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콜 가이드-119화 (118/132)

#119

장이주 팀장이 이끄는 팀은 노련한 에스퍼들로 채워져 있었다. 사실, 상급 가이드가 팀장으로 있는 팀은 대부분 그랬다.

‘상급 가이드가 담당이 되면 좋으니까.’

어떻게든 상급 가이드의 ‘my’ 목록에 한번 올라보겠다고 눈 벌게진 놈들이 한둘이겠느냔 말이다.

굳이 비율을 따지자면 에스퍼보다 가이드의 수가 훨씬 더 많지만, 상급으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한쪽의 비율이 절벽처럼 가팔라진다. 상급 에스퍼들의 수에 비해 상급 가이드의 수가 터무니없이 적어진다는 뜻이다.

어차피 최상급으로 넘어가면 그 수가 몇 안 된다. 땅덩이 넓고 인구 많은 나라야 최상급 이능력자들의 수가 몇십만 명을 훌쩍 넘긴다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올해에 이르러 만 명을 겨우 넘겼다. 그중에서 에스퍼의 비율은 9할에 육박했다. 가이드가 여러 명의 에스퍼를 담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면 진작 사달이 나도 단단히 났을 터다.

장이주 역시 물밑에서 상급 가이드를 노리고 치열하게 경쟁하는 상급 에스퍼들의 생태계에 대하여 대충은 알고 있었다. 하다하다 안 돼 질질 짜며 동정을 사려는 놈, 만나자마자 대뜸 육탄전을 벌이고 보는 놈, 치밀하게 계획을 짜서 접근하는 놈 등 정말 가지가지였다.

‘……그에 비해.’

아주 심각한 죄라도 지은 듯, 이건 뭔가 잘못되었다는 듯한 얼굴로 팀장님께 부적절한 행위를 하고 싶다고 말한 건 애교 수준이라고 할 만했다.

장이주의 팀은 센터의 지시가 아니었으면 신입이 생길 수가 없는 구조였다. 그야말로 오래간만에 만난 신입에 팀원들은 잔뜩 들떴다. 정확히는 신입 에스퍼 환영 회식을 핑계로 삼아 신나게 놀 생각에 들뜬 것이다.

다음 달에는 본격적으로 S급 게이트에 들어갈 준비를 마쳐야 할 테니, 회식을 하려면 무조건 이번 주에 해야만 했다. 그래서 저녁 식사 대신 회식을 잡았다. 그랬더니 하루 종일 마주치는 팀원마다 회식 이야기였다.

‘내가 그렇게 쥐 잡듯 잡았었나.’

흠, 하는 소리와 함께 장이주가 소주병을 기울였다. 그 모습을 근처에 앉은 팀원들이 힐끔거리며 봤지만 아무도 나서지는 않았다. 그야, 혼자 자작하는 게 편하다고 일찌감치 막아 두었기 때문이었다. 한번 술을 따르게 두면 이놈이고 저놈이고 술을 따라 주겠다고 야단이니까, 그냥 혼자서 조용히 먹고 싶었다.

“팀장님, 그래도 막내가 주는 술은 한 잔 받으셔야죠.”

술집에 들어오자마자 흥청망청 술을 섞어 마시던 녀석들의 얼굴에 얼큰하니 취기가 오를 때였다. 개중 넉살 좋은 놈이 한마디 했다.

적당히 어울리면서 선배들이 주는 술을 받아 마시던 차영헌이 기다렸다는 듯 이쪽을 흘깃 본다.

“막내야, 이리 와 봐.”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았더니 승낙이라고 생각했는지 녀석이 신이 나서 차영헌을 부른다. 술 한 잔 정도야 뭐가 대수라고. 그는 방금 채웠던 소주잔을 단숨에 비웠다.

“좀 천천히 드시지.”

입 안에 탁 털어 넣은 소주 맛이 쓰게 퍼졌다. 정작 신이 나서 막내를 부른 놈이 코앞에서 불만스럽게 꿍얼거린다. 기다렸다는 듯 누군가 옆에서 안주를 입가에 대어 주었다. 입을 벌리자 달콤하고 매운 소스의 닭고기가 쏙 들어온다.

“국물도 드릴까요?”

