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우시현과 남선재, 그리고 또 다른 고은교가 멀어져 간다.
차영헌의 경고가 옳았다.
도플갱어는 군집 생활을 한다. 그러나 보통의 도플갱어와 달리, 이 도플갱어에게는 지능이 있을 확률이 매우 높았다. 믿기지는 않지만, 제1구역에서 아이템을 쓰는 것을 보고 몸을 숨기고 있다가 터닝 포인트에서 나온 그들에게 접근하여 고은교를 바꿔치기한 것 같았다. 그렇게밖에는 설명이 안 된다.
차영헌은 어디로 간 걸까? 그 역시 어둠 속에서 도플갱어의 흔적을 발견한 것이었을까…….
‘그래도 도플갱어는 포털 밖으로 나갈 수 없으니까.’
결국에는 정체가 밝혀지게 될 텐데.
한없이 어둠 속으로, 어디론가로 끌려가던 고은교를 그림자가 울컥 뱉어냈다. 동시에, 덩굴 식물을 닮은 무엇인가가 고은교의 다리를 꽁꽁 묶더니 그를 천장 높은 곳으로 들어 올렸다.
마치 먹이를 고정해 두듯 고은교의 몸을 고정해 둔 그것은 분명 유연하고 강력했지만, 지금은 식물일 뿐이라는 듯 단단하게 굳어져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적어도 식물형 몬스터가 남아 있었던 건 맞았군.
‘……그게 도플갱어가 키우는 몬스터인지는 몰랐지만.’
거꾸로 매달린 채로, 고은교는 천천히 눈을 굴려 사방을 살펴보았다. 그가 잡혀 온 곳은 도플갱어의 은신처로, 마치 어딘가의 실내로 들어온 것처럼 적당히 넓고 각이 져 있었다. 둥근 공동 안에서 고은교는 탈출하기 위해 조금 몸을 흔들어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힘을 써도 추처럼 흔들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혼자의 힘으로는 결코 도플갱어의 은신처에서 벗어날 수 없을 듯했다.
고민 끝에 그는 손톱을 세워 자신의 하반신을 칭칭 감은 덩굴 식물을 뜯어내 보았다. 이대로 덩굴이 자신을 풀어 준다면 머리부터 떨어져서 크게 다칠 것 같았지만, 언제 잡아먹힐지 모르는데 가만히 매달려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덩굴의 표피는 워낙 단단하여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겨우 식물 껍질을 조금 까는 데 그쳤다.
“아!”
오히려 도망치려고 바르작대는 고은교가 귀찮았는지, 아니면 간지러워서 그랬던 건지 사방에서 덩굴 두 줄기가 날아와 그의 양 손목을 잡아챘다.
그런데……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거센 힘으로 손을 봉쇄한 덩굴 식물 줄기가 슬그머니 고은교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영문인지 몰라 덩굴 식물에서 벗어나려던 그는 모든 움직임을 딱 멈췄다. 그러자 마치 쓰다듬듯이 그의 손가락을 타고, 손목 안쪽으로 기어들어 가던 덩굴 역시 움직임을 멈췄다.
‘……이게 뭐야?’
그는 몹시 당황스러워하면서도 설마, 설마 하는 생각에 손에 힘을 줘 봤다. 그러자 마치 그의 힘을 받듯 덩굴 식물 역시 몸을 움직였다.
어디에서인가 다시 날아온 덩굴이 그의 얼굴 위를 반쯤 덮고, 입술 안으로 가지를 뻗었다. 덩굴 식물과 키스하지 않기 위해 고은교는 얼른 입술에 힘을 주었다. 덩굴은 아쉽게 입술 근처를 더듬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고은교를 신경 쓰이게 하는 것은 얼굴을 덮은 덩굴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덩굴 역시 팔꿈치 안쪽, 겨드랑이까지 기어들어 오려고 옷 속을 파고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변태 식물을 다 봤나.
