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콜 가이드-116화 (115/132)

#116

*

그것은 아무런 전조도 없었다.

단 한 번 눈을 깜빡였을 뿐.

“……괜찮습니까?”

열려 있던 입에서 미처 하지 못했던 말이 흘러나간다. 관성처럼. 자신의 손이 차영헌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그는 아주 낯선 것을 보듯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자의로 누군가를 살피듯 붙들어 본 적이 있었던가.

가공할 저력을 지녔다고 평가되는 S급 에스퍼, 신입 에스퍼, 여러모로 다루기 어려운 녀석.

흔치 않은 세 가지 꼬리표를 가진 녀석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예.”

놀란 얼굴로, 차영헌은 뜻밖이라는 듯 대답했다.

……이 표정이 왜 묘하게 익숙한 것 같을까.

물론, 그는 S급 에스퍼 특유의 뚜렷한 자질을 보였다는 점에서 쓸모가 있었다. 이 쓸모란 것은 고작 게이트 모의 시뮬레이션을 몇 번 돌렸다고 해서 지쳐 나가떨어질 리가 없다는 뜻이다.

자신 역시 그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래요.”

그런데 왜 갑자기 차영헌이 괜찮은지 확인하고 싶었던 걸까.

기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원래 자신은 이런 말을 자주 하지 않았다. 신입 에스퍼라 하더라도 살갑게 괜찮냐고 물어보는 자상한 팀장과는 거리가 멀었다. 가이딩을 할 때가 아니고서야 불필요한 접촉을 삼가는 것은 물론이다.

괜히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다.

지금 뭘 하고 있었지? 아, 그래. 그들은 모의 게이트 시뮬레이션 이후 피드백까지 끝낸 상태였다. 힘 조절이 안 되는 것은 상급 에스퍼의 고질적인 문제라, 이번 주 안으로 이 부분을 확실히 고치라고 말해 두었다. 너무 많은 지적에 주위에서 함께 피드백을 듣던 에스퍼들이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슬그머니 자리를 떴지만, 차영헌만은 꿋꿋이 자리를 지킨 채 그의 조언을 듣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피드백 대부분은 차영헌을 위한 것이었다. 그의 팀은 모두 베테랑이었고, 신입 에스퍼를 제외하면 이번 게이트도 무난하게 클리어할 수 있을 듯했다. 기나긴 피드백을 듣는 에스퍼들은 대부분 침울해졌지만, 차영헌은 그런 기색도 없었기에 마음 편히 피드백을 마친 참이었다. 굳이 괜찮으냐고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그럴 일이 아니었고, 이 무심해 보이는 신입 에스퍼에게는 그럴 필요도 없어 보였으니까.

그런데 자신이 왜…….

머릿속이 굳는 것 같았다. 그래도 굳이 혼란스러운 티를 낼 필요는 없겠지.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매듭지었다.

“……남은 시뮬레이션도 잘해 봅시다.”

“예, 팀장님.”

묘하게 찜찜한 기분을 안고 몸을 돌렸다. 그는 차영헌에게 한 번 더 시뮬레이션을 더 돌리고 퇴근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어차피 지금은 병아리에게 오래 신경을 쏟을 틈이 없었다. 3주 뒤에 있을 A급 게이트를 어떻게 해야 더 안전하게 공략할 수 있는지 골몰하는 데 더 시간을 들여야 했다.

이번에 열린 A급 게이트에는 고급 시료가 많이 묻혀 있을 확률이 높았다. 센터며 사기업이며 오만 곳에서 이 A급 게이트에 눈독을 들였다. 이 게이트를 따낸 것이 바로 자신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이 게이트를 따내기 위해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잘못하면 과로사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다. 하루에 30분이라도 눈을 붙일 수 있으면 다행이었다. 얼마 전에 병원에서 기적적으로 완치 판정을 받지 않았다면 이번 게이트에 들어가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모든 일이 결정된 지 이틀 뒤였던가? 이번 A급 게이트 행에 신입 에스퍼를 끼워 주면 안 되겠느냐는 센터의 지시가 내려왔다.

“장 팀장님.”

솔직히 처음에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차영헌’이라는 에스퍼는 태생 S급으로, 칼의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야말로 몬스터를 학살하기 좋은 능력이었는데, 이런 위험하고 강력한 능력은 초반에 다루기가 몹시 어렵다. 여러 번 게이트를 공략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갈고 닦아야만이 제대로 쓸 수 있었다.

한마디로 짬처리를 당한 것 같은데……. 사실상 센터의 입김으로 게이트를 따낸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센터의 지시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그의 직급은 팀장이었지만, 수많은 실적을 내고 있는 덕에 업무 자체는 과장직에 가까웠다.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를 일일이 확인하고 있는 중에 누군가 그의 파티션 너머를 콩콩 두드렸다.

“장이주 팀장님?”

“아, 네. 무슨 일입니까.”

서류를 훑어보면서 다른 생각에 잠겨 있느라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를 부른 사람은 그가 내근직을 할 때 그의 업무를 도와주는 팀원이었다. 이능력자가 아닌, 말 그대로 서류 처리를 원활히 하기 위해 센터에 고용된 직원이었다.

“그……. 팀장님 애인 분이 기다리고 계시는 것 같던데요.”

