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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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자리가 뒤숭숭했다. 여전히 무슨 꿈을 꿨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주말 동안 출근하면서 한참 생각했으나 허사였다.
알 듯 말 듯 한 기시감이 자꾸만 신경을 갉작거리는 통에 아침부터 말수가 줄어 있었다. 게이트에 들어가는 날에는 컨디션 조절이 필수니, 의식적으로라도 집중력을 흩트리는 생각은 차단하고 기감을 날카롭게 곤두세워야 했다.
S급 게이트이니만큼 변수가 있지 않을까 긴장했는데, 그 긴장이 무색하게도 게이트 클리어는 아주 순조롭게 끝났다. 모의 게이트 시뮬레이션에 나온 그대로 게이트가 열린 것은 물론, 합을 맞춘 팀원들의 손발이 착착 맞아 오히려 시뮬레이션보다 훨씬 더 빨리 클리어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다만…….’
게이트를 공략하는 중간에 큰 늪지대가 있어 팀원 중 하나의 품에 안겨 이동했는데, 그 느낌이 아주 묘했다.
‘익숙하다고 해야 할까.’
분명 자신은 희귀병에 앓았던 거지 다리가 부러졌던 게 아닌데, 왜 다리가 불편했던 적 있는 사람처럼 안겨 다니는 게 당연한 느낌인 걸까.
게이트를 클리어하고 한 뒤에도 그는 내내 이 이상한 느낌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냥 무시한 채 지내고 싶어도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경종이 울리는 것 같았다.
“팀장님. 괜찮으세요?”
평소라면 게이트에서 나오자마자 가이딩을 해 달라고 졸라야 할 녀석들이 전부 고만고만한 얼굴로 그의 눈치를 봤다. 그는 저도 모르게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쓱 쓸었다. 그렇게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 걸까?
“괜찮습니다. 다들 수고했어요.”
“에이, 팀장님이 훨씬 더 수고하셨죠.”
“팀장님, 가이딩은……. 윽!”
눈치 없이 가이딩 이야기를 꺼낸 녀석이 입을 딱 다문다. 보아하니 발이라도 밟힌 것 같았다.
‘깜빡할 뻔했군.’
다른 것도 아니고 가이딩을 잊을 뻔하다니, 확실히 정신이 없기는 없는 모양이다.
“그래요. 어차피 서류 처리도 해야 하니, 시간 되는 사람들은 잠깐 모여서…….”
“아닙니다, 팀장님. 쉬셔야 할 것 같으세요. 지금 어떤 얼굴이신지 모르시죠.”
“나는 괜찮습니다.”
괜찮다는 말을 기계적으로 하며 예약 가능한 가이딩실이 몇 개 있는지 살펴보려 휴대 전화를 꺼내는데, 손이 턱 잡힌다.
“팀장님, 저희도 진짜 가이딩 받고 싶거든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그의 손을 붙잡은 녀석이 말했다. 꽤 오랫동안 연차가 쌓인 팀원이었다.
“그런데 농담이 아니라 지금 가이딩하면 쓰러지실 것 같아서 못 받겠어요. 일단 오늘은 쉬시고, 내일 출근하신 다음에 봽죠.”
매칭률이 나쁘지 않은 녀석이었는지 단순히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가이딩이 조금씩 이루어졌다. 보란 듯 당당하게 말한 주제에, 이 녀석은 조금 머뭇거리며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는 곰곰이 자신의 몸 상태를 되돌아봤다. 장기간 제대로 된 수면을 취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정말 단순히 꿈자리가 사나워서일까. 몸이 힘들어도 정신력으로 어떻게든 버티며 오늘의 일을 해치우는 데 익숙해져 있는 그에게 이런 보살핌은 정말이지 어색한 부분이다.
“또 아프시면 어떡해요.”
아, 그런가.
무리를 해서 다시 몸을 망치는 것보다는…… 병이 생기기 전에 충분히 휴식을 취해 두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아니, 확실히 장기적으로 봤을 때 제대로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을 다문 채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장이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정신으로 집으로 돌아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깨끗하게 씻고 환복을 한 채 침대에 누워 있었고, 그는 그대로 쓰러져서 잠에 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이곳이 꿈속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리고 자신이 이 꿈을 ‘또’ 꾸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어디에선가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무성한 안개가 속눈썹을 간지럽힌다. 한 치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그를 들쳐 업은 채 어디론가 가는 남자. 시선을 내려도 너무 어두워 그의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누구?”
언젠가 똑같이 물었지. 남자는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흩어지는 것 같은 웃음소리를 들으며 이 순간의 장면이 몇 번이나 반복된 걸까, 멍하니 생각했다.
