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콜 가이드-112화 (111/132)

#112

돌아보지 않아도 뻔했다.

지금 네 명의 상급 에스퍼들은 선두에 둘, 후미에 둘로 나뉘어 가이드와 학생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우시현과 이승우가 뒤를, 차영헌과 남선재가 앞을 맡았다. 고은교는 이 사람들을 인솔하는 교수였으므로 당연히 앞에 있어야 했고.

“저러다 눈알 찢어지겠는데.”

보란 듯 고은교의 주변을 얼쩡거리던 차영헌이 말했다. 웃음기 가득 배어 있는 목소리였다. ‘누구의’ 눈알이 찢어질 정도로 그들을 노려보고 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 없었다. 물론, 이승우와 우시현일 것이다.

“제게서 조금만 떨어진다면 다른 분들도 괜찮아질 겁니다.”

“그럴 수야 없지. 재미있잖아.”

성격 하고는.

“몬스터가 어디에서 튀어나올지 모르는데 이 정도 거리는 감수해야지. 안 그래?”

그들은 어둡고 캄캄한 들판을 걷고 있었다. 찌르찌르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학생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게이트의 이모저모를 둘러보았다.

게이트는 환상 게이트라는 이름이 어울릴 정도로 풍경이 아름다웠다. 모든 게이트의 풍경이 이렇게 아름다운 것은 아니지만, 처음으로 접한 게이트가 이토록 아름다운 곳이라면 분명 게이트에 대한 좋은 느낌이 향후 게이트를 접하는 데 도움이 되어 줄 것이다.

첫 기억은 오래 남는다.

자랑은 아니지만, 그는 신입이 들어오면 곧잘 교육시키는 편이었다. 어떻게 능력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지, 게이트를 어떻게 공략하면 되는지 알려 주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가이딩도 예외는 아니다. 가이딩의 첫 기억 역시 에스퍼에게는 중요하였으므로.

가슴 아래가 뿌듯함으로 약간 뻐근해진다. 그는 살짝 미소 지은 채 학생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그럼에도 감탄을 하며 풀밭 길을 걷는 것을 지켜보았다.

“야. 굳이 이렇게 유치원 교사처럼 인솔해야 되냐?”

뒤통수가 뚫릴 정도로 그를 쳐다보고 있던 우시현이 슬쩍 팔을 끌어당겼다. 어찌나 쳐다보던지, 신경이 안 쓰일래야 안 쓰일 수가 없어 공연히 학생들 틈을 돌아다니고 있었던 차였다. 기특하게도 그는 학생들 앞에서 고은교를 ‘야’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목소리를 아주 낮추어 말했다.

“어차피 얘네도 다 이능력자들이고, 게이트 실습을 하러 온 거지 소풍 온 게 아닌데, 이렇게까지 지켜 줄 필요가 있느냐고.”

목소리에는 단단히 불만이 배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실습생으로 들어온 이능력자들은 죄다 우시현의 또래였다.

“음, 그렇지만…….”

“시현이 말도 일리가 있어요.”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이승우가 우시현의 역성을 들었다.

“심지어 환상 게이트는 클리어에 실패해도 안전하게 밖으로 나갈 수 있다면서요? 그러면 굳이 이렇게 싸고 돌 필요는 없는 거 아닌가.”

“내 말이.”

“하지만 다치면 위험해지는 건 똑같습니다.”

“원래 좀 다치면서 배워야 하는 거예요.”

답지 않게 이승우가 약간 볼멘소리를 했다. 표정은 부드러운 편에 가까웠고 조금도 불평하는 티가 나지 않는데, 목소리만 들으면 입술을 삐죽이고 있는 것 같아 약간 웃음이 난다.

“그래도 안 됩니다. 아이템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려 주려고 했어요.”

이승우가 고은교의 얼굴을 힐끗 확인한다. 자신의 가이드는 게이트에 들어오고 나면 아무래도 감정에 틈이 생기는 것 같다. 그는 하얀 얼굴이 어둠 속에서 엷게 웃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옆에 서 있는 우시현도 묵묵히 그 얼굴을 보고 있었다.

이승우는 그 사실이 조금 짜증 난다고 생각했다. 고은교의 가이딩을 공유하는 것도 싫지만, 게이트 안에서 자주 미소 짓는 고은교를 남들에게 보이는 건 더욱 싫었다.

