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콜 가이드-121화 (120/132)

#121

차영헌은 말로 못 할 정도로 아주 느릿느릿 일어났다.

물론, 그는 더 이상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될 생각이 없었다. 자신의 에스퍼는 아니지만, 팀원이 침대도 아니고 맨바닥을 뒹굴고 있는데 그 꼴을 어떻게 더 참고 보겠는가?

장이주는 차영헌에게 다가가 그를 강제로 일으켜 세운 다음, 그의 손목을 쥐고 가이딩실까지 거침없이 걸어갔다. 그리고 그 안으로 차영헌을 밀어 넣은 뒤 쾅 하고 문을 닫았다.

“왜 이러는 겁니까?”

그렇게 쏘아붙이듯 말했지만, 차영헌은 하라는 설명은 하지 않고 눈을 굴렸다. 순순히 따라온 것과 달리 입을 딱 다물고 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말 가이딩 때문이에요?”

이 짧은 침묵의 시간이 몹시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는 남은 손으로 거칠게 넥타이를 풀며 움켜쥔 손목을 던지듯이 놓았다.

“차영헌 에스퍼, 몸이 크게 좋지 않은 거라면 제대로 말하세요. 몸이 안 좋은 건 가이딩 때문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지금 차영헌 에스퍼는 자신의 정확한 상태를 알고 있습니까?”

“예.”

놀랍게도 차영헌은 당당하게 대답했다. 이 뻔뻔함에 잠깐 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정말 어디가 많이 아픈 건가? 그렇다면 왜 가장 먼저 자신에게 왔단 말인가. 설마, 팀장에게 보고가 먼저라고 생각했던 건가?

그렇게 융통성이 없는 녀석 같지는 않았는데……. 거기까지 생각하던 장이주가 미간을 좁혔다. 언제부터 이 녀석을 봤다고 ‘융통성 없는 녀석은 아닐 것’이라느니, ‘뻔뻔하다’느니 생각하게 된 걸까? 꼭 예전부터 이 녀석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요즈음 자주 드는 생각이라, 약간 회의감이 들었다.

‘……또 넘겨짚고 있군.’

뭐든지 아는 것처럼 구는 중년의 꼰대 팀장은 참 꼴불견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지금 자신의 모습과 그런 꼰대가 뭐가 다를까 싶었다.

정신 차리고, 일단 눈에 보이는 것만 보자.

차영헌은 신입 에스퍼였고, 신입답지 않게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여 주고 있는 녀석이었다. 성장에는 그만큼 리스크가 따른다. 이제 갓 신입이 된 녀석이 S급 게이트에서 톡톡한 활약상을 보였으니 그만큼 가이딩이 필요하다는 건 이해가 됐다. 다만 그게 대뜸 팀장을 찾아와 사무실 문 앞에 누워 있을 만큼 대단한 갈증이었느냔 말이다.

척 보기에도 차영헌의 신체 어딘가가 불편해 보이지는 않으니, 그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경우는 딱 하나다.

‘폭주…….’

지난번에 확인한 바로는 폭주와는 거리가 먼 상태였지만, 그래도 확인은 해 보자 싶어 센터 애플리케이션을 켰다. 게이트에서 나오자마자 바디 체크를 받았을 테니 지금 상태가 업데이트되어 있을 것이다.

“흠.”

하지만 센터 앱에서 확인한 차영헌은 폭주 위험은커녕 폭주 근처에도 가지 않은 상태였다. 컨디션 난조가 올 정도로 가이딩이 부족한 상태인 건 맞지만, 막 쓰러질 정도는 아닌데.

“잠깐 이리 와 볼래요?”

휴대 전화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손을 내밀었는데, 곧장 손이 잡혔다. 마치 자신을 주시하며 대기하고 있던 사람 같았다.

번뜩 고개를 들자, 기다렸다는 듯 눈이 마주친다.

으레 가이딩에 욕심이 생긴 에스퍼들이 그렇듯, 차영헌은 조바심을 내며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멀쩡한 거 맞네.’

장이주의 미간에 금이 갔다. 그럼에도, 만에 하나, 정말, 혹시나 싶어 가이딩을 흘려 넣었다. 차영헌이 가느다란 한숨을 내쉰다. 참을성 없는 자식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역시는 역시였다. 센터 앱에서 봤던 상태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체내 상태가 느껴진다.

“차영헌 에스퍼……. 쓰러질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요.”

음산한 어조로 중얼거리자, 차영헌이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대답한다.

“예.”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아주 뻔뻔한 대답이었다.

“그러면 왜 거기 누워 있었습니까?”

황당함을 금치 못하고 묻자, 생각지 못한 변명이 튀어나왔다.

