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언제나’처럼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에 최선을 다했다. 임무를 완수하고, 실적을 내는 것은 그가 가장 잘하는 일이었다.
요즈음은 그야말로 호황기였다. 그가 들어가야 할 상등품의 게이트가 널려 있었다. 게이트를 아무리 해치워도 들어갔던 게이트보다 훨씬 더 많은 게이트가 그를 기다렸다. 마치 세상이 그를 향해 미소 짓고 있는 것 같았다.
‘……버거운 것 같기도 하고.’
얼마 전에 A급 게이트에 들어갔다 나왔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S급 게이트가 두 개나 배정되었다. 지난번 A급 게이트가 아주 희귀한 게이트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A급 게이트 하나도 따내기가 아주 어려웠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주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걸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S급 게이트에 들어갈 준비를 하게 되자 그는 오동백 팀장처럼 그중 하나의 게이트를 다른 팀장에게 넘겨야 하나 심각하게 갈등했다. 절대 병행할 수 있는 일의 양이 아니었다.
원소 계열 능력자가 있는 팀에서 그를 도와주기로 하여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지만, 요즈음은 그야말로 매일 야근을 해야 했다. S급 게이트 준비가 만만치 않은 것도 있고, 그동안 클리어했던 게이트의 서류 업무를 처리해야 했기 때문도 있었다.
그리고 사실 또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수면의 질이 안 좋아.’
아무리 자도 제대로 자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의 수면 시간은 대체로 6시간 내외였다. 그보다 적게 자지도, 많이 자지도 않는다. 본래라면 이것보다 덜 잤겠지만, 피곤이 사라지지 않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이보다 컨디션이 떨어지면 꼼짝없이 게이트 하나를 토해내야 할 판이어서.
욕심이라면 욕심이다. 대신, 정신없이 일에 치이다 보니 이상한 위화감이 드는 느낌을 지울 수 있었다.
그래, 위화감.
그날 차영헌과 센터 로비 1층에서 서 있었을 때, 그는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지금과 비슷한 상황을 본 적 있는 것 같다는 느낌. 정확하게는 들어본 적이 있다고 해야 하나. 데자뷔인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생전 느껴본 적 없는 감각이었다.
그 느낌은 인지하자마자 금세 사라져 버렸지만, 오랫동안 걸쩍지근한 여운을 남겼다.
‘너무 피곤해서 착각한 것일 수도 있고.’
“안녕하십니까.”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어 모의 게이트 시뮬레이션 결과지를 확인하고, 팀원 에스퍼들을 점검하는데 차영헌이 눈에 들어왔다. 정확히는, 하얗게 질린 안색이.
‘……왜 이렇게 핼쑥해져 있어.’
다른 녀석들에게 이런저런 피드백을 하다 말고 차영헌을 바라보자, 임시로 차영헌의 사수를 맡은 녀석이 기다렸다는 듯 칭찬을 늘어놓았다.
“가르치는 맛이 난다니까요.”
쏟아지는 칭찬에도 차영헌은 묵묵히 서 있기만 했다. 과연 그 말대로 차영헌의 최근 결과지가 눈에 띄게 나아져 있었다.
“괜히 S급이 아닙니다. 언제 몬스터 한 마리 잡고 헥헥댔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예요. 이 정도면 백 마리도 거뜬할 겁니다.”
그야 가성비가 안 좋았을 테니까. 지나치게 예민한 능력을 가진 에스퍼들은 자신의 능력을 어느 정도까지 사용해야 하는지 감을 잡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만약 차영헌이 ‘모든’ 혈관을 자르는 것으로 몬스터를 제거했다면, 수많은 혈관을 잘게 쪼개놓느라 굉장한 힘을 썼을 테고.
‘그 혈관들 중 무엇을 잘라야 할지 가늠이 안 됐겠지.’
에스퍼는 몬스터를 제거하는 사람이었지, 몬스터를 치료하는 의사가 아니다. 하지만 기의 흐름에 집중하게 되었다면 뭐가 중요한지 판단할 수 있게 되었을 테고, 그는 몬스터를 죽이면 죽일수록 더 빠르고 간결하게 「암살」 능력을 깨우치게 되었을 것이다.
차영헌은 본래 강력한 에스퍼였다. 노력하면서 발전하는 인간형이 아니라, 이미 발전되어 있는 인간형에 가까웠다.
