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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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로 차영헌의 태도는 눈에 띄게 바뀌었다. 이전과는 달리 친근하게 구는 빈도수가 몹시 늘었다. 신입 에스퍼답지 않게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나드는 능수능란한 면모를 보이며 적극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걸 ‘친해졌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몇 단계나 되는 과정을 겅중겅중 건너뛴 것 같은 느낌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욱 정확할 것이다. 시간만이 알려 줄 수 있는 개인의 친근감에 대해서 차영헌은 지나치게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키 크시려고 그런 것 아닙니까?”
요즈음 꿈자리가 뒤숭숭하다는 이야기를 꺼냈을 때였다. 그의 말을 심각하게 듣던 시늉을 하던 차영헌이 이치에 맞지 않는 소리를 했다.
“……눈이 달렸다면 내 성장기가 한참 지났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을 텐데요?”
가끔 이런 식으로 꽤 열이 받는 농담을 던지기도 할 정도였으니, 솔직히 그는 내심 이 신입 녀석에게 얕잡혀 보인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아하.”
……아하?
녀석은 말끝을 늘리며 씨익 웃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차영헌의 키는 장이주보다 훨씬 컸다. 여기에서 말하는 ‘훨씬’이란, 둘 중 하나가 올려다보아야 하는 차이라는 뜻이다. 사실 그보다 몸집이 큰 에스퍼야 얼마든지 있었지만, 이렇게 까부는 녀석을 올려다봐야 한다는 건 꽤 심기를 상하게 했다.
‘제가 잘못 봤네요.’ 따위로 중얼거리는 웃음기 섞인 변명을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그는 냉정해진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당분간 거리를 좀 둬야지 싶었다. 그래야 기어오르는 걸 멈출 테니까. 어쩌면 연속된 거절에 오기가 생긴 걸지도 모르고.
물론, 그건 자신이 알 바가 아니었다.
신입 에스퍼와 어울리는 건 나중으로 미루어도 될 것이다……. 그에게는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이 남아 있었으니까.
그 이후로는 일부러 차영헌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한 며칠은 냉담했다. 어디를 가나 따라오는 것처럼 등 뒤에 서 있는 녀석을 모르는 척하는 건 밥 먹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눈치가 빠른 녀석인지,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하는 것만으로도 쉽게 말을 붙이지 않았다. 대신 은근슬쩍 남의 안색을 살펴댔다.
“병아리가 뭐 잘못했어요?”
“아니. 왜?”
시뮬레이션 기기를 만지다 무심코 대답한 탓에 짧은 말이 튀어나갔다. 하지만 그와 오랫동안 팀을 이루어 온 에스퍼들 대부분은 자신의 격의 없는 말투를 무척 좋아했다. 가볍게 흘리듯 물어보고 지나갈 생각이었던 게 분명했던 녀석이, 다른 쪽으로 향하려던 발걸음을 다시 이쪽으로 돌려놓은 걸 보면 말이다.
“팀장님 눈치 보는 것 같은데. 아니에요?”
따뜻한 커피를 손가락으로 슬쩍 밀며 흥미로운 듯 말을 붙인다.
“별로.”
커피를 받아서 한 모금 마시자, 향긋한 향이 콧속으로 퍼졌다.
일종의 ‘거리 두기’는 꽤 효과가 있었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애인이 별 볼 일 없는 놈이란 걸 파악하자마자 전차처럼 달려드는 녀석을 저지시키는 데 충분한 효과를 발휘했다는 뜻이었다.
그동안 이 녀석이 어찌나 꼬치꼬치 캐물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애인에 대해 날파리 쫓듯 하나씩 대꾸해 주다 보니, ‘남자’이고 ‘에스퍼’라는 걸 확인하면서 차영헌은 치근대는 단계를 높여 갔다.
그런 녀석이 성가시지 않을 리가 없다. 가이딩을 안 해 주면 일단 드러눕고 보는 녀석이었으나, 가이딩을 제때 해 준다고 해서 치근대지 않는 것은 또 아니었다. 만난 지 몇 달 되지도 않았는데 몇 년은 알고 지낸 것처럼 구는 녀석을 다루기가 쉽지 않았다.
‘……실제로 넘어가서 몇 번 이름을 부르기도 했고.’
이름이 유독 입에 달라붙는 타입인 건가?
“됐고, 오 분 뒤에 시뮬레이션 시작할 테니 자리 지키세요.”