식물이어서 동물의 체액을 필요로 하는 걸까? 우선 그는 온몸에 힘을 풀었다. 고은교의 몸이 느슨해지자, 그의 허리춤과 어깨선을 더듬던 덩굴 식물 역시 얌전해졌다.
식은땀이 났다. 왜 도플갱어의 은신처에 잡혀 들어갔던 녀석들이 얌전히 구출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때였다.
입구로 보이는 어둠이 올록볼록해지더니, 뭔가를 왈칵 뱉어냈다. 처음에는 새로운 희생자가 생겼구나 싶었다. 그런데 이번에 납치당한 것은…….
“호오.”
차영헌. 차영헌이었다.
‘상급 에스퍼가 어쩌다 잡혀 온 거야?’
그가 몹시 반가웠음에도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크게 놀란 얼굴로 차영헌을 빤히 바라보던 고은교는, 자신에게 그랬듯 차영헌을 칭칭 감기 위해 쏜살같이 다가가는 덩굴 식물들이 죄다 잘려 파괴되는 것을 보고 안심했다.
‘능력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건 아니구나.’
그랬으면 큰일이 날 뻔했다. 고민 끝에, 고은교는 ‘읍, 읍!’하는 소리를 내서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차영헌은 고은교가 있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눈치였다.
“기다려 봐.”
만약 말을 할 수 있었다면 차영헌에게 덩굴 식물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을 텐데. 하지만 확실히, 차영헌은 막무가내로 가이드를 구하러 달려드는 어리숙한 에스퍼가 아니었다. 그는 노련하게도 도플갱어의 은신처를 먼저 파괴하고, 고은교를 구해내려는 생각인 듯했다.
고은교의 반항을 막아내기 위해 뻗어졌던 덩굴은 어린애 장난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는 차영헌을 공격하기 위해 그에게로 빠르게 쇄도하는 수백 개의 덩굴을 보고 이 덩굴 식물이 ‘식물형 몬스터 중에서 가장’ 강한 몬스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차영헌을 단신으로 상대하기에는 한없이 부족했지만.
후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덩굴 가지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잘려 나간 덩굴은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차영헌이 단 한 번 손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사방에서 번뜩이는 칼날이 덩굴 식물을 난도질했다.
자신에게로 미친 듯이 뻗어져 오는 덩굴을 잘라내며, 차영헌은 덩굴의 뿌리를 찾아 움직였다. 이대로라면 끝없이 덩굴 식물이 차영헌의 목을 조르기 위해 계속해서 공격을 퍼부을 테니, 그 전에 덩굴에게 영양분을 공급해 주는 근원을 제거해야 했다.
식물의 근원이란 뿌리다. 당연하지만, 식물의 뿌리는 움직이지 못한다. 도플갱어의 은신처는 그다지 넓지 않았으므로, 차영헌은 몇 번 방을 돌아본 끝에 덩굴 식물의 뿌리를 찾아냈다.
몇 번 콱, 콱하는 소리와 함께 덩굴의 뿌리가 송두리째 뽑혀나간다. 고은교는 그가 뿌리까지 제거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뿌리는 매우 얼기설기 늘어져 있었고 몹시 몸통이 넓적하고 커 한 아름이나 되었다. 이 거대한 덩굴 식물의 뿌리를, 차영헌은 별로 힘들이지 않고 쭉 뽑아냈다. 그리고 그대로 뿌리 위, 식물의 밑동을 잘라냈다. 그러자 죽어라 공격하던 덩굴들이 일시에 축 늘어졌다.
불이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어쨌거나 이대로라면 덩굴 뿌리는 그대로 말라 죽을 것이고 이 몬스터는 사라질 것이다.
웅, 하는 소리와 함께 탈출 포털이 열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때, 차영헌이 고은교를 돌아보았다.
품에 안고 있던 거대한 식물 뿌리를 툭 내던진 차영헌이 고은교에게로 다가왔다.
“그러게 나오지 말고 거기 있으라고 했지.”
“…….”