“능력은 유지가 관건이에요. 고작 시뮬레이션을 돌리는 정도로 지나치게 무리해서는 안 됩니다.”
“아…… 예. 들었지?”
무심한 태도로 피드백을 덧붙이자, 신나서 말하던 녀석이 발뺌하듯 차영헌을 슬쩍 본다.
S급 에스퍼라면 가이딩을 받기가 썩 쉽지 않다. 듣자 하니 가이딩 약이 잘 안 듣는 체질이라고 했나……. 센터에서 가이드를 몇 번 배정받았지만 매칭률이 너무 낮아 지금은 담당 가이드가 없다고 했고.
‘그래서 얼굴이 저 모양인 거군.’
사수 녀석이 알아서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충고해 주었어야 했는데, 보아하니 신나서 더 부추긴 모양이다.
고개를 끄덕인 장이주가 차영헌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가만있어요.”
그리고 손을 뻗어 차영헌의 이마를 만지며, 가볍게 가이딩 기운을 흘려 넣어 보았다. 자신과 상성이 좋지 않는지 접촉만으로 가이딩이 되는 느낌은 아니었다.
‘S급 에스퍼와 상성이 좋지 않으면 좀 피곤한데.’
팔을 내리자, 잠자코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얼굴이 보인다. 무척 힘든 상태일 텐데 조금도 티가 나지 않는다.
“차영헌 에스퍼, 잠깐 시간 낼 수 있습니까?”
“예.”
시뮬레이션 결과지를 한 번 더 살핀 장이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것도 한 게 없었지만 A급 게이트도 한 번 들어갔다가 나왔고, 삼 주 동안 시뮬레이션을 스무 번이나 돌린 기록이 있다. 멀쩡했다면 오히려 이상했을 것이다.
“그럼 따라오세요.”
*
목을 조이는 넥타이를 살짝 풀면서, 그가 차영헌을 향해 손짓했다.
차영헌은 소리 없이 문을 닫고 들어왔다.
“앉아요.”
맞은편을 턱짓하자, 바로 와서 앉는다. 움직임에는 인기척이 없고 내내 조용했다. 그동안 그는 창문을 열고, 가습기를 가동시켰다. 그런 뒤 자신도 자리에 앉았다.
“이곳은 기억해 두면 좋습니다. 지금처럼 담당 가이드가 없을 때 가이딩이 필요하면 센터 앱으로 예약을 잡고, 이쪽으로 오면 됩니다. 내가 자주 이용하는 가이딩실이에요.”
“예.”
팀장이 이용하는 가이딩실이라고 해서 다른 가이딩실과 별다른 차이점이 있는 건 아니지만, 팀장이 아니었을 때도 이 가이딩실을 이용해서인지 이곳이 편했다. 위치를 기억해 두려는 듯 차영헌의 시선이 문 쪽을 슬쩍 향한다.
장이주는 자신의 손을 책상 위에 올려 두고 설명을 시작했다.
“담당 가이드가 아닌 가이드와 가이딩을 할 때는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대부분 1단계 가이딩을 진행합니다.”
열아홉 살에 처음으로 발현했다면 이것이 첫 가이딩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주의할 점을 한 번 더 알려 주었다.
차영헌이 물었다.
“특수한 경우가 있습니까?”
“없지는 않습니다.”
예컨대 단순 접촉으로는 가이딩이 아주 미비하게 되는 수준이지만, 점막 접촉으로 단계를 높이면 비교할 수 없는 수준으로 가이딩의 효율이 확 치솟는 경우가 있다. 정말 드물지만 종종 있는 일이었다.
‘나는 겪어 본 적이 없지만…….’
아니다. 있었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갑자기 차영헌이 그의 손을 잡은 탓에 그 느낌은 순식간에 휘발되고 말았지만.
‘이것 봐라.’
그는 의외라는 생각을 하며 눈썹을 살짝 치켜세운 채 차영헌을 바라보았다.
“……지금 바로 시작할까요?”
“예.”
거세게 움켜쥐지는 않았지만, 빠져나갈 틈 없이 단단하게 잡힌 손이었다. 보통 에스퍼들은 자신이 지시를 내리기 전까지 손을 잡지 않았지만…… 역시 신입 에스퍼여서 그런가. 성급한 면이 있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다른 에스퍼를 떠올리게 하고 싶지 않았는지 잘 모르겠군.
