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콜 가이드-126화 (125/132)

#126

그 음험하고 위험한 기세를 이 남자는 충분히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이승우는 그가 자신을 걷어차 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거리를 벌려 두어야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걸 그가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손에서 힘을 빼도, 오히려 당황한 얼굴로 이승우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뭘 기다리고 있는 거지? 이승우는 생각했다. 당장 도망가지 않고서. 그가 일어나 사라지면 이승우는 그를 추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두 손을 늘어뜨린 채 그를 붙들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는 것만으로 고역이었으니.

자신의 아래에 깔려 있는 남자의 얼굴 위로 물 같은 것이 뚝 떨어진다.

이승우는 그것이 땀인 줄 알고 손등으로 제 이마를 훔쳤다. 그는 가파르게 헐떡이고 있었다. 먼 거리를 전력 질주한 것처럼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다.

그깟 키스 한 번으로 이렇게 되어 버렸다. 이 남자는 그걸 알아야 했다. 자신을 이렇게 만들 수 있는 건, 오로지 당신뿐이라는 걸 알아야…….

“……왜 울어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자신이 뜬눈으로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순간 눈물이 비 오듯 났다. 남자는 당황해서 자신의 얼굴 위로 후두둑 떨어지는 눈물을 닦다가, 그래서는 계속해서 제 얼굴을 닦아야 한다는 걸 뒤늦게 알고 이승우를 달래려 그의 얼굴에 손을 뻗는다.

접촉이 이어지자, 끊어졌던 가이딩이 다시 공급되었다. 이승우는 그의 손을 붙잡고 뺨을 비비며 말없이 흐느꼈다.

자신의 가이드는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고 말았는지 모를 것이다. 그를 잃을 뻔해서, 한동안 그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해서, 마음고생을 해서 따위의 이유로 진창으로 처박힌 마음 때문에 그랬다 한들 용서받을 수 없는 생각이었다.

자신을 현실로 인도할 에스퍼가 나약하고 비겁한 인간이라는 걸 그가 알게 된다면……. 현실보다 이 행복한 꿈을 선택하지 않을까. 자신이어도 그럴 것 같았다.

그가 잊어 주었으면 했다. 자신의 끔찍함에 대해. 용서는 바라지 않으니 차라리 잊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자신이 바라든 바라지 않든 그는 모든 걸 잊어버리고 말 테지만.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는 친절한 사람이라, 기꺼이 울음을 그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이승우는 그의 손에 뺨을 기댄 채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오늘은 제가 잘못했어요.”

“…….”

“내일 와 주세요. 내일……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요.”

감히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어서 잠자코 아래만 내려다보고 있자, 머리 위로 긴 한숨 소리가 들려온다.

“정신계 능력자 아닌 것 같은데. 아니죠?”

“…….”

이승우가 얕게 고개를 끄덕였다. 느릿느릿 흔들리는 뒷머리를 바라보며 장이주가 눈가를 좁히는 줄도 모르고.

“내가 그쪽을 또 잊었다는 건 무슨 소리예요.”

그가 다른 세계로 왔기 때문에, 게이트에 속아 기억까지 날아갔다는 이야기를 꺼내기에는 너무 늦었다. 이미 앞서서 왜 자기를 모르냐고, 우리가 며칠째 이곳에서 만나지 않았느냐고 이야기해 버렸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사정을 자세히 말해 볼까? 지금의 장이주라면 설득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대답할 궁리를 하며 눈을 굴릴 때였다.

“요즘 피곤했나…… 왜 이런 꿈을 꾸는 거지.”

이승우는 자신의 턱을 붙잡고 들어 올리는 손길에 눈을 깜빡였다. 장이주는 그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얼굴을 천천히 좌우로 돌리며 살폈다. 마치 이승우의 얼굴이 마음에 차는지 가늠해 보는 듯이.

“…….”

고심하듯 자신을 바라보는 장이주의 눈과 마주쳤다.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사이라도 된다는 겁니까?”

“…….”

그 말에 또 심장이 울컥하는 것 같다. 일그러지는 눈썹 위로 손가락이 살살 문질러 온다. 그 다정한 접촉에 그를 가만히 바라보자, 또 한 번 한숨소리가 들린다.

“애인 사이?”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지만, 그들이 애인 사이는 아니지 않은가. 마지막 남은 양심을 긁어모아 이승우가 머뭇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로 막장 설정은 아닌가 보군.’ 장이주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아마 그는 지금 이 상황 자체가 꿈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보통 사람은 꿈을 꾸어도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할 수 없다. 지금껏 장이주와 몇 번의 실랑이를 거쳤던가. 하지만 오늘은, 적어도 이곳이 ‘꿈’이라고 자각했다. 이승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렇다면 가능성이 있다. 꿈이라는 걸 자각할 수 있다면, 다음에는 자신을 기억할 수도…….

순간적으로 생각이 멈췄다.

어느새 장이주가 손을 뻗어 이승우의 손을 겹쳐 잡은 뒤, 흘러내린 셔츠 아래로 겹쳐 쥔 손을 밀어 넣고 있었다.

그건 명백한 의도를 담은 접촉이었다.

“아.”

손바닥 아래로 탄력 있는 살과 부드러운 살갗이 느껴진다. 순식간에 입안이 마르고 온몸의 감각이 치솟는다. 눈이 확 더워지는 것 같다.

“할 줄 알아요?”

깜빡했다는 듯 아, 하는 소리를 낸 장이주가 약간 웃는 눈으로 이승우를 살핀다. 그의 시선이 이승우의 얼굴에 다시 멈춘다. 느긋하게, 꼼꼼하게 살피는 듯한 시선. 어딘지 흡족한 것을 바라보는 것 같은.

