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다행히 이승우와 우시현의 등급이 높은 것이 호재가 되었다. 약간의 제약만 받으면, 남선재의 능력에 잡아먹히지 않고 자아를 유지한 채 그 세계 속에 침투할 수 있었다. 이승우는 바람 능력자였으니 그가 운반을 맡고, 우시현은 물 능력자였으니 조금 더 제약을 걸고 자신의 능력을 강화시켜 고은교를 깨우는 역할을 맡았다.
“나는 왜 물귀신이냐?”
투덜투덜거리는 소리를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주어진 역할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고은교의 무의식, 더 무의식으로 파고들었다. 그 모든 일은 순조롭게 이루어져 이승우는 고은교의 꿈속에서 눈을 뜰 수 있었다.
그는 천천히 주위를 살폈다.
검은 안개가 펼쳐져 있고 하나의 길이 곧게 늘어져 있는 몽환적인 풍경이었다. 그 너머는 아무리 눈을 가늘게 떠도 보이지 않았다. 직감적으로 무언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게 뭔지는 평생 알 수 없을 것이다. 그에게 허락된 길은 단 하나뿐이라는 사실이 중요했다.
길은 단단하고 잡초나 돌멩이 하나 없었다. 매끈하게 이어진 길을 따라 걷자, 어슴푸레한 형체가 눈에 띄었다. 길의 초입부였다.
그곳에 누군가 누워 있었다.
그의 눈을 간지럽히던 익숙한 남자가 아닌, 낯선 남자였다.
“…….”
이승우는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 남자가 누구인지 안다. 실제로 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TV에서 한 번 본 적 있다.
장이주 팀장.
전반적으로 단정한 얼굴이다. 혈색 없고 창백한 살갗에 살짝 휘어져 있는 눈꼬리와 곧게 뻗은 코를 가진 남자였다. 눈을 뜨고 있으면 감히 말 붙이지 못할 정도로 차갑고 단단한 분위기를 풍길 것이다.
문득 그는 고은교의 몸에 들어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이라는 걸 최초로 인지했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 이승우는 확신했다.
‘게이트 밖에서 저를 기다리고 계셨잖아요.’
이건 고은교가 아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이승우는 고은교를 껴안고 가만히 생각했다. 그때 그는 국장과 한 계약의 막바지를 달리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편의를 봐주는 대신, 자잘한 게이트를 처리해 주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왜일까. 왜 고은교는 경기를 일으킬 만큼 싫어하는 게이트 근처까지 왔을까.
자신의 농담에 웃어 주는 고은교. 게이트까지 데리러 온 고은교가 누구인지 궁금해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는 할 수 있는 한 고은교의 곁에 딱 붙어서 정보를 최대한 수집했다. 그리고 그가 고은교가 아니라는 증거를 수도 없이 찾아냈다.
‘아, 복숭아 못 드셨죠.’
‘맞습니다.’
무신경한 얼굴로 집어드는 게 피칸파이라니. 웃기지도 않는다. 땅콩 알레르기가 있는 건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고은교가 시시때때로 우시현의 옆을 차지하고 앉아 밥 먹는 걸 구경하거나 수많은 디저트 선물을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알게 되는 정보가 꽤 있었다. 기억력이 너무 좋아 그런 자질구레한 것들을 기억하고 있는 게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이야.
사소하게는 입맛부터 알레르기까지 모두 달라졌다. 아예 사람이 바뀐 것처럼 말이다. 순진하게도 이 가짜는 본래 ‘고은교’도 그런 줄 알고 있는 모양이지만, 불행히도 이승우는 고은교가 우시현을 몹시 따라다니던 시간의 일부를 공유한 사람이었다. 말투나 성격, 행동은 일종의 교정으로 바뀔 수 있다 하더라도 이런 것까지 바뀌는 건 불가능하지 않나.
최대한 정보를 수집한 그는, 이번에는 이 정보에 부합하는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말투는 꽤 나이 들어 보이니 30대부터 50대 사이로, 성별은 남자로. 게이트에 집착 증세를 보이는 것으로 봤을 때, 현장 이능력자 중에서 가이드, 워커홀릭으로.
그래, 고은교가 이상해지던 시점에서 죽은 건 딱 한 명밖에 없었다. 이 허무맹랑한 결과를 두고 이승우는 웃고 말았다. 이게 무슨 오컬트물에나 볼 법한 비현실적인 이야기란 말인가.
그러나 그때부터 자기도 모르게 ‘몸도 약하신 분이’라고 중얼거리며 그를 더욱 보살피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제주도 호텔 뒤 절벽에서 떨어질 뻔했을 때, 그는 심장이 튀어 오르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사랑은 모르는 사이 빠지게 되는 것이라고 했던가? 이승우는 사랑을 떠나, 운명적으로 그가 돌아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 때문에.