어디를 가느냐고 물으면 이 남자는 또 서글픈 목소리로 어디든 가겠노라 대답할 것 같다.
문득 똑같은 질문을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 넓은 등이 묘하게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이 남자를 전혀 몰랐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누구인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얼굴을 보여 주지 않는 이유라도 있는 걸까.
혼곤한 와중에 정제되지 않은 생각이 부드럽게 흘러 다녔다. 그는 업힌 채로 남자의 등에 얼굴을 묻고 있었고, 불현듯 이 남자는 어떤 마음으로 이 길을 매일 밤마다 걷고 있나 궁금해졌다.
지금까지는 누구냐고 묻고,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던 게 다였다. 언제나 꿈은 짧았고 그는 단번에 깨어났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꿈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어쩌면 답지 않게 너무 일찍 잠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이렇게 오래 꿈을 꿀 수 있는 게 아닐까.
늘어진 팔이 흔들리는 게 느껴진다. 축 늘어진 사람을 업고 가는 일이 쉬울 리가 없음에도, 이 남자는 전혀 힘든 것 같지가 않았다.
분명히 이 남자는 자신이 누군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천천히 호흡했다. 사방에서 밀려오는 안개가 코끝으로 스며드는 것 같다. 그럴수록 현실에서 느껴지던 기시감이 실체가 되어 그와 한 몸이 되었다. 그간 꾸었던 꿈의 장면이 아주 천천히 떠올랐다. 때로 자신은 이 남자에게 업힌 채 헛소리를 했던 것 같다. 처음에는 꼭 누구냐고 물었고, 가끔은 자신을 당장 내려놓으라고 실랑이를 했다.
그때마다 이 남자는 자신을 말리기도 하고, 애원하기도 했던 것 같다. 어떻게 자신을 잊을 수 있느냐고 상처받은 얼굴을 했지.
하지만 그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턱 위로 지워진 듯 흐릿한 윤곽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기억하고 싶다.
이 남자가 누구인지, 나를 어디로 데리고 가는지 알고 싶다.
그렇게 간절히 바라자, 거짓말처럼 이 남자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동시에 그는 꿈에서 깨고 나면 이 남자, 「이승우」에 대하여 또 한 번 잊어버리고 말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머리가 너무 무겁다. 기억은 여전히 혼란스럽고, 자신은 왜 이 남자에 대하여 알고 있는 건지 납득되지 않는다. 나는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 건가?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어째서 장이주의 몸을 하고 있는 건가?
알 수 없다. 미지의 세계 속에서, 그는 저도 모르게 이승우에게 기대고자 하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이승우는 생사의 순간에서마저, 자신의 삶을 버리고 고은교를 살리기 위해 달려오던 그의 에스퍼였으니까.
팔을 뻗어 이승우의 목을 끌어안았다.
“승우야.”
말문이 턱 막힐 정도로 수많은 물음이 소용돌이친다. 이곳은 어디야? 나는 왜 여기 있지?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고?
네가 나를 구하러 왔구나. 그렇지?
“어떻게 왔어.”
그 수많은 물음 속에서 간신히 하나를 건져냈다.
자신조차 모르는 세계로 떨어지고 만 그를 되찾기 위해 달려온 길이 분명 녹록치 않았을 것이다. 어떤 희생과 어떤 고행이 있었을까. 그러나 마침내 만나고야 말았으니, 우리는 이대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 아니면 영원히 돌아갈 수 없거나.
선택지는 동전의 양면처럼 두 가지뿐. 손을 펴 보기 전까지는 앞면인지 뒷면인지 알 수 없겠지. 그는 기대감과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속삭이듯 말했고, 그의 에스퍼는 분명 그의 목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이승우의 걸음은 여전히 일정했다. 자신이 할 일은 오로지 그것 하나뿐이라는 듯이.
여전히 그들은 하나의 길에서 걷고 있다. 이윽고 이승우가 대답했다.
“저는 어디로든 갈 수 있잖아요.”
이 순간 우리는 분명 함께인데, 이승우의 목소리는 너무나 쓸쓸하고 서글퍼서 듣는 이의 마음을 뭉개는 것만 같았다.
문득 승우는 이 길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영영 함께 걸어가기만을 「바라고」 있을지 모른다고.
*
오래간만에 푹 잔 것 같다.
개운한 기분으로 일어나 휴대 전화를 확인했더니, 평소보다 출근 시각이 늦어 있었다. 사실 지나치게 빨리 출근하는 감이 없잖아 있었으므로 오히려 일반적인 출근 시각보다 이른 편이다. S급 게이트를 하나 해치운 형편이었으니 이 정도 늦장은 부려도 괜찮을 것이다. 머릿속으로 봐야 할 업무를 계산하면서 그는 빠르게 출근 준비를 마쳤다.