“어려 보이는데…….”

이승우는 대답 대신 그의 맨살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남은 손으로는 그의 뒷머리를 끌어당겨 거칠게 입을 맞추었다. 생각보다 행동이 더 빨랐다. 혀를 섞은 다음 그대로 입술을 미끄러뜨리며 이 남자의 목덜미에 진하게 입을 맞췄다.

그가 먼저 손을 뻗어 자신을 만지도록 종용하다니. 그것만으로 심장이 터질 듯 빠르게 뛰었다. 스스로 다리를 벌리는 그를 거부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그런 건 없다.

이곳이 꿈인 줄 알고 성욕을 풀기 위해 자신을 유혹하는 그를 보자 지옥에라도 떨어진 것처럼 괴로웠고 동시에 무섭도록 황홀했다. 말도 안 되는 죄를 저지르는 기분이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머리와 몸이 모두 도덕 따위는 무시한 채 이 행위에 열중했다.

“하, 하아…… 읏…….”

빨고, 핥고, 삼킬 듯 굴었다. 쾌감으로 흐려져 있는 눈동자에 대고 자신의 이름을 백 번도 넘게 물어보고 싶었다. 후들거리는 무릎을 붙잡고 이를 세웠다. 몹시 잘근거리며 아프게 깨물어 아무 흔적도 없는 하얀 무릎에 붉은 잇자국을 남긴다.

어떤 말을 해도 자신을 기억할 수 없다면 이 몸에 자신을 전부 새겨 넣고 싶었다. 그러면 그건 잊어도 잊은 게 아니게 될 거야. 얼굴이 웃는 듯 우는 듯 일그러진다.

반쯤 벗겨진 바지를 쓰다듬다가 단번에 벗겼다. 아래가 휑해졌는지 절로 모이는 다리 사이를 파고들며 몸을 비비듯 밀어 넣는다. 예민해진 국부를 문지르며 파드득 뛰어오르는 몸을 진정시켰다. 그 위로 아랫배를 맞대며 몸을 겹쳤다. 발긋해진 귀를 삼키며 물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으세요.”

“흐, 읏, 아아…….”

손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적당한 압력을 가하고 귓불을 빨면, 쉰 목소리로 신음성을 뱉으며 경련이라도 나는 듯 부들부들 떨었다. 그 귀에 대고 많은 것을 물어보았다.

어떤 방식이 좋은지, 어디가 유독 민감한지, 빨아 주는 것이 좋은지, 아니면 깨무는 게 좋은지. 거친 것이 좋은지, 부드러운 것이 좋은지. 둘 다 해도 좋고. 그가 자신을 흔드는 것만큼 그를 많이도 흔들어 놓았다.

“하윽, 아……!”

그러나 갈증은 해소되지 않고 속으로 켜켜이 쌓여만 갔다. 이승우는 오로지 그 갈증을 해소하기 위하여 몸을 움직였다. 두 번 다시 자신을 잊지 못하도록. 늘씬한 허벅지를 양손으로 쥔 채 자기 자신을 미친 듯이 각인시켰다.

갈수록 밀어는 사라지고, 길 위에서 짐승처럼 뒹구는 두 사람만이 남았다. 그를 돌려세워 개같이 붙어먹으며 버둥거리는 그의 뒷목을 힘껏 깨물었다. 눈 닿는 곳마다 깨물어대 온통 울긋불긋 흔적이 남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하아, 하아.”

이승우가 떨리는 손으로 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그리고 약간 미친 사람처럼 번들거리는 눈으로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장이주가 사라졌다.

그가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잔뜩 달아올랐던 머릿속은 순식간에 차가워지고, 이승우는 장이주가 떠난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다 제 손을 움켜쥐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이 순간 그를 휩쓰는 건 허무감이다. 높은 곳에서 단번에 떨어진 사람처럼 그는 치명상을 입은 채 몸을 굽혔다. 절망과 닮은 탈력감에 아무것도 못 하고 꼼짝없이 앉아서.

그대로, 가만히…….

빛이 꺼진 사람처럼 이승우는 길 위에 앉아 고개를 떨어트린 채 굳어 있었다. 석고라도 된 듯 움직이지 않던 그에게 균열이 생긴 건 오랜 시간이 지나서였다. 또다시 밤이 된 것이다.

그래, 밤이 되었다.

밤이 되면…… 그가 다시 「돌아온다」.

자신이 있는 곳으로. 그가 있어야 할 자리로. 이 길 위로. 어디든 좋아. 그와 함께 있을 수 있다면. 잠들어 있는 장이주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이승우는 그의 목덜미며 귓가에 그 어떤 흔적이 남지 않았음을 확인한다.

이승우의 얼굴은 그저 고요하다. 평정심을 잃지 않은 사람인 체하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이주는 눈을 떴고, 이승우를 본다.

“……누구?”

“저예요.”

입술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 같다.

“……나를 압니까?”

“네, 장 팀장님.”

홀린 듯 말하며 그에게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댄다. 당황한 듯, 놀란 듯 움찔대는 눈동자가 이승우의 얼굴을 찬찬히 확인한다. 자신이 아는 사람인지 확인하려는 시선은 조심스럽게 이승우의 이마부터 턱 끝까지 한 번 더 훑어 내렸다. 그리고 아주 빠르게 한 번 더.

이제 이승우는 그가 자신의 얼굴을 꽤 마음에 들어 한다는 걸 알고 있다.

“모르겠는데……. 혹시 이름이?”

그래, 알고 있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걸.

그는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고, 자신만이 그를 기억하고 있다. 술에 취한 듯 속이 점차 울렁거렸다. 그러나 이승우는 그린 듯 미소 지으며 그의 입술에 살짝 키스했다.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이곳은 꿈속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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