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콜 가이드-115화 (114/132)

#115

그는 차영헌이 한 걸음 떨어져서 자신을 바라보다, 끝내 어깨를 떨며 웃는 것을 착잡한 심정으로 지켜보았다.

“국장이 애지중지하던 아이템이라서 그런가, 효과 한번 확실하네…….”

“…….”

입을 다문 채 말이 없자, 차영헌이 그의 뺨을 붙잡고 눈을 맞추게 했다.

“그렇죠? 장 팀장님.”

천천히 눈을 깜빡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다음 순간 발목 부근에서 우득, 우득하는 소리가 나더니 덩굴이 완전히 힘을 잃고 축 늘어졌다. 동시에, 반대로 뒤집혀 있던 몸이 그대로 떨어진다.

물론 차영헌은 그가 바닥을 구르도록 두지 않았다. 그는 마치 정해진 것처럼 사뿐히 차영헌의 품 안으로 안착했다.

분명 자신의 가이드가 되어 달라, 다른 놈은 죽이겠다 협박할 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장이주라는 걸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는데.

머리에 피가 쏠려 있었던 탓인지 몹시 현기증이 났다. 이마를 짚으며 눈을 꾹 감았다 뜨자,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차영헌의 얼굴이 보인다.

“도대체, 아.”

언제부터 알게 되었냐고 물으려 했는데 너무나 생소한 목소리가 입 밖으로 흘러나갔다.

한순간에 바뀐 목소리가.

글쎄, 하지만 그걸 ‘바뀌었다’라고 할 수 있을까? 그는 천천히 손을 올려 자신의 성대를 만졌다. 차영헌은 그를 받아낸 자세 그대로 서 있는 중이었다.

내려 줄 만도 하건만, 오금과 등 아래를 받치고 있는 손은 여전히 그를 끌어안고 있었다. 끌어안고 있는 힘이 얼마나 강했는지, 곱게 안긴 자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몸이 찌그러질 것 같았다.

“……우선 내려놓고 대화합시다.”

그의 약간 딱딱한 듯한 말투는, 딱딱한 목소리와 완벽한 조화로 어우러졌다. 그야 그럴 것이, 본래 자신의 목소리였으니까.

“차영헌 에스퍼.”

그러나 차영헌이 말을 듣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침착하게 굴면 굴수록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어깨를 쥔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린다. 뼈가 죄어지는 듯했지만, 아프다는 느낌조차 들지 않았다. 차영헌은 이미 고통스러워서 죽을 것 같은 얼굴이었으므로.

제 가이드 몸을 그 어느 누구보다 소중히 여기던 녀석이 이런 상태가 되다니…….

차영헌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그는 아픈 기색 없이 침착하게 말했다.

“영헌아.”

“…….”

“내려놔.”

그러나 이번에도 차영헌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떨림도 여전했다. 다만, 아까와는 달리 상당한 반응이 왔다. 혼란스러운 듯 머리를 약간 흔들더니, 이를 악물며 고개를 숙인다. 숙여서 그를 바라본다. 영혼까지 꿰뚫을 것처럼 깊은 눈동자로.

“네, 팀장님. 접니다. 차영헌이요.”

부릅뜬 눈이 그를 응시하고 있다.

“저 기억하십니까.”

어쩔 수 없이 한숨이 흘러나온다. 이미 그런 모습을 보였는데, 어떻게 이제 와서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물론이지.”

“그래서 가이딩을 해 주셨던 겁니까? 우연히 마주친 폭주 에스퍼가 저여서요?”

“그래.”

그의 대답을 들은 차영헌은 돌처럼 굳은 채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여전하십니다. 팀장님은.”

그 말에는 뭐라고 대답을 해 주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쨌거나 차영헌은 그를 단단히 껴안은 채로, 절대로 놓고 싶지 않아 했다. 대화를 나눌수록 끝이 엷게 떨리는 목소리가 차영헌의 뒤흔들린 마음을 보여 주는 것 같았다.