그렇지만 그런 티를 낼 수는 없으니……. 그는 태연한 얼굴로 질문을 던진다.

“아……. 센터에서 받은 그 아이템요?”

“네.”

이승우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우시현이 그사이를 끼어들었다.

“무슨 아이템?”

“우시현 에스퍼도 아이템 사용은 처음입니까?”

아이템은 상당히 귀한 편이다. 따라서 웬만한 게이트가 아니고서는 센터 내에, 혹은 각 기업의 가장 안전한 금고에 보관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응.”

우시현이 고은교를 빤히 본다. 때마침 그의 왼쪽 뺨에 반딧불이가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그냥 그랬을 뿐인데, 그 순간 우시현은 인간 세상의 사람이 아닌 것처럼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이렇게 보면…… 왜 진짜 ’고은교‘가 그렇게까지 우시현에게 매달렸는지 알 것 같기도 하고.’

몇 번째일지 모르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고은교가 품속에서 투명한 비닐에 싸인 은색 팔찌를 꺼냈다. 정말 아무런 보석도 달려 있지 않고, 어떤 무늬도 없는 실팔찌였다.

“그럼, 이제 1구역이 끝난 것 같으니 한번 사용해 보도록 합시다.”

과연, 그 말대로 드넓었던 풀밭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거대하게 입을 벌리고 있는 동굴이 그들을 맞이했다.

후미에서 고은교가 하나둘 학생들의 숫자를 셌다. 기민한 눈초리로 고은교를 따라 학생의 수를 세던 우시현이 움찔 놀란다.

그도 그럴게, 학생의 수가 하나 늘어 있었다.

“왜 그러세요, 교수님?”

학생 중 하나가 불안한 표정으로 묻는다. 고은교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 여러분. 주목해 주세요.”

이미 학생들은 그를 주목하고 있었다. 게이트에 들어오자마자 난데없이 환상적인 풍경이 펼쳐져 감탄하던 고은교가 그들을 멈춰 세우자 저마다 조금씩 긴장한 표정이었다.

“한 사람씩 나오세요.”

고은교의 지시에, 학생들이 한 줄로 늘어졌다.

그는 침착하게 학생들 하나하나에게 팔찌를 채웠다, 풀었다를 반복했다. 학생들은 저마다 어리둥절한 기색이었다.

“이거 왜 이러는…… 거예요?”

조금 의심스럽다는 듯, 당혹스럽다는 듯 학생 중 하나가 물었다.

“곧 알게 될 겁니다.”

경험은 그 어떤 스승보다 확실한 가르침을 준다. 그렇게 물은 학생에게 팔찌를 채우자, 고은교에게 왜 이런 행위를 하느냐고 물었던 학생의 머리카락이 흔들린다. 마치 지직거리는 홀로그램 같다.

“어?”

근처에 있는 학생들이 그를 바라본다. 이윽고, 그건 학생의 형태를 더 이상 유지하지 못하고 스르륵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학생들의 발치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더니, 어둠 속으로 녹아든다.

“잘 보세요.”

후레쉬로 그곳을 비추자, 그것은 점점 작아지다 못해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마치 더는 빛을 견디지 못하겠다는 양.

“이건 도플갱어입니다. 사람을 따라 하려는 습성이 있지요. 다만, 이렇게 완벽하게 모습을 바꾸는 도플갱어는 드물어요. 이 정도로 강력한 도플갱어는 모습을 변화하는 동시에 주변 사람들의 인지를 흩어놓기 때문에, 평범한 방법으로는 도플갱어가 우리 중에 숨어들어왔는지 알 수 없습니다.”

고은교는 천천히 동굴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상급 에스퍼들이 재빨리 뒤를 따라온다.

“이 팔찌는 ‘본질을 보여 주는’ 팔찌입니다. 팔에 차면, 그 생물의 본질을 보여 주죠.”

본질을 꿰뚫는 아이템을 가지고 있으면 이런 종류의 게이트를 파훼하는 법은 매우 쉽습니다, 라고 고은교가 덧붙여 설명했다.

“다음은 환상 게이트의 제2구역입니다. 알고 계시겠지만, 게이트는 각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고 게이트의 환경은 그때마다 달라질 수 있습니다.”