“……애인이요?”

상상도 못 한 말이라 너무 당황스럽다.

‘내가…… 애인이 있다고?’

“아이, 빨리 가 보세요. 저 그렇게 잘생긴 사람 처음 봤어요. 애인 분, 에스퍼 맞죠?”

즐거운 얼굴로 속삭인 직원은 곧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는 듯 얼른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는 잠시 동안 멍한 얼굴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아, 그래.’

휴대 전화를 확인해 봐야겠다. 정말 애인이라면, 먼저 연락을 하고 왔겠지.

어쩐지 머리가 뭉근하게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애인은 무슨, 그런 게 어디 있냐는 심정으로 휴대 전화를 확인하던 손가락이 천천히 느려진다. 메신저를 확인하자, 다소 건조하지만, 확실히 애인 사이에서 주고받는 대화 기록이 있는 특정인이 눈에 들어온다.

‘……그랬던가.’

누가, 그에게 마음을 고백했던 것도 같다. 일이 몹시 바쁘지만 그래도 몸이 건강해졌으니 애인 정도는 한 번쯤 있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한 번 기억하기 시작하자, 전후 사정이 느릿느릿 수면 위로 떠오른다.

가이드와 에스퍼로서 마주하고 싶지 않다고. 사람 대 사람으로 진지하게 만나고 싶다고 하던 남자의 목소리.

너무 바빠서 그 이후로 까맣게 잊고 지냈다. 이따금 메신저를 확인할 때만 연락했었다.

그래, 그랬다……. 어떻게 애인을 잊어버리고 있을 수 있었지?

요즈음 수면이 부족한 탓인가. 얼굴은커녕 이름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혹시나 싶어 이름을 확인했지만, 애인이어서 그런지 이름보다는 하트 하나로 저장되어 있다.

‘센터 1층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일 다 보시고 편할 때 천천히 와 주세요.’

그 온순한 메시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그는 팔락거리는 서류 종이들을 깔끔하게 정돈해서 서류철에 묶어 둔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걷던 걸음은 점차로 빨라지기 시작하더니, 2층으로 내려갈 때쯤에는 성큼성큼 걷고 있었다.

애인은 어떤 사람일까? 에스퍼인 것 같은데, 자신에게 몇 번이나 가이딩을 받았을까?

얼굴을 보면 분명 모든 게 기억이 날 것이다. 알 수 없는 기대감에 가슴이 가파르게 뛰는 것 같다. 그는 반쯤 로비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애인을 찾았다.

그러나 로비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아, 하아…….”

조금씩 숨이 찼다. 로비 1층을 서성이며, 장이주는 자신의 휴대 전화를 꺼냈다. 그리고 하트로 저장된 사람에게 전화를 걸며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신호음만 갈 뿐, 애인은 자신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마치 없는 사람인 것처럼.

현재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기계음이 들렸다. 그는 끊어진 휴대 전화를 움켜쥔 채 가만히 로비에서 서 있었다. 바람이 빠져나간 풍선처럼 갈비뼈 안쪽이 쪼그라든 것 같다. 이건 탈력감인가. 아니면 허무함인가?

애인에게 갑자기 무슨 일이 생겼거나, 아니면 자신이 바로 나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잠시 어디론가 갔을 수도 있겠지만 왠지 앞으로도 애인을 볼 수는 없을 것 같다는 기묘한 예감이 들었다.

그때, 누군가 대리석 바닥을 뚜벅뚜벅 밟는 소리가 났다.

그는 빠르게 뒤를 돌았고, 그게 누구인지 확인했다.

“……장 팀장님?”

그 목소리를 듣자 현실감이 확 들었다.

갑자기 나타난 남자는 자신의 애인이 아니었다. 그건 확실했다. 왜냐하면, 장이주는 자신을 부른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자신을 부른 사람은 이제 갓 입사한 병아리, 차영헌이었다.

장이주를 알아본 차영헌이 그를 부르며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이제 막 입사한 녀석답지 않게 여유로운 인사였다.

“왜 여기 계십니까.”

단순한 호기심으로 이루어진 물음에, 장이주는 무심코 답했다.

“누구를 좀 기다리느라…….”

그러자 차영헌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그의 옆에 와서 섰다.

“데리러 오기로 한 분이 있으십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 조금 민망한 기분이기는 했지만.

“그렇습니다.”

얼굴 옆에서 그렇군요, 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그렇게 우두커니 선 채로 센터 밖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장이주는 슬쩍 시선을 내려 휴대 전화를 확인했다. 부재중이 남았을 텐데도 애인에게서는 여전히 메시지도, 연락도 없었다.

‘애인’과 주고받은 메시지는 자신이 한 것 같지가 않았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통화 기록이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아 연락을 꾸준히 한 사이였던 것 같은데, 왜 남이 한 기록을 엿본 것 같은 기분일까?

“실례가 아니라면…….”

멍하니 딴생각에 빠져있던 장이주를 끌어올린 건 입을 다문 채 그와 함께 창밖 풍경을 바라보던 차영헌이었다.

“상담을 좀 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아.”

갑자기 들려온 요청에, 그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고개를 돌려 차영헌을 바라보았다.

그대로 퇴근한 줄 알았는데 아직도 옆에 있었군.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