장이주와 차영헌은 딱 한 시간 동안 가이딩을 했다. 매칭률이 별로 좋지 못해서, 쉬운 가이딩은 아니었다. 반드시 리듬 게임을 곁들여야만 했다.
하지만 차영헌과의 가이딩은 처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익숙한 느낌이었다. 마치 서로가 서로에게 딱 맞는 사람이라는 듯이. 매칭률이 낮은데 기묘한 조화가 느껴졌다.
“수고했습니다.”
시계를 확인한 뒤, 장이주가 손을 놓았다. 그런 다음 풀어 두었던 넥타이를 다시 꽉 죄게 묶었다.
일정 시간 동안 가이딩을 받은 차영헌은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 제 손을 쳐다보는 것 같았다.
“무슨 문제 있습니까?”
“……예.”
그저 가볍게 한 말인데, 긍정의 대답이 돌아왔다. 넥타이를 정돈하던 그는 깜짝 놀라 차영헌을 돌아보았다.
“한번 봅시다.”
‘가이딩 알러지인가?’
그는 즉시 손을 뻗어 차영헌의 목을 짚어 보았다. 외견상으로는 호흡도 정상으로 보이고, 피부 위로 돋아나는 반점도 없는 것 같고, 맥도 정상적으로 뛰는 것 같은데…….
아주 보기 드물지만 가이딩 알러지 증상을 호소하다 병원에 실려 가는 에스퍼들이 있었으므로 황급히 차영헌을 훑어봤지만, 아무리 봐도 그런 건 없어 보였다. 겉보기만 그런 걸까? 장이주가 다급히 물었다.
“어디가 불편합니까?”
“그게 아니고…….”
“그럼?”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입을 연다.
“원래 이런 겁니까?”
지난번 봤던 차영헌은 말을 이렇게까지 가리는 타입은 아닌 것 같았는데. 오히려 아주 솔직한 편이었다. 이번에는 무슨 영문인지 뜸을 들이는 시간이 너무 길다. 답답함에 장이주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재촉했다.
“제대로 말해 보세요.”
그럼에도 차영헌은 쉽사리 입술을 떼지 못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서야 눈을 마주쳐왔다. 또렷한 눈동자에 자신의 얼굴이 비치는 것 같다.
“팀장님께…… 부적절한 행위를 하고 싶습니다.”
부적절한 행위?
순간적으로 차영헌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차영헌에게 가이딩 알러지가 있나 부산을 떨어댄 탓이다.
물론…… 장이주는 금세 차영헌의 말을 알아들었다.
입술 사이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괜히 놀랐군. 그는 차영헌에게서 멀찍이 몸을 물린 뒤, 옷차림을 마저 점검했다.
“가이딩을 했으니 그럴 수 있습니다.”
“……팀장님도 그러십니까?”
장이주는 커프스단추를 채우며 차영헌을 힐끗 보았다.
민망하다면야 민망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말해 주지 못할 것도 없다.
“나는 딱히.”
신입 에스퍼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그럼에도 그의 시선은 어딘지 장이주를 가늠하는 것처럼 깊고 끈질겼다.
“오늘 저녁에 신입 에스퍼 환영 회식이 있는 건 알고 있습니까.”
그 시선을 가볍게 받아넘기며 묻자, 차영헌이 ‘예’하고 답한다. 지나치게 사적인 주제는 넘기고, 그렇게 만남을 마무리 지을 생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요, 그러면 이따 봅시다.’라고 말했을 때였다. 차영헌이 불쑥 물었다.
“키스해도 됩니까?”
계속해서 그 고민이 차영헌의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아무 맥락 없이 튀어나온 말에 물끄러미 쳐다보아도 차영헌은 개의치 않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괜찮으시다면요.”
“…….”
막무가내로 입술부터 들이미는 타입은 아닌가 보군. 이 정도면 꽤 정중한 물음이었다.
잠깐의 침묵 뒤, 그가 입을 열었다.
“점막 가이딩을 해 봤자 별달리 좋지는 않을 겁니다. 차영헌 에스퍼의 경우에는 오히려 집중도가 떨어져서 가이딩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는 깔끔한 거절이다. 시간을 더 끌며 자리에 남아 있는 건 여지를 주는 행동이었다.
장이주는 그대로 가이딩실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