.

‘좀…… 절묘한 타이밍이었던 것 같기도.’

“사람 말을 막 무시하네.”

아무튼 이렇게 은근한 눈빛을 보내면서 치근덕거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대놓고 말썽을 피우면 피웠지.

“자꾸 귀찮게 굴지 마세요.”

딱 잘라 대답하자, 별안간 차영헌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흥미로워 죽겠다는 눈빛은 덤이었다.

“귀찮으면 안 하지. 그런데…….”

“안녕하세요.”

언제 문이 열린 걸까? 냉담한 듯, 무던한 듯한 목소리가 실내 공기를 가로질렀다. 차영헌은 진작 누가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전혀 놀라지 않은 기색이었다.

목 뒤를 문지르며 고은교가 고개를 들어 인사를 건넨 사람의 얼굴을 확인했다.

“왔습니까?”

“네, 제가 좀 늦었죠.”

이승우가 빙긋 웃으며 다가와 자연스럽게 고은교의 옆에 앉았다. 그의 뒤를 따라 우시현과 남선재가 들어왔다.

“우연히 앞에서 만났어요.”

묻지도 않았는데 이승우가 덧붙여 말했다.

“……센터 앞에서요?”

“네.”

남선재라면 모를까 이승우는 별로 약속 시각을 잘 맞추는 편이 아니었다. 처음 센터에서 만났을 때, 이승우는 그를 삼십 분이나 바람맞히지 않았던가?

게다가 세 사람이 정확히 같은 시각에 도착할 확률은 얼마나 될까? 모르긴 몰라도, 차라리 세 사람이 시간을 맞춰서 왔다고 하는 게 더 가능성 있는 일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이승우의 얼굴 위로 조금 난처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오는 길이 많이 막히더라고요. 어디서 냄새를 맡은 건지 기자들이 깔려 있어서……. 되도록이면 시간에 맞춰 오려고 했는데,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니, 그렇게 늦지도 않았어요. 괜찮습니다.”

“그래도요.”

그제야 고은교는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납득할 수 있었다. 현재, 이승우와 우시현은 S급 에스퍼로서의 유명세를 치르고 있는 중인 것이다.

최상급 에스퍼가 돌풍처럼 등장하면, 언론은 기가 막히게 그들을 찾아 조명했다. 사람들은 국력이나 다름없는 이 귀한 에스퍼들을 무척 마음에 들어 했고, 그들은 일상생활에 위협이 되는 게이트를 없애 주는 것과 동시에 막대한 이윤을 남겼다. 제5차 산업 혁명을 열어젖힌 건 바로 이능력자들이었다.

그중에서 원소 계열 에스퍼는 태어나기만 해도 국뽕이 차오르는 아주 희귀한 에스퍼였으니, 항상 센터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기자들에게 이 두 명의 원소 계열 에스퍼는 군침 도는 먹잇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동안은 대학생이라는 이유로 국장이 어느 정도 기사를 막아 준 것 같았지만, 언제까지고 막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가이드인 자신 역시 제주도 게이트 일로 크게 화제가 된 적이 있지 않았던가.

‘……오히려 이쯤에서 푸닥거리를 한 번 해야겠다고 생각했겠지.’

국장이라면 철저한 계산 하에 정보를 흘려, 기자들을 불러 모았을 것이다. 대중들의 관심이야 뭐, 열광적으로 끓어올랐다가도 금세 식기 마련이니까. 게다가 상급 에스퍼란 어쨌든 한 번 정도는 이름을 날리게 되는 존재였다.

아마 그들은 당분간 기자들에게 시달리게 될 것이다. 저절로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고생했습니다.”

심지어 우시현의 외모는 아주 화려했다. 기자들이 왜 진까지 쳐 가며 그들의 앞길을 막았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불행히도 남선재는 그 틈에 낀 것 같았고.

이승우의 시선이 차영헌을 향한다.

“이분은……. 아, 센터에서 차출해 주셨다는?”

부드러운 어투였지만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았다. 생각해 보니 이승우와 차영헌은 한 번 마주친 적이 있다.

우시현과 남선재는 아무 생각 없이 들어와 앉으려다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어리둥절해  하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웃고 있는 이승우의 얼굴에 명백한 경계심이 어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차영헌이라고 해서 다를 건 없었다. 고은교가 가장 총애하는 에스퍼가 이승우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었던 그는, 이승우가 등장한 내내 이승우와 눈싸움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이승우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새끼……. 또 보네?”

차영헌의 말투는 빈말로라도 곱지 않았다. 이승우를 죽여 없애고 그 대신 고은교를 차지하겠다고 선언했던 첫 만남이 떠오를 정도로 험악한 기세가 실려 있었다. 물론, 그때처럼 개싸움을 할 생각은 없는 건지 제 성깔을 여실히 억누르는 게 보이는 말투였다.

“네.”

그때도 그랬지만, 이승우는 조금도 지지 않고 차영헌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입가에 살짝 맺혀 있는 미소는 주눅 들지 않는 이승우의 태도를 고스란히 보여 주는 듯했다.

“그쪽은…… 아직도 가이드가 없으신가 봐요.”

그는 당당하게도 고은교의 옆자리를 차지한 채, 자신의 가이드에게 온갖 꼬리를 치는 에스퍼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사람을 싸가지 없이 쳐다보는 건 여전하다?”

차영헌이라고 해서 이 적개심을 알아보지 못했을 리가.

“이건 또 뭐야?”

그때, 우시현이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그 말은 꼭 2차전의 개시를 알리는 것 같았다. 하긴, 우시현이야말로 이 상황을 가만히 지켜볼 만만한 성격은 결코 아니었다.

우시현의 날카로운 말에 차영헌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고은교는 해탈한 심경으로 차영헌의 동공이 확장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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