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그들은 침묵한 채 나란히 앉아 있었다. 옆에서 차영헌이 의미 없이 후레쉬를 약하게 만들었다가, 세게 만들었다가 하는 장난을 쳤다. 딸깍이는 소리가 일정한 속도로 들린다.
그것을 바라보던 고은교가 한마디 했다.
“건전지 낭비하지 마세요.”
그가 알기로는 차영헌에게 저런 식으로 손장난을 하는 버릇은 없었다. 불안한 게 있는 건지, 아니면 지나치게 따분해서 시간을 죽이는 용도인 건지 모르겠다. 저도 모르게 차영헌의 상태를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자, 알겠다는 대답도 없이 눈동자만 굴려 자신을 보는 검은 눈과 마주친다.
깨끗하게 닦아 놓은 것 같은 반들반들한 눈동자였다. 침묵하던 차영헌이 갑작스럽게 입을 열었다.
“좀 이상하지 않아?”
“뭐가 말입니까?”
“도플갱어 말이야.”
그가 고은교의 아래위를 쓱 훑어본다.
“그렇게 완벽한 도플갱어는 흔치 않잖아. 그런데 분명, 시뮬레이션 돌릴 때는 눈코입도 똑바로 흉내 못 낸 도플갱어들밖에 없었거든.”
“……그랬죠.”
동의하듯 고은교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플갱어만 그런 건 아닌 것 같아. 시뮬레이션 돌릴 때까지만 해도, 이게 정말 A-급 게이트가 맞나 싶었는데 말이지…….”
그가 천천히 제 손에서 손전등을 굴린다.
“마치 여기 들어온 이능력자의 수에 맞춰지는 것처럼 강력해졌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그냥 알 수 없는 이유로 강력해졌다고 해야 할까.”
“……무슨 의미입니까? 제대로 설명해 보세요.”
차영헌은 기감이 예리하다. 여기 모인 그 어떤 에스퍼들보다 경험이 풍부하기도 했다. 그의 경고를 제대로 들어 둘 필요가 있다는 뜻이었다.
환상 게이트의 보스 몬스터는 계속해서 모습을 바꾼다고 했다. 그에 대한 단서를 차영헌이 감지한 걸까? 막 차영헌의 말에 집중했을 때였다.
“봐, 1구역에서 도플갱어가 하나만 나온 이유도……. 잠깐.”
가늘어진 동공이 터닝 포인트의 입구 쪽을 향한다. 고은교도 얼른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후레쉬도 비춰 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뭐 하나 놓쳤나 본데.”
아주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말을 마친 차영헌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혼자 처리하고 올 테니, 여기 있어.”
“차영헌 에스퍼.”
괜히 불침번을 두 명이서 서는 게 아니었다. 아무리 상급 에스퍼여도, 게이트 안에서 혼자 움직이는 건 위험했다.
게다가 몬스터가 정말 하나만 있을지는 모르는 일 아닌가.
“잠깐만요.”
그를 붙잡았지만, 차영헌은 고은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듯 행동했다. 반쯤 몸을 일으켜 차영헌을 잡으려던 고은교는 차영헌이 순식간에 사라진 것을 보고 이승우를 깨우기 위해 눈을 돌렸다.
이승우는 이미 일어나 앉은 상태였다.
언제부터 깨어 있었던 거지?
그렇게 소란스럽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어쨌든 바로 이승우가 일어나 주어 다행이었다.
“승우 군. 현재 몬스터가 접근 중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불침번을 설 사람을 두 명 더 깨우고 우리도 지원 갑시다.”
“네.”
이승우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졸음기 따위는 하나도 없었다. 정말 자기는 한 건지 의심이 됐지만, 어쨌거나 우시현과 남선재를 깨우기 위해 고은교가 움직이는 것을 도와주었다.
“선재는 제가 깨울게요.”
비교적 멀리 떨어진 남선재에게 이승우가 다가간 순간, 우시현이 몸을 일으키는 게 보였다.
“우시현 에스퍼도 안 잤습니까?”
“시끄러워서 잠이 와야지.”
우시현이 약간 잠긴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걸음을 옮기던 이승우의 시선이 흘끗 닿는다.
“그 재수 없는 녀석 혼자서는 안 될 거 같냐?”
“우시현 에스퍼, 게이트 안에서는 최소한 2명 이상 조를 이루어 움직여야 합니다.”
“아니면 나 혼자 갔다 와도 좋고.”
영 고은교를 데리고 가고 싶지 않다는 투였다.
평소라면 반드시 함께 갔겠지만, 경험이 많고 판단력이 좋은 차영헌도 있으니 자신은 여기에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하기는 했다.
‘……그래도 될까?’
하지만, 그러기에는 아무래도 차영헌이 떠나기 전에 한 말이 마음에 걸렸다. 마치 상급 에스퍼들이 들어오자 몬스터가 거기에 맞추어 강해진 것 같았다던.
그런 것 치고는 게이트 공략이 몹시 여유로웠지만 머릿속 한편으로는 차영헌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있었다.
이 환상 게이트는 어딘가 이상했다. 제1구역에서는 오직 하나의 도플갱어만 나왔는데, 시뮬레이션에는 없던 높은 수준의 도플갱어가 나왔다. 시뮬레이션에서는 거의 쏟아지듯 나왔던 녀석들이었고, 몇몇 녀석들은 인간과 똑같은 형태를 만드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애초에 도플갱어는 초반의 물량 공세를 시작으로 사람들을 당황시킨 다음, 혼란을 틈타 사람들 몇 명을 자신들의 은신처로 납치하고 그 자리에 제 동료를 데려다 두어 감쪽같이 정체를 숨긴다.