다음 S급 게이트는 넉 달 뒤였다. 그 중간 기간에 게이트 두 개를 더 처리하기로 했다. 게이트에 익숙한 상급 에스퍼들만 골라서 짧은 시간 안에 끝내면 효율적일 터였다. 당연히, 차영헌은 제외였다.
“또요? 이번에 하면 네 번째인데요, 팀장니임…….”
질렸다는 듯 팀원이 중얼거린다. 시간이 되는 놈은 가능한 한 계속해서, 일정이 있어서 중간에 들어왔다가 나가는 놈은 되는 대로 참여하는 방식이었다. 그런 식으로 오전부터 줄기차게 시뮬레이션만 돌리고 있는 참이었다.
불행히도 이 녀석은 오전부터 나와 있었다. 물론, 방금은 점심시간이라는 핑계로 나갔다가 한참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슬그머니 커피를 사 들고 오는 폼이 한참 밖에서 노닥거리다가 들어온 모양이었다.
“팀장님, 정말 강철 체력이십니다…….”
녀석이 툴툴거린다.
“병아리, 너도 조금 있으면 이렇게 해야 돼. 어? 하루 종일 시뮬레이션만 돌리면서, 붙박이로 아주 그냥…….”
글쎄, 이건 체력의 문제는 아니다. 끈기의 문제지.
“차영헌 에스퍼는 불평 안 합니다.”
“예에…….”
선임 사수의 손짓에 가까이 다가온 차영헌이 눈썹을 쓱 올린다. 뜻밖의 말이라도 들었다는 얼굴이다. 하지만 말이야 바른 말로, 차영헌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것보다는 자발적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리는 드문 녀석이다.
“안녕하십니까.”
가벼운 인사였다. 이번에도 무시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장이주는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시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아 주었다.
시뮬레이션이 안 된다.
이랬던 적이 없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밖으로 나왔다. 시뮬레이션 기기를 살펴보자, 아예 접속 자체가 끊어져 있는 듯 말을 듣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고 몇 번 버튼을 눌러보던 그가 눈썹을 찌푸리자, 그의 곁에 다가온 에스퍼들은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봤다. 물론, 상당히 기쁜 내색을 금치 못하는 게 훤히 보였다.
“전기를 너무 많이 끌어 써서 다운이 된 거 아닐까요?”
꽤 설득력 있는 소리였다.
하긴…… 오늘 아침부터 쉬는 시간 없이 사용하긴 했으니까. 가끔 이런 일이 생길 수도 있는 거지.
그가 흠,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방을 바꿔서 해 봅시다. 지금 예약이 되나?”
인폼에 내려가 문의해 본 결과, 그들은 새로운 방을 예약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도대체 뭐가 문제입니까?”
수리 기사 두 명이 올라와서 시뮬레이션 기기를 만지작대더니, 몹시 당황한 채로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 문제가 없는데…… 이상하게 전원이 안 들어오네요. 이게 왜 이러지……?”
“저희도 이런 건 처음 봐요. 무슨, 중간에 전기가 끊어진 것처럼…….”
……끊어져?
그는 ‘끊어졌다’는 말에 저도 모르게 차영헌을 찾았다. 그러나 분명 아까까지 이 방 안에 있었던 차영헌은 어디를 갔는지 자취를 감춘 채였다.
자신을 무시한 대가로 심술을 부린 걸까? 하지만 그는 오늘, 차영헌의 인사를 받아 주었다. 그렇다면 왜 지금 와서 이런 짓을 한 걸까. 증거가 없으니 왜 그랬냐고 물어볼 수는 없겠지만…….
그보다.
‘……이런 것도 자를 수 있는 거였나?’
차영헌의 특기는 암살이다. 칼의 능력을 사용하여 무엇이든 잘라 낼 수 있는 그는 그야말로 살아 있는 생명체라면 응당 두려워해야 할 능력을 가졌다. 그런 그가 방에 흐르는 전류를 끊을 수도 있을 줄이야. 저 능력의 개화는 어디까지인 건가?
“언제부터 기기 사용이 가능할지는 아직 알 수 없대요. 일시적인 현상일 확률이 높다고 해요. 음, 이번 게이트는 그렇다 쳐도, 다음 게이트부터는……. 시간을 좀 두셔야겠는데요.”
팀원 중 하나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야, 시뮬레이션을 돌릴 수 없으니 당연했다. 아무리 쉬운 게이트여도 한 번 이상 시뮬레이션을 돌리지 않으면 들어가지 않는 게 규칙이었다. 그는 이 규칙을 한 번도 어긴 적 없었다.