‘먼저 저를 구해 준 건 교수님이에요.’
구원이란 건 그렇게 찾아왔다.
진짜 고은교가 돌아오면 떠나야 한다는 말을 들으며, 이승우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초조함에 휩싸였다. 장이주의 몸으로 돌아간다 한들 그 몸을 쓸 수는 없을 것이다. 이미 화장해서 사라졌으니까.
그러면 어디를 간다는 걸까. 두 번 다시 못 보는 곳으로 떠난다는 말일까?
그는 손을 내밀어 장이주의 몸을 들어 안았다. 그런 뒤, 우시현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은교-장이주가 눈을 떴다. 아주 오래간만에 그 눈과 마주치는 것 같았다. 이승우는 어쩐지 목이 메어와 그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누구?”
그리고 새로운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
상처를 받았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는 아예 자신을 잊어버린 눈치였다. 비록 현실에서는 자신을 잊을지라도, 꿈속에서는 기억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게 아니면 진작 정신을 차리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거나.
하지만 이건 상상과는 달랐다. 뭔가 잘못됐어. 이승우는 생각했다.
“누굽니까? 누군데, 지금…….”
이번에도 남선재의 추측은 틀렸다. 이곳은 고은교의 염원이 이루어지는 세계가 아니었다. 아니, 고은교‘만’의 염원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고 해야겠다.
그가 모든 걸 잊어버린 건 누구의 염원일까. 평소 고은교는 바늘 틈조차 들어갈 구석 없이 차가워 보이는 남자지만, 타인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에스퍼들을 자의로 잊을 리가. 이건 고은교가 아니라 ‘차영헌’이라고 불렸던 에스퍼의 소행일 확률이 높았다.
이승우는 입술을 한 번 질끈 깨물고, 지금 벌어진 일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교수님, 교수님은 지금 게이트의 영향을 받아 현실과 꿈을 혼동하고 계세요. 지금 여긴 현실이 아니라 교수님의 의식 속이에요.”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는 자신의 말을 믿어 주지 않았다. 아웅다웅하던 실랑이조차 고은교가 잠에서 깨면 끝이 났다.
이승우는 깊게 낙심했다. 계획대로라면, 그는 첫날 고은교의 동의를 얻어 바로 우시현이 있는 곳으로 그를 운반해야 했다. 그런 다음, 고은교를 깨우려 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고은교가 사라지자, 이승우는 길 잃은 아이처럼 길 위에 가만히 서 있었다. 어차피 현실의 그가 다시 잠들어야 이 꿈속에 나타날 것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기다리는 것밖에 없었다.
그때, 그의 눈앞에 무언가 흐릿한 영상이 떠올랐다.
“……이건.”
그 영상은 점점 선명해지더니, 곧 이승우가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한 영상물의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이승우는 그 속에서 고은교가, 아니 장이주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볼 수 있었다.
장이주는 단 한 시간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한때, 고은교가 A급 게이트를 따내기 위해 애쓰던 일이 떠올랐다. 그는 단지 그게 A급 게이트라는 이유로 당시 증오하는 것에 가까웠던 우시현과 함께 게이트를 클리어하러 들어갔다.
이곳에서는 그렇게 동분서주하지 않아도 그를 위한 게이트가 줄지어 놓여 있었다. 자신감 있는 태도로 모든 일을 단계별로 처리하는 그를 보고 있자니, 정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그가 느끼는 행복의 일부분을 엿보는 느낌이다.
그럼 자신은 무엇인가. 그의 행복을 빼앗으러 온 악당인가?
“…….”
밤이 되자…… 그는 다시 이곳으로 왔다.
그는 어제 사라졌던 곳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길의 초입부에서 나타났다. 이승우는 고은교-장이주를 데리러 가기 위해 다시 길의 처음으로 돌아가야 했다.
심란한 속을 숨긴 채 이승우는 얌전히 눈을 감고 있는 장이주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 또다시 걷기 시작했다. 차라리 그가 잠들어 있을 때 이동을 마치고 싶었지만, 이곳에서는 그런 식으로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마치 게임 속 세상 같기도 했다. 미션은 품에 안긴 공주가 눈을 뜨기 전에 재빨리 이동하기. 공주가 눈을 뜨면 대부분 클리어는 불발된다. 공주가 계속 잠들어 있을 수 있도록 최대한 조용히 움직여야 했다.
이승우는 천천히 검은 안개 속을 헤치며 나아갔다. 긴장해서인지 속이 조금 울렁거리고 식은땀이 나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공주는, 아니 그는 금세 눈을 떴다.
“……누구?”