그럴 경우에는 인원의 수도 알맞고, 입만 다물고 있으면 의심받을 확률이 거의 없기 때문에 게이트를 클리어하고 나서야 이상이 생겼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경우가 보통이다. 도플갱어는 탈출 포털을 이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동료를 구하기 위해 다시 도플갱어의 은신처를 찾아 이동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그런데 제1구역에서는 단 하나의 도플갱어만 있었다. 그것도, 상급 에스퍼의 인지를 흐려 놓을 정도로 강력한 도플갱어가.
그는 머릿속으로 빠르게 제2구역, 제3구역, …의 공략을 되감아 보았다. 확실히, 이상하리만치 두드러지는 녀석들이 꼭 하나씩 끼어 있었다. 그런데 제9구역의 식물형 몬스터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다.
판단을 마친 고은교는 학생 둘을 깨웠다.
“왜 그래?”
우시현이 어리둥절해했다. 눈을 비비며 일어난 학생 둘에게 고은교는 거침없이 지시를 내렸다.
“불침번을 서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즉시 자는 인원을 다 깨워서 경계를 서세요. 아마 몬스터는 더 없을 테지만, 혹시 모르니까요.”
“네……? 네, 교수님.”
학생들이 잠에서 덜 깬 얼굴로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 생겼나 싶은 얼굴들이었다.
“우시현 에스퍼, 남선재 에스퍼, 이승우 에스퍼는 저와…….”
하지만 막상 상급 에스퍼들을 데리고 떠나자니, 학생들만 남겨 놓아도 될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학생들 전원이 이능력자로 이루어져 있지만 하나같이 이번 게이트가 처음인 초짜들뿐이었으므로.
입구는 막혀 있고, 보스 몬스터는 반드시 영역형 몬스터다. 그러니 자신의 영역을 떠나지 않을 테지만, 그래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이승우 에스퍼가 학생들과 함께 남으세요.”
“……교수님?”
“기동성이 가장 좋으니, 부탁하겠습니다. 너무 늦어지는 것 같으면 와 주세요. 아마 금방 끝내고 돌아올 겁니다.”
*
결국, 이승우는 고은교의 지시를 따랐다. 현재 고은교는 남선재와 우시현을 데리고 차영헌이 사라진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뭐가 좀 보입니까?”
차영헌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어두운 곳에서 일반인의 시력은 별로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에스퍼의 시력에 의존하는 게 훨씬 나았다.
옆에서 걷던 우시현이 바로 대답했다.
“아무것도 없어.”
“…….”
분명 차영헌은 뭔가를 본 것 같았는데.
‘……식물형 몬스터가 아니었나.’
“그래도 가까이에 계실 줄 알았는데, 전투를 한 흔적도 없고……. 생각보다 더 멀리 나가 봐야 할 것 같은데요.”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던 남선재가 말했다.
“가 봅시다.”
차영헌을 찾아서, 남은 몬스터를 제거한 다음 돌아올 생각이었다.
세 사람은 분명 가까운 곳에서 함께 움직였다. 팔과 다리가 부딪힐 정도의 거리였다. 뜻하지 않았지만 고은교는 우시현과 남선재의 사이에 끼어 있었고, 우시현과 남선재는 고은교에게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뭔가가 입을 턱, 가로막는 느낌이었다.
눈을 크게 뜬 순간 고은교는 자신의 몸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다. 말 그대로 녹아들 듯 끌려갔다. 당황하여 앞을 쳐다본 순간, 그는 자신과 똑같은 외형을 한 도플갱어가 고은교가 걷는 걸음 그대로 걸어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제1구역에서 상급 에스퍼를 눈속임할 수 있었던 것은 환상 게이트의 도플갱어에게 이런 말도 안 되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시현은 워낙 동물적인 감각을 갖고 있는 녀석이라 그런지, 고은교가 바꿔치기 당하자마자 즉시 고개를 돌려 고은교-도플갱어를 빤히 바라본다.
‘우시현……!’
고은교가 어둠 속에서 팔을 뻗었지만, 이미 그는 한참 뒤쪽으로 끌려가는 중이었다. 입술이 딱 붙은 것처럼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 고은교-도플갱어는 대담하게도 우시현의 시선을 그대로 맞받아서 시선을 마주쳤다.
“우시현 에스퍼. 뭔가 발견했습니까?”
“……아니.”
우시현이 시선을 내린다. 고은교-도플갱어가 우시현의 손을 살짝 붙들고 있었다.
‘손을…… 잡아?’
그 순간은 너무나 황당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우시현이 손을 빼지 않자, 놀랍게도 기분이 더러워졌다. 하지만 우시현의 고분고분한 태도에 고은교-도플갱어는 안심했는지 빙그레 웃기까지 했다.
우시현이 잡힌 손과 고은교의 얼굴을 번갈아 본다.
“그럼 다음 구역으로 넘어가 보죠.”
심지어 말투까지 몹시 흡사했다…….
‘도대체 어떻게 한 거지?’
도플갱어는 외형과 이능만 복사가 가능했다. 기억과 말투, 성격 등은 복사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람이 아닌 몬스터였으니까 사람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웃을 수 있는 거지.
제1구역에서 봤던 도플갱어도 그럴 수 있었나? 외형의 완벽도가 굉장히 높아서 학생들을 주목시킨 다음, 바로 아이템을 사용해서 공략하여 미처 몰랐는데…….
그는 발버둥 치는 것도 잊고, 자신과 거울처럼 똑같은 고은교-도플갱어가 가이딩으로 우시현을 안심(가이딩이 불쾌한 것마저 똑같았는지 우시현의 눈썹이 살짝 지푸려졌다)시키고 그와 함께 움직이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