“제가 이상하게 굴면 신경 써 주시길래 그렇게 했습니다.”

“……뭐라고?”

누군가 뒤통수를 친 것 같다. 멍해진 얼굴로 그를 쳐다보자, 조금도 주눅 들지 않은 얼굴이 그를 마주 봐 온다.

이상하게 굴면…… 신경을 써 주었다고?

그래, 그랬다. 아니,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가이드라면 당연히. 에스퍼가 센터 1층 카페테리아에서 로켓처럼 창문을 부수고 돌진한다면, 당연히 가이딩을 해 주었을 거다. 그건 명백한 폭주 증상이었으니까. 그게 센터 건물을 다 때려 부수려고 작정한 테러리스트의 생각이었는지 아니면 단순한 우연인지는 알 바 아니었다.

가이딩을 할 수 있으니까, 그러면 폭주로 인해 괴로워하는 에스퍼를 구할 수 있으니까 해 주었던 거지.

“저번에도 그러셨잖습니까.”

“…….”

“말 한마디 없이 그냥 사람을 만지시고. 저는 그때 키스하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는데 말입니다.”

차영헌이 입꼬리를 쓱 올려 웃는다.

순간 그는 긴 이명을 들었다. 귓속으로 벌 떼가 날아오르는 것 같았다. 그제야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걸 자각했다. 그래, 차영헌은 그런 적이 없다. 그러니까 그건…… 차영헌이 아니라 다른 녀석이었던가?

잠깐 동안 선명하게 떠올랐던 기억은 마치 실마리처럼 남아 있었다. 잠깐 다른 생각을 하면 순식간에 잊어버릴 꿈속의 기억처럼 말이다.

그나저나 차영헌이 뭐라고 지껄인 거지. 만졌다, 라…….

“하마터면 허락인 줄 알았지 뭡니까.”

차영헌이 말하는 건, 지난번 가이딩 때 있었던 일인 모양이다. 차영헌과의 가이딩은 처음이었고, 혹시라도 그가 특별히 자신과 가이딩이 너무 맞지 않아 가이딩 알러지 증상을 보이는 줄 알고 그의 몸에 손을 댔다. 간혹 특정 가이드의 가이딩이 너무 안 맞는 나머지, 알러지 증상을 보이는 에스퍼가 있었으니까.

‘그래서 이번에도 어그로를 끌었다, 이건가?’

팀장이라면 누구나 팀원의 안전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때의 조치를, 허락이니 뭐니 말하는 건 좀 도리에 어긋나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입술을 쳐다보는 시선이 아주 노골적이다. 마치 키스라도 할 듯 차영헌의 얼굴이 어느새 가까이 와 있었다.

그는 헛웃음을 지으며 차영헌의 이마를 밀었다.

“점막 가이딩은 나중에 가이드랑 사귀게 되면 해 보세요.”

그 말에 차영헌은 잠시 말이 없었다.

이 단호한 거절에, 차영헌은 불만스러운 것 같았지만 일단은 입을 다물었다. 장이주가 가이딩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차영헌을 가이딩할 때는 조용한 편이 좋다. 그에게 하는 가이딩은 까다로운 편이라 집중력이 필요했다. 차영헌도 가이딩이 되는 느낌이 마음에 들었는지 부드럽게 풀린 표정으로 그들의 맞잡은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기를 한참.

갑자기 차영헌이 물었다.

“팀장님이랑 사귈 수 있습니까?”

“음…….”

참 선명하고 솔직하다. 차영헌의 멋없는 고백에 대한 감상은 그러했다.

물론, 그는 새파랗게 어린 애송이 녀석과 연애씩이나 할 생각 같은 건 없었다. 그는 다분히 형식적인 거절의 말을 읊었다.

“나는 애인이 있어서 곤란하겠는데.”

비록 그날 이후로 연락 두절이고, 이게 잠수 이별인가 싶을 정도로 아무런 기척이 없는 애인이지만……. 우선 헤어지자고 말한 적은 없었으니까 굳이 말하자면 자신은 아직 ‘애인이 있는’ 상태였다.

“……애인이 있으십니까?”

그 말에 이상 반응을 보인 건 차영헌이었다.

그러니까…… 그 표정은 단순히 ‘놀랐다’고 정의 내릴 수 있는 표정이 아니었다. 마치 있을 수 없는 일을 목격한 사람의 얼굴에 가까웠다.

아주 이상한 것을 보기라도 한 듯한 표정. 충격을 받은 것과 가까운…….

하지만 그 표정은 금세 씻은 듯이 사라졌다. 차영헌은 곧바로 다른 것을 물어보았다.

“그때 팀장님을 바람맞혔던 그 사람입니까?”