이때다 싶었는지 여기저기에서 귀찮게 굴기 시작했다. 술이 몇 잔 들어가고 나면 으레 달라붙는 녀석들이 정해져 있었다.

“됐습니다.”

어딜 쪽쪽 빨던 숟가락을 들이대려고……. 이래서 에스퍼들에게는 틈을 주면 안 된다. 발 뻗을 자리를 슬슬 보다가, 어느 순간부터 선을 넘고 싶어 하니까. 그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물론, 이 녀석들이 없었으면 귀찮은 회식 자리에 계속 엉덩이를 붙이고 있게 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놈들은 꼭 자기들끼리 놀면서 내가 있기를 바란다니까…….’

말이야 바른말로, 귀염성 없이 무뚝뚝하게 일만 할 줄 아는 팀장이 함께 있어 봤자 재미가 있겠는가, 설레기라도 하겠는가. 아쉽다는 듯 붙잡힐 이유가 없는 사람이란 뜻이다. 서른 후반에 접어들기 시작한 연상의 팀장에게 매력적인 구석이 있다면 게이트에 들어갔을 때 믿고 의지할 만한 대상이라는 것뿐. 화려한 외모의 연하 에스퍼들 사이에서, 상급 가이드가 아니었다면 언감생심 받을 수 없는 대접이었다.

사실 장이주도 자신의 에스퍼들에게 상사의 대접 그 이상, 그 이하도 받고 싶지 않았다. 수시로 몸을 찔러오는 고통에서 해방되었음에도 계속해서 일에 매진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가이드 주제에 죽기 살기로 게이트에 드나드는, 존경스러운 팀장으로 여겨 주기를 바라는 마음의 발로일지도 모른다.

“소주 말고 맥주로…….”

“안 돼. 섞어서 마시면 더 취하실걸.”

저들끼리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맥주는 딱히 나쁘지 않지만, 취하기는커녕 배만 부르기에 별로 선호하지 않는 주류였다. 어느새 그의 옆자리까지 다가온 차영헌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그의 손에는 반쯤 남은 소주병이 들려 있었다.

“취하셨습니까?”

아주 낮은 목소리가 물었다. 큰일 날 소리를. 누구 좋으라고 회식 자리에서 취하겠는가. 눈 감으면 어떻게든 손 한 번 대 보려는 하이에나들이 득시글거리는데. 그는 가볍게 고개를 젓고는 빈 잔을 내밀었다.

잔은 딱 마시기 좋을 만큼 채워졌다. 반이 조금 넘는 정도였다.

“차영헌 에스퍼는 뭐가 좋습니까.”

소주? 맥주? 앞에 있는 술을 눈짓하며 말하자 차영헌도 소주를 골랐다.

“에이, 팀장님. 여기는 사석인데 편하게 호칭하시면 안 되나요?”

“회식 자리가 어떻게 사석이에요.”

코웃음 치며 차영헌과 가볍게 잔을 부딪쳤다. 고개를 살짝 틀어 술을 마시는 녀석의 턱과 콧대가 보인다. 그걸 물끄러미 보며 아까 그랬듯 단숨에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누군가 안주를 또 집어 주기 전에 물을 마셨다.

회식 자리가 드문 만큼, 적당히 있다가 갈 생각이었다. 시시때때로 시간을 확인하며 취하지 않도록 조절하며 마시는 버릇을 들일 필요가 있었다. 병이 낫기 전에는 술은커녕 음식도 가려 먹어야 하는 처지였기에 조절하는 버릇이 미숙했다. 일부러 일정한 간격을 두며 조금씩 마셔야 확실하게 취하지 않을 수 있었다.

키스해도 되냐고 물었던 녀석치고는 담백하게 술 한 잔 마시더니 본래 자리로 되돌아간다. 그는 저도 모르게 차영헌의 뒤통수를 힐끗 쳐다보고는 시간을 확인했다. 두 잔을 연거푸 마셨으니 다음 잔은 20분 뒤에 마셔야 했다.

‘……그냥 집에 가는 게 나을지도.’

요근래 제대로 자지 못한 것도 있었고, 일도 넘쳤고, 오늘은 예정에 없던 가이딩도 했다. 여기에 술까지 들어가니 평소보다 더 피곤한 느낌이었다.