고은교의 설명을 들으며 이능력자 열다섯 명은 동굴 안으로 진입했다. 터벅, 터벅 하는 소리와 함께 고은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교수님, 질문 있습니다!”

학생 중 하나가 손가락으로 동굴의 한쪽 면을 가리켰다.

“저 위에 쓰인 글자는 무슨 뜻인가요?”

“흠……?”

학생의 말대로였다. 벽에는 한자로 보이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所願……?’ 한눈에 알아보기에는 지나치게 복잡해 보이는 한자였다. 고은교는 조금 당황스러운 눈으로 그 글자를 내려다보았다.

‘시뮬레이션 돌 때도 이런 게 있었나?’

그는 침착하게 학생을 돌아보며 대답해 주었다.

“가끔 이렇게, 시뮬레이션 기기의 오차로 게이트가 조금씩 달라지기도 합니다.”

그는 별다른 설명 없이 발길을 돌렸다. 뭔가 새로운 몬스터가 생긴 것도 아니고, 별것 아니겠지 싶어서였다.

“반물질 게이트가 안전하다고 해서 만만하게 봤는데, 몬스터가 꽤 까다롭네요.”

뺨에 묻은 푸른색 체액을 가볍게 손등으로 훔치며 이승우가 중얼거렸다. 그들은 지금 막 아홉 번째 구역을 통과하고 있었다.

“수고했어요.”

“그런 말씀은 게이트 끝나고 해 주세요.”

“우욱.”

곁에서 이승우가 살랑대는 목소리를 듣던 우시현이 고개를 돌리고 토하는 시늉을 했다.

“교수님, 남은 덩굴 식물도 전부 제거했어요!”

학생 세 명과 함께 베이고 바스라지고 산산조각 난 덩굴 식물의 뿌리를 제거하고 돌아온 남선재가 밝은 목소리로 보고했다.

“잘했습니다.”

“헤헤.”

2구역부터 조금씩 나오던 몬스터들은 9구역에 이르자 일관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완전히 새로운 타입들이 그들을 반겼다. 덕분에 상급 에스퍼들이 능력 발휘를 할 수 있었다.

칭찬을 들은 남선재가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게이트 초반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그는 다른 에스퍼들보다 훨씬 더 몬스터를 잡는 데 열심이었다.

어쨌거나 그 귀하다는 상급 에스퍼들이 넷이나 들어왔다. 자연히 마음이 여유로워졌다. 애초에 일정을 빡빡하게 잡지 않은데다, A-급 게이트치고는 규모가 상당히 작다 보니 각 구역의 정리가 금방금방 끝났다.

“이곳이 터닝 포인트입니다. 텐트를 먼저 치고, 배낭을 깔면 됩니다. 텐트가 없다면 배낭만 깔고 자도 좋아요. 터닝 포인트에는 몬스터가 없지만, 혹시라도 불빛에 이끌려 몬스터가 나타날 수도 있으니 두 명씩 조를 나눠서 불침번을 서야 합니다. 게이트 안에서는 아무리 조심해도 모자라지 않으니까요.”

“넵!”

학생들이 활기차게 대답했다.

고은교는 그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텐트를 치는 것을 봐주기도 하고, 배낭을 열다 지퍼를 부러뜨린 학생을 도와주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모두가 취침 모드에 들어갔다.

“내일 기상은 여덟 시입니다.”

보스 몬스터가 뭐가 나올지 모르니 충분히 휴식을 취해 두어야 했다. 게이트 안에서 야영을 하는 것이 꽤 설레는지 학생들은 곧바로 잠들지 않았지만, 고은교가 엄중히 주의를 주자 곧 입을 다물고 수마에 빠져들었다.

‘피곤할 만하지.’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어디에서인가 익숙한 것 같은, 물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눈을 감았는데…….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누군가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교대하자는데?”

익숙한 목소리다.

고은교 역시 불침번에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사실, 예외가 되려면 얼마든지 될 수 있었지만 교수이다 보니 일부러 모범을 보이려고 했다.

눈을 뜨자 차영헌이 자신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

“두 시입니까?”

“그래.”

차영헌을 깨운 학생 둘은 자러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마 금세 잠에 들었을 것이다. 고은교는 고개를 끄덕이며 따뜻하게 데워진 침낭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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