귀찮은 듯 대충 손을 휘적거리자, 그의 입을 틀어막고 있던 덩굴이 떨어져 나간다. 그의 팔을 잡고 있던 덩굴 역시 후두둑 떨어졌다.
“……차영헌 에스퍼는 어쩌다 잡혀 온 겁니까.”
그 말에 차영헌이 인상을 썼다.
“잡혀 오긴 뭘 잡혀 와. 도플갱어 은신처는 도플갱어만 알고 있으니까 그냥 잡혀 준 거지. 그게 보스 방인 줄은 몰랐지만, 이 정도면 잘된 거 아닌가.”
“……이곳이 보스 방입니까?”
“그래. 참고로 고은교 가이드 행세를 하던 녀석은 찢겨 죽었어. 그쪽이 키우는 녀석들이 꽤 사납더라고.”
마지막으로 봤을 때, 고은교-도플갱어가 워낙 자신의 행세를 잘하길래 절대 들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아이템도 없었을 텐데……?’
그가 놀랐다는 듯 눈을 크게 뜨자, 차영헌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가 고은교를 풀어 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
우악스러운 손길이 딱딱하게 굳어진 덩굴을 떼어 낸다. 툭, 투둑 하는 소리와 함께 덩굴들이 하나씩 풀려나갔다. 그 과정에서 고은교의 몸이 흔들렸는데, 순간 품에서 뭔가가 툭 떨어졌다.
차영헌은 놀라운 반사 신경으로 떨어지는 팔찌를 받아냈다. 고은교를 풀어 주던 손이 움직임을 뚝 멈췄다.
“왜 그래요?”
반쯤 풀려가는 덩굴 사이에서 구출되기를 기다리던 고은교는 이상함을 느꼈다.
“너 말이야.”
팔찌를 만지작거리던 차영헌이 고은교를 빤히 들여다본다.
“예전부터 말하는 거나, 행동하는 게 자꾸 누구를 따라 하는 것 같은데……. 혹시 일부러 그러는 거야?”
무슨 생각을 했는지 차영헌의 얼굴이 약간 굳어져 있었다.
“하도 이상해서 내가 좀 알아봤거든. 그런데…… 전산상으로도 그렇고, 내 기억상으로도 고은교 가이드랑 그분이 마주친 적은 없단 말이지.”
“……그게 무슨 말입니까.”
“고은교 가이드는 현장 가이드가 아니었지. 그런 주제에 상급 에스퍼들을 수집하는 게 취미인 쓰레기인가 싶었는데……. 그런 거면 나를 못 알아볼 리가 없잖아. 폭주해서 정신이 오락가락했을 때 냉큼 나를 잡았겠지.”
“…….”
“고은교 가이드가 자꾸 이상하게 구니까…… 나도 자꾸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되잖아.”
고은교를 빤히 바라보던 시선이 잘못한 것처럼 아래를 향한다. 그럼에도 차영헌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가까이에 있어서 고은교는 그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나도 내가 미친 것 같기는 해. 죽은 사람이 살아 있기를 바란다니.”
“…….”
심장이 묘한 박자로 쿵쿵 뛴다.
‘설마 했는데, 정말로 나를 못 잊은 건가.’
죽은 사람이 살아 있기를 바란다는 건…… 어떻게 봐도 차영헌이 아직 장이주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입 안의 살을 살짝 물었다 떼며 고은교가 단호하게 말했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빨리 풀어 주세요. 늦기 전에 팀원들을 불러야 합니다. 탈출 포털이 열렸으니 30분 내로 나가야 해요.”
“알아.”
그러나 차영헌은 이미 결심이 선 얼굴이었다.
“확인만 해 보고…… 풀어 줄게.”
달각, 하는 소리와 함께 팔찌가 채워진다. 고은교는 거꾸로 매달린 채 멍하니 차영헌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의 오른쪽 팔목을 쥐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실팔찌가 희미하게 반짝거린다.
어떤 것의 본질을 보여 줄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본질을 가리는 것을 모두 없애고 본질만 남기는 것이었다.
“……하하.”
그렇다면 사람의 본질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