게다가.

“연애도 오래 쉬는 거 아니다. 말 나온 김에 묻자. 우리 막내는 어떤 타입을 좋아하냐, 응?”

아무래도 갓 대학을 졸업한 녀석을 막내로 받았다 보니, 신선하기도 하고 몹쓸 호기심이 드는 모양이었다. 연애사까지 캐묻는 폼이 아주…… 징그럽다, 징그러워.

저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용케 표정 하나 안 구기고 선뜻 어울릴 수 있는지 놀라울 정도였다.

“저는 팀장님 같은 타입이 좋습니다.”

“……뭐 임마?”

싱글벙글 웃던 녀석 중 하나가 낯짝을 팍 구기면서 ‘팀장님은 안 돼!’ 한다.

“아무나 말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뚱한 얼굴로 차영헌이 꼬박꼬박 대꾸한다. 지금은 저렇게 귀여움을 받는 막내 에스퍼지만, 시간이 지나면 왠지 다른 에스퍼들을 죄다 눌러 버리는 고압적인 녀석으로 자라날 것 같은 싹이 보였다.

안 그래도 피로한데, 이 꼴을 보고 있으려니 더 극심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자.”

술잔을 내려놓고 한마디 하자마자, 저들끼리 낄낄거리던 소리가 딱 멎었다. 귀가 좋은 에스퍼들답게 탁자 테이블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가 빠짐없이 그를 주목하고 있었다.

“더 마시고 싶은 사람들은 더 마시다 가고, 알아서 귀가하세요. 내일 주말이라고 너무 취하지는 말고.”

잔소리를 남기며 지갑과 휴대 전화, 차키를 챙기자 여지없이 볼멘소리가 튀어나온다.

“팀장님, 잠깐만요. 벌써 가시게요?”

이 아쉬운 말에 속아 어영부영 2차, 3차까지 끌려다니는 건 한 번의 경험으로 충분했다. 완치 판정을 받고, 일반인의 삶을 살기 시작한 그는 최근 들어서야 자신의 에스퍼들이 이렇게나 집요한 줄 처음 알았다.

‘이젠 안 속지.’

휴대 전화로 대리 기사를 부르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내일 봅시다.”

쌩하니 술집을 나서는 길에 반쯤 일어났던 차영헌을 본 것 같기도 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빠르게 샤워를 한 뒤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머리를 말리고, 휴대 전화를 한 번 확인한 뒤에 침대에 눕기까지 딱 삼십 분이 걸렸다.

“하.”

절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피곤해 죽겠네. 팔다리가 물 먹은 듯 축축 늘어진다. 빨리 잠들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다. 오늘은 회식을 한다고 야근을 못 했으니, 내일은 두 시간 일찍 출근해야 한다……. 머릿속으로 내일의 계획을 세우고, 휴대 전화에 알람을 맞췄다.

술기운과 피로함이 합쳐져, 마치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는 수렁처럼 밀려오는 잠에 순순히 몸을 내맡겼다.

‘피곤하다…….’

언제 잠이 들었을까?

그는 자는 중에도 피곤하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마치 가위라도 눌린 것처럼 온몸이 힘들었다.

‘피곤해…….’

그때, 어디에선가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 자신은 여전히, 끔찍하리만치 무기력했다. 중력이 그를 사정없이 잡아당기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업혀 있는 것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바닥에 엎드려 누운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을 것이다.

……잠깐.

업혀 있다고?

이곳이 집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 순간, 반짝 눈이 떠졌다.

달도 별도 없는 새카만 어둠 속, 가로등도 없는 길 위에서 어떤 남자가 그를 업고 한 치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을 걷고 있었다.

이곳이 꿈이라는 것도 모른 채, 그는 멍하니 물었다.

“……누구?”

남자는 그가 깨어난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전혀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대답도 없이 웃기만 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질문을 던졌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여전히 자신을 받쳐 업은 채로, 남자는 터벅터벅 걷기만 했다. 이번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는 걸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대답이 들려왔다.

“어디든.”

서글픈 목소리였다.

“…….”

“교수님과 둘만 있을 수 있다면 어디로든 갈 수 있어요.”

교수? 자신은 교수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교수」라는 직업도 참 근사하겠구나, 짧은 순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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