그랬다. 하지만 굳이 대답을 해 줄 필요는 없겠다 싶어 입을 닫았다. 물론, 차영헌은 대답 없이도 그 사람이 ‘애인’이었다는 사실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왜 그런 사람과 사귀십니까.”

집요하기도 하지.

“글쎄요.”

나도 잘 모르겠다……. 어쩌다 사귀게 되었는지.

자신은 ‘애인’을 자주 만드는 편이 아니었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과 연애를 시작하는 경우는 아예 없었다. 그런데 이런 애인이 생기다니, 방종한 인간처럼 보일지도 몰랐다.

그냥 적당히 거짓말을 했어야 했나…….

이 ‘글쎄요’에는 그런 식의 태도가 묻어 있었다. 차영헌이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그런 사람도 괜찮으신 겁니까?”

“흠.”

글쎄, 오히려 좋은 것 같기도 하고. 귀찮게 안 한다는 면에서 아주 훌륭한 애인이 아닌가. 물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게 특이사항이기는 하지만…….

여하간 이런 태도에서 애인을 각별하게 여기고 있지 않다는 점이 읽힌 모양이었다. 잘만 가이딩을 받고 있던 녀석이 난데없이 그에게 몸을 숙인 채, 자기 어필을 시작한 것을 보면 말이다.

“저랑 사귀면…… 저는 정말 잘해 드릴 겁니다.”

“…….”

“정말로요. 매일 아침마다 센터에서 집까지 데려다주고, 퇴근하실 때 맞춰서 또 데려다 드리고…….”

로 시작되는 자신의 장점에 대해 끊임없이 나열하는데, 그만하라고 해도 그만두지 않았다. 다정하고 깨끗한, 그야말로 모범적인 연인이 할 법한 행적과 배려에 대하여 줄줄 이야기했다. 자신은 그 모든 것들을 잘 완수할 수 있다는 듯이.

‘생긴 것만 보면 담배 피다 말고 너저분하게 키스할 것 같은 녀석이.’

딱 이렇게 껄렁거리는 녀석을 하나 알았다. 얼굴은 놀라울 정도로 화려하게 생겨서, 세상에 그런 양아치를 못 봤다. 그 녀석 이름이…… 흠, 뭐였더라. 워낙 오래전인지, 아니면 한 번 가이딩을 해 주고 만 녀석이라 그런 건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 녀석에 비해 차영헌은 그나마 단정한 생김새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세상만사가 따분하다고 말하는 듯한 고양잇과의 얼굴이었다. 가늘게 쭉 찢어진 눈이나 웃을 때 살짝 비틀리는 입술 끝 같은, 호락호락하지 않은 인상이 그를 위험한 녀석처럼 보이게 했다.

그래, 사실 귀여운 면이 없진 않았다.

웃을 때마다 한쪽 뺨에만 패이는 볼우물이나, 삐죽 튀어나오는 송곳니 같은 게 그랬다. 어린 티가 난다는 뜻이다. 아니면 제 성질을 있는 대로 죽이고 있는 거거나.

그렇게 생각하자, 완고했던 마음이 조금 누그러진다.

“무슨 그런 말을 함부로 합니까.”

혀를 차며 잔소리하듯 말하자, 상당히 어이없다는 시선이 이쪽에 와 닿는다. 이쪽은 가벼운 사람과 연애하는 것 같은데, 왜 자신에게 그런 소리를 하느냔 얼굴이다.

“뭐 나야 그렇게 사람을 만날 수도 있지만……. 차영헌 에스퍼는 어리기도 하니까, 또래의 좋은 사람과 진지한 연애를 하는 편이 좋겠지요.”

그 말에 차영헌이 입을 벌렸다가 도로 다문다. 뭔가 생각하는 듯 살짝 찌푸린 눈썹 사이로 장이주를 바라본다.

대단히 형식적인 소리였다는 건 알지만, 그건 형식적인 대답을 기대해서이기도 했다. 그런데 재깍 대답이 나오지 않는 게 약간 거슬렸다.

“어릴수록 경험해 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

“…….”

“그런데…… 제가 그렇게 어린 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저도 진지한 연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열 살쯤 어린 녀석이랑 제정신으로 연애를 할 수 있겠냐고. 그런 것쯤 아무렇지도 않다는 기세에 눌려 입을 다물고는 있었지만……. 눈치 빠른 녀석이니 말하지 않아도 자신의 대답을 유추해 낼 수 있겠지.

“정말입니다.”

아니,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라…… 꽤 열받아 보인다. 이를 꾹 깨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장이주보다 한참 늦게 태어난 게 어지간히 억울한 모양이다.

‘설마 어른스러워 보이려고 일부러 딱딱한 말투를 고수하는 건 아니겠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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