오늘은 어제 클리어했던 S급 게이트 관련 내근 업무를 봐야 했다. 오전 중으로 대강 급한 건만 끝내고, 오후에는 함께 게이트에 들어갔던 팀원들을 내내 가이딩을 하고 나면 얼추 이번 S급 게이트 건을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다.
상급 에스퍼 넷은 담당 가이드가 있으니 따로 가이딩을 받았을 것이고……. 혹시 모르니 센터 앱으로 그 녀석들이 가이딩 받은 일자를 확인해 두자.
어제 누가 능력을 많이 썼더라.
놀랍게도 이번 게이트는 인간형 몬스터가 나오는 게이트라, 차영헌의 활약이 가장 두드러졌다. 하지만 그 녀석이 자신의 능력을 잘 조절할 수 있었을까? 충분히 연습을 마쳤다지만, 실전에서도 힘 조절을 잘 해냈을지 걱정이었다. 흥분하면 능력을 과도하게 쓰는 녀석들이 더러 있었다. 하지만 어제 게이트가 끝난 뒤 차영헌이 어떤 상태였는지 떠올려 보려 해도 잘 떠오르지가 않았다.
‘……바로 귀가해서 그런가.’
차영헌뿐만 아니라 다른 에스퍼들의 상태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하면 어쩌나.
그런 생각을 하며 센터로 출근했다. 사무실이 있는 5층에 들어선 그는, 사무실 문 앞에 직원들이 몹시 조심스럽게 누군가를 빙 둘러 돌아가는 것을 봤다.
누군가 사무실 문 앞에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눈을 감은 채 가지런히 손을 배 위에 겹쳐 올리고 누워 있는……. 사람이 쓰러져 있는데 신고는 안 하고 다들 뭐 하는 거지?
몹시 당황한 장이주가 문 가까이로 간 순간, 그는 누워 있는 사람이 누군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차영헌 에스퍼? 여기에서 뭐 하고 있는 겁니까?”
가만히 눈을 감고 잠든 체하고 있던 녀석이 슬쩍 눈을 떠서 자신을 올려다본다. 장이주는 지금 이 상황이 너무 어이가 없어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물론, 걱정이 되기도 했다. 차영헌이 왜 사무실 앞 복도에 누워 있는지 이해되지 않았고, 설마 자신을 찾아왔다가 쓰러져 버린 건 아닐까 싶어 긴장됐다. 너무 놀라서 머리의 사고가 일시 정지된 느낌이라고나 할까.
“가이딩이 부족해서 기력이 달립니다.”
눈을 반쯤 뜬 채로 차영헌이 말했다.
“……센터 앱으로 예약을……. 아니, 그보다 일어날 수 없겠어요? 어디 아픈 겁니까? 왜 병원부터 가지 않고……?”
“팀장님께 가이딩을 받으려면 일주일 뒤에나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
그런데?
“저는 지금 받고 싶습니다.”
“…….”
아니, 그래서 지금…… 작정하고 여기 누워 있다는 소리야?
하긴, 가이딩은 ‘my’에 올라 있는 에스퍼들이 우선이었으니까. 일반적인 예약으로는 그쯤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차영헌은 그의 팀원이기도 했고, S급 게이트에서 능력을 많이 썼을 테니 오늘 가이딩을 해 주려 했었다. 굳이 이렇게 떼쓰지 않아도 가이딩을 해 줄 생각이었단 말이다.
황당한 얼굴로 내려다보자, 차영헌은 눈을 끔뻑거리며 도리어 자신을 빤히 바라본다……. 그때, 주변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수군거리는 소리도 함께였다.
‘팀장님 에스퍼인가 봐…….’
‘그런데 왜 저기 누워 있대?’
‘모르지…….’
황당함, 걱정, 당황스러움이 수치심으로 서서히 변모했다.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차영헌 에스퍼, 당장 일어나세요.”
“가이딩해 주실 겁니까?”
이 자식이!
안 해 준다고 하면 죽어도 안 일어날 기세다. 눈앞이 아찔했다.
“……해 줄 테니까 시위는 그만하고, 일단…… 따라오세요.”
빠르게 짐을 사무실 안에 넣어 두고 가이딩실로 가려는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뒤를 돌아보았다.
차영헌이 누운 채로 몸을 뒤집더니, 배밀이로 꿈틀거리며 자신을 따라오고 있었다…….
“일어나서 따라와!”
그는 처음으로 쪽팔려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