그의 FM적 태도를 아는 이들은 당분간 ‘휴가’를 가지시게 된 걸 축하드린다며 입을 모았다. 그걸 차영헌도 알고 있었을까? 아니면, 자신을 빼고 다른 팀원들과 함께 게이트에 가는 것에 단순한 질투를 느꼈던 걸까?
그날, 그는 상당히 일찍 퇴근했다. 당장 들어갈 게이트가 하나뿐인데, 그건 이미 서류 업무를 마쳐 두었으니 일할 것도 없었다.
퇴근 전에 차영헌을 여기저기 찾아봤지만, 팀원들은 그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늘 따라다니던 녀석이 없어졌기 때문에 오는 어색함이라기엔 어딘지 묘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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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 묘한 느낌.
그는 울렁이는 속을 가라앉히며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제 이 꿈속 세상이 익숙해졌음은 두말할 필요 없는 사실이다.
이승우의 등에 업힌 채, 그는 약간의 염증을 느꼈다. 현실에서의 자신은 분명 기시감을 느끼고 있었고, 심지어 차영헌은 어떤 깨달음까지 있는 것 같았는데(그게 아니라면 오늘 그가 자신에게 보여 주었던 태도를 설명할 수 없다. 친한 척을 하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일을 더 못 하도록 훼방을 놓다니. 물론 현실이 아니니까 무소용한 노력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이곳이 원래 세계가 아니라는 걸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꿈속에서 이승우를 봐야만 한시바삐 탈출해야 한다는 걸 깨닫는 처지라니.
“승우 군.”
이번에 그는 이승우에게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이승우 역시 웃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딘지 약간 경직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그는 무엇을 질문해야 할까 고민했다. 만약 이승우가 이세계로 오게 된 대가로 제약이 걸려 있다면, 그래서 꿈에서 오래 말을 할 수 없다면, 그럼에도 그에게 힌트를 주고자 그를 업고 계속해서 걷는 꿈을 꾸고 있다면…… 적어도 꿈에서 깨어났을 때 이곳이 게이트 속인 걸 알 수 있을 만한 무언가를 얻어야 하지 않겠는가?
한동안 미간을 찌푸린 채 말이 없던 그가 불쑥 물었다.
“이 길은 언제 끝납니까.”
당연히 대답이 돌아오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돌아온 건 영 생뚱맞은 질문이었다.
“현실로 돌아가고 싶으세요?”
“그야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대답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그의 기대와는 달랐다. 아주 침착한 목소리가, 전혀 침착하지 않은 내용을 담고 들려왔다.
“이곳에는 교수님이 원하는 전부가 있어요.”
그런 말을, 갑자기 왜……?
“그래도 돌아가고 싶으세요?”
그는 눈썹을 찡그렸고 이승우의 동그란 머리통을 내려다보았다.
이승우의 말이…… 아주 틀리지는 않았다.
그는 ‘고은교’보다는 ‘장이주’로 살고 싶었고, 고은교의 과거 행실로 인한 불이익에 지긋지긋한 마음을 품었다. 게다가 불치병으로 인해 고통받지 않는 장이주의 몸은 더 이상 바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자신의 몸이었으니, 쓸데없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을 필요도 없었다.
이곳이 게이트 안이 아니라 정말로 새로운 세계였다면, 자신은 이승우의 말처럼 이곳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정말 그럴까?
그는 생각했다…….
“그래요.”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가고 싶다는 결론을 내렸다.
돌아가야만 했다, 왜냐하면…….
철벅, 하는 소리가 났다. 그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발소리가 달라졌다…… 지금 이승우는 그들이 이제껏 가지 않았던 새로운 길로 가고 있었다.
아니, 그건 길이 아니었다. 얕은 물가를 따라 걷는 듯한 소리가 났다. 이승우는 계속해서 물이 있는 곳으로 걷고 있었다.
여전히 주위는 어두컴컴했지만, 어쩐지 지금이라면 물 위에 비친 이승우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이승우가 손을 놓았다.
그는 눈을 크게 떴다. 동시에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물속으로 빠졌다. 얕은 줄 알았던 물속은 전혀 얕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승우는 물 위를 걷고 있었던 셈이다. 자신은 그런 재주가 없으니, 떨어지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호수는 파문을 남기고 그를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