그제야 그는 차영헌이 홀로 남겨졌던 것을 몸서리치게 싫어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무리 차영헌이 예민한 녀석이고, 고은교를 의심하게 되었다 한들 고은교에게 아이템을 사용하기까지 한 것은 분명 비정상적이었다.

보통 사람은 죽은 사람이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그만큼 장이주의 죽음이 차영헌에게 깊은 상처를 냈다는 의미이고, 사소한 단서에도 불구하고 장이주의 죽음을 단번에 부정할 만큼 차영헌의 정신이 연약해져 있다는 뜻이 된다.

그러면서도 고은교가 진짜 장이주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진짜 장이주가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생전의 모습 그대로, 차영헌의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는…….

그래서였다. 센터에서 차영헌을 예의주시했던 것은.

그래, 그래서였어…….

그는 자신이 실수했다고 생각했다. 차영헌에게 헛된 희망을 불어넣어서는 안 됐는데.

하지만…….

부들부들 떨리는 머리가 가만히 닿아 온다. 마치 이것이 꿈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는지, 질끈 감긴 눈과 하얗게 질린 얼굴이 눈 안 가득 새겨지는 것 같았다.

이렇게 선명한 마음을 장이주였을 때는 왜 몰랐을까.

그는 차영헌이 자신의 어깨에 이마를 댄 채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동안 한 번도 숨을 쉬지 못했던 사람처럼 절박한 호흡이었다.

차영헌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목으로, 뺨으로 느껴진다. 그럴수록 점점 더 안타까워지기만 했다.

장이주는 죽었다. 그의 본질은 여전히 장이주였지만, 몸은 고은교의 것이었으니 차영헌이 원하는 사람은 죽고 없는 것이다.

하지만 차영헌은 대화를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이렇게 자신을 꽉 부둥켜안고 있는 것만 봐도 뻔했다.

“나는 죽은 사람인 걸 알고 있지 않습니까. 차영헌 에스퍼.”

“죽다니요? 지금 이렇게…… 살아 계시는데.”

푹 잠긴 목소리였다.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쉰 뒤, 자꾸만 물렁해지려는 마음을 바로잡았다.

“이제 보내드리지 않을 겁니다. 절대…….”

그는 손을 뻗어 아까 차영헌이 그랬듯 차영헌의 뺨을 억지로 움켜쥐고 들어 올렸다. 차영헌의 표정을 확인한 그가 소리 없이 움찔했다.

목덜미가 축축하지 않아서 울고 있지 않은 건 알았지만, 이런 얼굴일 줄은 몰랐다. 반들반들한 새카만 눈동자는 물론이고, 광기마저 엿보이는 얼굴이었다. 두 번 다시는 그를 놓치지 않겠다는 결의가 보인다고나 할까.

이대로는 안 된다.

그는 오른쪽 팔목에 걸려 있는 팔찌를 잡아당겨 벗었다.

“나는 죽었어요.”

“……하지만.”

본래의 몸으로 돌아오는 건 순식간이었다. 차영헌은 허를 찔린 듯한 얼굴로 ‘고은교’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손아귀에 움켜쥐었던 것이 마치 모래라도 되는 양.

“그래요, 어쩌다 이렇게 된지는 나도 잘 모릅니다.”

“…….”

“그냥 죽은 줄 알았는데 눈을 떠 보니 이 몸이었어요. 처음에는 금방 몸의 주인이 다시 돌아올 줄 알고 적당히 집에만 틀어박혀 있어야겠다 생각했는데, 여러 악재가 겹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몸의 주인……이라니,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무 말 없이 고은교의 변명을 듣던 중, 차영헌이 약간 화가 난 듯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이 몸은 이미 팀장님이 가지신 것 아닙니까? 원래 몸의 주인 따위, 그냥 사라지라고 하면 되잖습니까.”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들어보니 완전 개쓰레기 같은 가이드던데요. 팀장님이 잘 써 주면 오히려 그쪽에서 영광으로 알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

차영헌이…… 예전에 ‘너에 대해서 모르지만은 않다’라고 말했던 건 이런 의미였나 보다. 그때는 그 ‘고은교’를 자신의 가이드로 만들 생각이었기에 어느 정도 순화해서 말했지만, 실제로는 고은교를 ‘개쓰레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가실 겁니까?”