글쎄, 이 지난한 시간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이승우는 기계적으로 설명을 반복했고, 자신을 믿지 않는 장이주와 다투었다. 때로는 그와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어떤 날에는 대답하는 것이 괴로워 그냥 꿈인 척하고 있었더니, 그와 친해지기도 했다. 그때 장이주는 마치 자신을 이해해 주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어차피 그다음 날에는 그가 모든 것을 잊어버렸기에 시간이 갈수록 이승우는 점점 입을 다물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검은 안개 속에서 장이주를 안은 채 걷는 일에 익숙해졌다.
대부분의 루틴은 같았다. 장이주가 깨어나 그와 눈이 마주치면, 그는 자신이 누구냐고 물었다. 일관적으로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모습이 ‘장이주’의 인생에는 이승우가 끼어들 틈이 없다는 걸 알려 주는 것 같아 상처도 받고 화도 났지만 다섯 번 정도 반복하자 반응하지 않게 되었다. 뭐라고 하는 그를 무시하고 묵묵히 걷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그러자 당혹스러워하는 건 장이주가 되었다. 오히려 그쪽에서 자신을 내려놓으라 설득하기 시작했다.
‘빨리 가고 싶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장이주는 길 중간에서 더 이상 가지 않겠노라 선언했다. 그러고 나면 정말로 더는 갈 수 없었다.
고은교가, 장이주가 원하는 걸 그의 무의식 세계에서 거부할 수 있는 방법 같은 건 없다는 말이 정확하겠다. 누군가의 꿈속이라는 건 많은 걸 제약했다.
“누구?”
아, 정말 지긋지긋하다.
이승우는 자신을 올려다보며 묻는 멍한 눈동자를 내려다본다. 그는 왜 자신을 기억 못 하는 걸까. 벌써 아홉 번째였다. 그럼에도 이 순간에는 매번 심장이 울컥거리는 것 같다.
“저예요.”
“…….”
“저를 모르세요?”
홧김에 말하고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다. 어차피, 오늘도 그가 일찍 눈을 떴으니 미션 완수는 글렀다.
“……모르겠는데.”
그는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빌어먹을 안개뿐인데 뭘 그리 유심히 보는지 모르겠다. 그의 시선이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그제야 꽉 막혔던 속이 약간 풀리는 것 같다.
“나를 압니까?”
그 말에 이승우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 우울하게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며칠째 이곳에서 만났는데…… 저를 또 잊으셨네요.”
“…….”
투정 부리듯 하는 말에 장이주는 침묵했다.
“……혹시, 정신계 능력자입니까.”
정신계 능력자라니. 이승우는 헛웃음이 나오려는 걸 느꼈지만, 동시에 자신이 지금 뭘 하고 있나 싶어 입을 닫았다.
“에스퍼는 가이딩을 받은 지 너무 오래되면 자기도 모르게 매칭률이 잘 맞는 가이드를 찾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능력이 오용될 수도…….”
그냥 그러고만 있었는데도, 장이주는 저 혼자 결론을 내리며 뭐라고 떠들어댔다. 이승우는 그를 무시한 채 걷는 일에 집중했다.
그때, 그가 예고도 없이 손을 올려 이승우의 뺨을 만졌다.
“맞네. 가이딩 잘되네.”
너무 놀라 그대로 딱 굳었다. 홉뜨인 눈이 뭐가 우스운지 장이주는 살짝 입꼬리를 올려 웃고 있었다. 그러고는 양손으로 이승우의 뺨을 감싸 쥔 채 가이딩을 했다.
그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것 같았다.
“읍……!”
이승우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를 껴안은 채 입을 맞추었다.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그의 몸을 최대한 바싹 끌어당겼다. 고은교와는 달리 몸피가 있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가이딩이 되자, 원래 고은교가 바로 이 남자라는 사실이 피부 위를 거세게 두드려왔다. 모든 게 끝났어. 그는 뭐가 끝났는지도 몰랐으면서 그 생각만을 반복하며 품 안의 남자가 바르작대는 걸 무시하고 입술을 빨았다.
입술이 비벼지는 감각이 선명했다. 그는 정신없이 키스에 몰입했다. 마치 처음 가이딩한 날 같았다. 그가 저를 밀고 있음을 알았지만, 이 입맞춤이 너무 간절해서 도저히 입술을 뗄 수가 없었다.
“하, 하아. 왜 이러는 겁니까? 가이딩은 피부 접촉으로도 충분히 가능해요.”
한참의 키스 끝에 입술이 떨어지자, 그가 눈썹을 찡그리며 숨을 뱉어냈다. 더 이상 함부로 키스할 수 없게끔 두 손이 자신을 막고 있었다. 잔뜩 키스당해 젖어 있는 입술과 약간은 두려운 듯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 얼굴을 멍하니 응시하며 이승우는 생각했다.
강제로 하고 싶다.
어차피 기억 못 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