그렇게 말하는 차영헌의 목소리가 어찌나 절망스러웠는지, 고은교는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하아, 차영헌 에스퍼. 그건 내가 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럼요?”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언제라도 ‘고은교’가 돌아온다면, 나는 떠나야만 합니다.”

그는 일부러 아주 분명하게 말했다. 반박 따위는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엄중한 태도였다. 차영헌은 그렇게 말하는 ‘장이주’를 잘 알고 있었다. 이럴 때의 장이주는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다. 말려도, 설득해도, 결코 통하지 않는 불굴의 철벽이다.

바로 그때.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고은교를 껴안고 있던 차영헌이 황급히 뒤를 돌아본다. 모든 반응이 즉각적이었다. 자신의 가이드를 지키려는 본능이 발휘된 것이다.

고은교가 혀를 차며 차영헌을 달랬다.

“괜찮습니다, 차영헌 에스퍼. 아무 일 없을 겁니다. 탈출 포털은 이미 열리지 않았어요? 저 소리는 아마…….”

도플갱어의 은신처를 부수려는 건, 분명 자신의 에스퍼들일 것이다.

그런 느낌은, 그림자로 뒤덮인 어두운 보스 방이 쿵, 쿵 하는 소리가 커질수록 더더욱 강하게 들었다. 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단단하게 틀어 막힌 보스 방의 입구가 조금씩 부서지기 시작했는지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왔다.

차영헌도 그것을 깨달은 것 같았다.

“이번에는 고작 세 명밖에 없네요.”

“……아무래도 내 몸이 아니니까 고민하게 되더군요.”

아마 차영헌은 과거, 장이주의 에스퍼들을 떠올린 것 같았다. 당시에는 정말 수십 명의 에스퍼들이 장이주의 뒤를 따라다녔다……. 상급 에스퍼라 하더라도 세 명이라는 숫자는, 차영헌에게 ‘고작’이라고 느껴질 터였다.

고은교는 자신의 과거를 알게 된 차영헌에게 약간의 동질감을 느꼈다. 장이주를 기억해 주고, 그와 관련한 추억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었다.

‘그건 그렇고…….’

우선 다른 에스퍼들 눈에 띄기 전에, 이 민망한 자세부터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려놓으라고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하하.”

공허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예나 지금이나 팀장님을 다른 에스퍼들과 공유해야 하는 건…….”

차영헌이 그를 내려놓았다. 언제 그의 팔과 다리를 꽉 잡고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가벼운 움직임이었다.

“여전히 좆같습니다.”

그러나 공손한 말투와는 명백히 상반된 내용이다.

고은교는 당황한 얼굴로 차영헌을 바라보았다. 차영헌은 대부분 고은교에게 잘 대해 주었다.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았다는 의미다.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왔다는 사상 초유의 일을 겪어서일까? 차영헌은 자신의 감정을 아주 솔직하게 말했다. 고은교는 난감한 얼굴로 차영헌을 올려다보았다.

먼 곳에서 그를 부르는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차영헌을 좀 더 달래 주어야 하지 않을까? 찰나의 순간, 고은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보스 방의 입구에 가까이 다가가 자신이 여기 있다고 알리는 대신 차영헌에게 몸을 붙였다. 이건 순전히 ‘고은교’가 되고 난 이후로 보모라도 되듯 에스퍼들을 보살피던 것이 습관이 생겼기 때문이다.

“……차영헌 에스퍼.”

그리고 그의 팔을 붙잡았다. 과거에는 단 한 번도 없던 접촉이었다. 그건 아주 사소한 접촉이었지만, 건조했던 마음에 심지를 당기기에는 충분했다. 짧은 순간, 차영헌은 놀란 것 같았다.

고은교는 자신을 바라보는 두 눈동자에서 거세게 타오르는 욕망의 불길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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